229화
‘……이걸 왜.’
왜 두고 간 것일까. 의아해하며 옷을 집어드는데, 길게 늘어진 아랫단 끝부분이 별안간 팽팽하게 당겼다. 유더는 제 몸 아래 옷자락이 약간 깔려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리고 조금 당혹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벗고 가지는 않았을 테고… 일단은 먼저 돌아가겠지만 이걸 돌려주러 오늘 내로 다시 찾아오라는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 쪽이 더 그럴싸해 보였다. 유더는 제 아래 깔린 옷자락 끝을 완전히 빼낸 뒤 대충 접어 옆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잔 덕인지 피로감은 한결 덜했지만 눈은 아직도 상당히 뻑뻑했다.
‘오늘 훈련에 꼭 참여할 필요는 없어 다행이지….’
평소라면 고작 하루 정도 밤을 샜다고 이리 힘들 일이 없었다. 아마도 상태가 좋지 않은 원인은 새벽에 일어났던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모든 게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쉰 뒤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일단 키시아르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싶었으므로 그가 남기고 간 겉옷을 접어 팔에 걸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단장실에 도달하기도 전,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는 유더를 불렀다.
“유더!”
고개를 돌린 그는 술과 부단장을 맡고 있는 스티버 렌들리를 마주했다. 그는 다른 술과 단원 두어 명과 함께 있었다.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자마자 스티버가 곧장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오전 내내 안 보이던데 어디 다녀오기라도 했어?”
그의 시선은 유더의 팔에 걸린 키시아르의 옷 쪽에 박혀 있었다. 누구의 옷인지 알아채지는 못했겠지만 대충 그와 연관된 일로 어딘가 다녀온 모양이라 짐작한 듯했다.
“아뇨. 일어난 시간이 조금 늦어서… 이제 막 움직이려던 참이었습니다.”
“늦잠? 별일이군.”
눈을 휘둥그렇게 떴던 스티버가 잠시 후 허허 웃었다.
“요즘 일을 너무 해서 피곤했던 걸 거야. 아무리 젊어도 건강이 최고지. 나도 40이 넘고 나니 확실히 전과는 몸 상태가 다르더라고. 미리 조심해야 해. 얼굴이 영 창백해 보이는데 우리 빵집에서 만든 특제 건강주스라도 좀 줄까?”
유더는 제 얼굴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 좋은 중년 사내를 향해 괜찮으니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세 분은 여기서 무슨 대화 중이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묘하게 그와 다른 단원들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그냥 잡담을 나누던 분위기는 아닌 듯해 물어보자 아니나 다를까 스티버가 감탄을 표했다.
“아니 어찌 알았어? 실은 아까 훈련장 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의논 중이었거든.”
훈련장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한눈에 들어도 심상치 않은 느낌에 유더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단장실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끼리 처리하기도 그렇고 해서 고민하던 참에 보좌인 네가 눈에 띄어 불렀지……. 하하.”
“단장실에 아무도 없다뇨. 주커만 경이 있을 텐데요.”
키시아르가 주기에 들어선 이후 부단장들은 거의 단장실에 오지 않았으나, 꼭 필요하다 여긴 경우에는 가끔 올라와 나단 주커만이나 유더에게 대신 의견을 전했다. 물론 나단 주커만이 항상 단장실에 상주하는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면 유더를 불러서라도 무언가 조치를 취했을 텐데, 아무 소식 없이 자리를 비웠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아예 문이 잠겨 있더라고. 그리고 몇 시간 전에 단장님의 마차가 빠져나간 걸 봤다는 녀석도 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단장님이 주커만 경과 너까지 모두 데리고 잠시 외출을 나가신 줄 알았지.”
턱을 문지르며 대답한 스티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남아 있었으니 다행이긴 한데… 흐음.”
‘마차가 나갔다고……?’
그렇다면 스티버의 말대로 키시아르가 잠시 마병단에서 나가느라 나단 주커만과 동행했을 확률이 높았다.
‘무슨 일이지. 아직 주기가 안 지나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텐데 괜찮은 건가.’
어디에 갔는지 짐작해 보려 해도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유더는 단장실에 올라가려던 계획을 일단 포기했다.
“그랬군요. 단장님께서 나가셨다는 사실은 저도 몰랐습니다.”
“네게도 말하지 않으셨다면 그리 먼 곳에 가지는 않으신 거겠지. 역시 오시고 나서 이야기를 전하는 쪽이 낫겠어.”
“하지만 스티버……. 그때까지 다들 참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은 상태라…….”
스티버의 곁에 있던 술과 단원이 찌푸린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술과 단원들 중에서 꽤 조용한 축에 속하는 도버라는 이였다.
“돌아가서 단장님이 오실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면 이번에는 정말 누군가 황궁기사단과 싸우러 훈련장 안으로 뛰쳐 들어갈지도 몰라요.”
“그게 문제긴 한데……. 후우. 다들 참을 만큼 참기는 했으니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물건의 상태도 걱정되고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유더는 그들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황궁기사단이라는 말은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쪽과 관련한 일인가.’
“으음. 그게 말이야…….”
