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반점이 옅어졌어?’
착각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짙게 물들어 거의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던 손이 방금 전보다 확연히 옅은 보랏빛으로 변화한 상태였다.
유더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살펴보다 다시 한 번 목 아래쪽 옷자락을 잡아당겨 안을 들여다보았다.
‘…범위가 줄어들지는 않았어.’
어깨를 넘어 가슴까지 물들인 반점의 범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쪽도 색은 훨씬 옅어진 상태였다. 유더는 가만히 그것을 노려보다 깊이 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해 보자.’
신력으로 치유를 받았을 때와 지금. 두 상황에서 달라진 게 뭘까.
‘그때는 각성자의 힘을 쓸 때마다 반점이 번지며 고통이 늘어났고, 치유 받을 때도 아프긴 마찬가지였지. 2성 발현과 지하실 사건 이후에는 나아졌지만… 하지만 지금 이건…….’
본래 사용하던 대로 각성자의 힘을 쓴 게 아니라, 갑자기 손에서 뿜어져 나와 팔을 감싼 붉은 기운을 움직여 키시아르를 살피는 과정에서 반점이 늘어났다. 반점의 범위가 이전보다 훨씬 크게 늘었음에도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으며 본디 가지고 있던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하자 색이 옅어졌다. 신력으로 치유를 받을 때와 달리 아프지 않고, 범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색이 옅어진다는 게 이 과정의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통증이 거의 없는 건 몸이 변화한 이후 계속 그래 왔었으니 그 비슷한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내 손에서 흘러나왔던 그 붉은 힘은 어떻게 여겨야 할까.’
유더는 이 기이한 상황의 원인이 바로 제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힘과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했다. 평소 사용하는 각성자의 힘은 그런 색을 띠지 않았다. 다른 각성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강하게 집중해야만 아지랑이처럼 살짝 일렁이는 투명한 기운이 겨우 보일까 말까 한 정도였다.
‘지하실에서 붉은 돌의 힘과 연결될 때 빛났던 그때와 오늘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그간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돌의 힘과 연결되었던 제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힘의 유사성.
그간 반점과 관련하여 점차 변화해 온 제 육신.
타이스 율만의 가설과 추측들. 이논이 말했던 독과 같다던 비유.
키시아르의 몸 안에 있던 엉킨 힘 덩어리를 없앤 뒤 갑자기 증폭된 능력.
그리고 매개체.
유더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기를 반복하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매개체라.’
이논은 이전에 그의 몸이 몸에 침투해 들어온 붉은 돌의 힘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면 살아있는 매개체나 붉은 돌 그 자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그 경우 본래 지녔던 힘에 붉은 돌의 힘 원액이 더해져 더욱 강해질지 모른다는 추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반점처럼 파고들어 동화된 붉은 돌의 힘은 내가 본래 지녔던 각성자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라 그냥 원본 그대로인 채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어떤 원인 때문에 흘러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오면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제어 가능한 형태로 말이다.
‘반점이 늘어나는 이유가 몸에 본디 지녔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들어왔기 때문이라면, 이번에 반점이 늘어난 건… 내가 키시아르의 엉킨 힘 덩어리를 그냥 풀어준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부 흡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매개체는 힘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제가 한 일임에도 벌써 그때의 감각들이 꿈에서 일어난 일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을 있는 힘껏 붙잡아 움직였던 느낌과 두 힘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던 순간 느꼈던 뜨거운 고양감만은 아직 비교적 선명했다.
유더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그 안에서 점차 울컥거리며 작아져 가던 키시아르의 힘 덩어리를 떠올렸다.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이제와 떠올리면 마치 무언가에 빨려들어 가는 모습과 흡사해 보이지 않았던가?
과연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모든 게 억측이고 다 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이 상황에 제일 들어맞는 추측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유더는 익숙하게 움직여 왔던 제 몸이 갑자기 조금 낯설어지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소름이 돋는군…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내가 정말 살아있는 매개체와 비슷한 상황이 된 거라면 말이야…….’
타이스 율만은 붉은 돌의 힘이 담긴 매개체는 그 어떤 마법도 출력하지 않도록 되어 있음에도 각성자의 힘을 빨아들여 증폭한 뒤 출력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전 유더가 사용했던 힘 또한 사용한 양보다 훨씬 증폭된 채 발현되었다.
‘그렇게 사용한 뒤에는 매개체에 든 붉은 돌의 힘이 조금씩 줄어든다고 했고, 내 반점도 한층 옅어졌으니.’
이건 역시 제 추측이 맞다는 뜻으로 보아도 될까.
유더는 목 안이 괜스레 메마른 기분에 침을 삼킨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인간 취급을 못 받을 정도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강해지는 건 좋다. 그러나 유더는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쪽을 선호했지, 이런 식으로 알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되는 건 그리 기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붉은 기운이 몸을 휘감거나 연결되는 순간 느껴지는 몽롱한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분명 알지 못하는 것들인데 어쩐지 보기만 해도 본질이 느껴지거나 이다음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 수 있게 되던 순간의 그 이상한 감각이라니.
‘하지만 그 붉은 힘이 적절한 순간 튀어나와 준 덕에 키시아르의 몸이 어떤 상황인지 볼 수 있었던 건 맞으니 사실은 고마워해야 하나.’
제가 제대로 잘 없앴는지, 혹은 흡수했는지 모를 힘 덩어리가 깨어난 키시아르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아직 알 수 없어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래도 그의 한결 편안해진 호흡이나 표정을 보면 본능이 말하는 예감은 어쩐지 그리 나쁜 결과가 될 것 같지 않아 거기에 걸어볼 따름이었다.
“후우…….”
생각을 어느 정도 정돈하고 나니 며칠간 자지 못했을 때처럼 눈이 뻑뻑해지고 피로가 몰려왔다. 유더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아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삼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희미하게 커튼을 통해 들어온 빛을 머금어 잘게 빛나는 금빛 속눈썹도, 핏기가 돌아 시선을 끄는 입술도 하나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유더는 눈을 감고 있는 그보다는 뜨고 있는 그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지독하게 지치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모습으로 돌아다닐 순 없으니 힘을 좀 더 써서 최대한 반점을 없애 보자. 어디까지 사라질지 모르니 그것도 확인해 보아야 하고……. 또 뭘 확인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대로 앉은 채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유더는 그 마음을 떨쳐내며 힘을 그러모았다. 힘이 증폭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계산을 마친 뒤 손을 살짝 움직이자 곧 적당한 크기의 불꽃이 다 죽어가던 등잔 위로 훅 타올랐다.
힘 조절하기를 어려워하는 단원들이 보았다면 그대로 쓰러져 울었을 일을 해내고도 유더의 얼굴에는 뿌듯함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꽃을 유지하는 동안 점점 옅어져 가는 반점과 키시아르의 얼굴을 피로한 얼굴로 번갈아 지켜보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머릿속이 점차 멍해지기 시작했다.
…….
꿈조차 꾸지 않고 죽은 듯 잠에 빠져든 몸에 문득 누군가 손을 올렸다.
‘…이런.’
난감한 기색으로 중얼거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잠시 후 조심스럽게 다리 밑으로 파고든 다른 손이 몸을 가볍게 끌어올려 품에 안았다.
얼굴에 맞닿은 품속에서는 몹시 낯익은 향이 났다. 이제는 분명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향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이 낯설어 이마를 찌푸리자 머리 위에서 무어라 웃음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왜일까.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워. 요정이라도 다녀갔나 싶군.’
유더의 몸을 푹신한 곳 위로 내려놓은 팔은 금방 떠나가지 않고 주변을 꽤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몇 번인가 매만질 때마다 서늘한 온기가 묘하게 기분을 고양시켰다.
몽롱하고 기분 좋은 이 감각이 현실일 리 없다. 제게 그런 현실은 존재할 리 없으니까. 간단히 결론을 내린 정신이 다시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정말 이상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유더는 퍼뜩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분명 등잔에 붙인 불을 지켜보며 반점이 옅어지는 광경을 마지막까지 확인하려 하던 도중이었는데,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혹하여 손을 올리자 깨끗하게 변한 피부가 보였다. 다행히 반점이 전부 옅어지고 나서 잠든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다음으로 눈을 돌리자 아무도 없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키시아르는 없었고, 유더 자신이 어느샌가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언제 누웠지.’
멍하니 고개를 돌려 본 창문은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단단히 쳐둔 탓에 밤처럼 어두웠다. 그 너머로 희미하게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그리 오래 잠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유더는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그러자 이불보다 먼저 무언가가 몸 위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 뭔가 싶어 내려다보니 그것은 누군가 걸치고 있었던 겉옷 자락이었다.
보통 사람의 옷보다 훨씬 크고, 신분이 고귀한 자가 아니라면 입을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상의. 누구의 옷인지는 보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이걸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