결국 스티버가 난감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짧게 말하면 훈련장 사용 권한과 관련한 감정 문제에서 비롯된 일이야. 우리가 오전까지만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훈련장에서 빠져나오다가 한 녀석이 물건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려 가지러 갔다는데, 기사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하더라고.”
“막았다고요?”
유더의 반문에 도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것도 엄청 모욕적으로.’ 하고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중요한 물건이니 바로 가지고 나오겠다고 부탁했는데도 그쪽에서는 우릴 조롱했어. 그동안 계속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되진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폭발 직전까지 갔거든. 스티버를 통해 단장님을 불러올 생각으로 나와 몇 명이 먼저 돌아왔지만 이래서는 어떻게 하는 쪽이 나을지 모르겠어. 휴.”
마병단이 사용할 수 있는 훈련장 중, 숙소 뒤쪽에 있는 공터와 숙소 건물 내부의 작은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본디 황궁기사단이 사용하던 장소였다. 키시아르는 숙소에서 가까운 훈련장들을 골라 정해진 시간 동안에는 마병단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기사들은 당연히도 이 사실을 몹시 불쾌해했다.
그들은 훈련장 사용 권한이 바뀌어 교체하는 동안 종종 마병단원들에게 무언의 텃세와 압박을 보내기 일쑤였고, 일부는 훈련이 끝나기 전부터 바깥에서 들으라는 듯 시비를 걸기도 했다.
마병단의 이름이 높아진 축제 이후로는 그래도 조용해진 참이었는데 설마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이야. 스티버의 ‘참을 만큼 참았다’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훈련하던 다른 단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아직 훈련장 앞에 있어.”
“인원수는?”
“열…다섯 정도.”
“황궁기사단 쪽은?”
“스무 명이 넘어.”
유더는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은 단원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신중한 스티버조차 일단 기다리자고 말하면서도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간 이 문제로 꽤 골치를 앓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오늘까지 계속 참았다니. 새삼 황궁기사단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꿈틀거렸다.
“유더. 괜찮으면 지금 우리와 같이 가 줄래?”
도버가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유더에게 도움을 청했다.
“단장님을 기다리든, 어쨌든 우리만으로는 거기 있는 녀석들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울 것 같아. 황궁기사단 놈들이 그사이에 시비를 더 걸었을지도 모르고…….”
유더가 단신으로 시비를 거는 황궁기사단 기사를 여러 번 쓰러트린 사건은 마병단 내에서 이미 유명했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바라보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들을 보니 갑자기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유더는 일단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고마워, 유더. 원래는 부단장인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일인데……. 부끄럽지만 같이 가 준다니 이리 든든할 수가 없구먼.”
스티버가 한숨 돌린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죠.”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이야. 피로해 보였는데 이런 일로 불러내서 우리가 미안할 뿐이지.”
유더는 스티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단원들에게 인망이 높고 능력 또한 훌륭한 그지만 적대적인 상황에서 부단장 역할을 하는 경험은 아직 한참 부족하니 걱정이 되었으리라. 자존심이 상할 만한 상황임에도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솔직하게 웃는 모습이 새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에버와 마찬가지로 경험은 하다 보면 느는 부분이니까 상관없지.’
이번 기회에 아예 그에게 이런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쪽도 좋으리라. 그들이 키시아르에게 먼저 말하러 온 건 좋은 선택이지만 황궁기사단 놈들을 그리 배려해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이젠 알 필요가 있었다.
“도버! 왔어?”
“단장님은?”
“응? 단장님이 아니라 스티버랑 유더가 같이 왔는데.”
“유더?”
“유더라고?”
도버의 안내를 따라 술과 단원들이 모여 있다는 훈련장으로 향하자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숨기지 않은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유더는 그 사이에서 낯익은 엘더 남매의 말간 얼굴들을 발견하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과연 도버가 화난 단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더니, 엘더 남매가 끼어 있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자 훈련장 안쪽에서 보란 듯이 과시하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이 보였다. 이쪽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으나 누가 보아도 비웃는 얼굴들이었다. 대부분은 모르는 이였지만 세 명 정도는 낯이 익었다. 이름을 모르는데 낯이 익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얼마 전 키시아르를 무시하고 지나간 이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유더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흠……?’
키시아르를 무시했던 이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박아둔 뒤 또다시 주변을 둘러보던 유더는 또 한 명의 낯익은 기사를 발견했다.
‘키올레 다 디아카. 여기서 다시 보는군.’
그는 기사들 중 가장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해대는 중이었다. 아직 유더를 발견하지 못한 기색이었으나 유더는 그를 보고 나서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풀릴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스티버! 들어봐요! 아니 대체 저놈들이…….”
“단장님 허락을 받고 온 거지? 그러면 우리 이제 훈련장으로 들어가도 되는 거야?”
“잠깐, 잠깐만. 내 말 좀 일단…….”
유더는 흥분한 강아지들에게 휩싸인 것처럼 손을 젓는 스티버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미안하지만 단장님은 지금 안 계셔.”
“엉?”
나직하지만 기이하게도 사람의 신경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단원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안 계시다고? 그러면 우리 또 못 들어가?”
“내일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해?”
엘더 남매가 일제히 물었다. 유더는 제게로 향한 여러 쌍의 시선을 감내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열없이 다물고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희미하게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