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유더의 손을 휘감은 기운과 같은 빛을 띤 각성자의 기운이 그를 환영하듯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이쪽이 조금 더 쉽게 만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과 달리 각성자의 힘 쪽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다른 힘을 만지려 했을 때처럼 반발을 일으키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으나, 그 힘은 그저 유더의 손에 달라붙으려는 듯 휘감겼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만을 반복했다. 제멋대로 닿으려는 것 같다가도 슬쩍 뭉그러지며 빠져나가는 게 마치 제 주인 같아 어이가 없었다.
‘힘도 주인을 닮나…….’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실패였다.
‘나머지 3개의 힘은 반발이 너무 심하고, 각성자의 힘 쪽은 제대로 잡기가 힘드니…….’
포기하고 일단 물러서는 쪽이 나을까. 유더는 잠시 고민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더 위험해지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일어난 이 기회가 다음에 다시 찾아오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만약 이게 단 한 번뿐인 절호의 기회라면 이대로 물러섰을 때 분명 후회하게 되리라. 유더는 제 손을 감싼 붉은 기운을 내려다보다 이를 악물었다.
‘역시 일단 힘이 닿는 부분까지는 해 봐야겠지.’
다행히 키시아르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오르던 불기둥을 불러내던 때보다도 지금이 더욱 기운이 빨리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버틸 수는 있었다. 유더는 붉은 기운에 휩싸인 손 대신 반대쪽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무작정 만져보기보다 일단 자세히 보고 나서 행동하자.’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눈에 힘을 주었다. 머리가 깨질 듯 쑤셔 오며 키시아르의 몸을 휘감은 기운의 흐름이 조금 더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어떻게 봐도 저 뒤엉킨 덩어리들이 문제라는 건 분명한데….’
본래대로라면 몸 안을 흐르는 피처럼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잘 흘러가야 할 힘들이다. 지금처럼 서로 뒤엉켜 뭉친 채 길이 막힌 상황이 몸에 좋을 리 만무했다. 지금은 키시아르가 잠들어 있는 덕인지 힘의 흐름들도 몹시 느릿느릿했지만 흐름이 빨라진다면 충돌과 뒤엉킴도 한결 심해질 터였다.
‘그러다가 저 명치의 뿌리 같은 힘 덩어리에 부담이 가해져 이상이 생기는 상황을 그릇에 금이 간다고 표현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키시아르가 말했던 ‘주기’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가 갔다. 그의 몸 안에 존재하는 네 개의 힘이 균형을 잘 맞추지 못하고 어느 하나라도 심하게 팽창하거나, 혹은 넷 모두 늘어나 길을 제대로 타고 흐르지 못할 만큼 막힌다면 서로 뒤엉킨 저 덩어리들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그런 문제가 증가하다 보면 결국 탈이 날 테니 기운이 좀 팽창하기 전에 미리 몸에 쌓인 힘의 절대량을 빼내려 드는 과정이 필요했을 터였다.
‘…너무 많아져서 막히다 못해 터지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했겠지.’
키시아르는 그릇이 깨진 황족들이 몸이 터져 죽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도 결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격은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고.’
보통 인간은 하나만 가지기도 힘든 힘을 여러 개나 타고난 탓에 생긴 문제니 해결책을 찾기도 힘들었을 터다. 솔직히 지금 눈을 통해 그 거대한 힘들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유더도 어디서부터 손을 댈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머지 3개의 힘을 바깥쪽에서 단단히 감싸 울타리처럼 틀어막고 있는 각성자의 힘이 아니었다면 키시아르 또한 진작에 몸이 터져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섬찟했다. 몸이 터져 죽은 황족의 이야기를 들었던 때는 막연히 끔찍한 광경이리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힘의 흐름을 보고 있으려니 어떤 식으로 문제가 생겨 터져나갔을지 몹시도 잘 상상이 되어서였다.
유더는 절로 싸늘해지는 머리를 흔들며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지금의 키시아르는 그런 죽음을 맞을 일이 없어.’
하지만 키시아르가 이곳에 오기 전 제 팔을 찢어 피와 힘을 뽑아내고 왔다는 사실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자 심경이 약간 복잡했다.
다시 한 번 관자놀이에서 배어나온 땀을 닦은 뒤 손에 힘을 주었다. 키시아르의 몸을 타고 흐르는 힘 중, 그나마 각성자의 힘이 고여 있는 위치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엉킨 부분이 작은 쪽을 향해 팔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하실을 무너뜨릴지 모를 붉은 돌의 힘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있는 힘을 다해 그 힘을 붙잡기 위해 집중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처럼… 한 번만 더!’
손뼈가 부러질 듯한 압력이 밀려오며 손가락 끝이 마구 떨렸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 때문에 폐가 터질 것처럼 부풀기를 반복하며 고통스러워해도 극도로 집중한 상태의 유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잡을 수 있어.’
저 뒤엉킨 힘들을 감싼 각성자의 힘. 그것을 붙잡아야만 한다.
부릅뜬 눈동자 위로 열기가 올랐다. 몸이 마구 떨렸다. 마치 연기와도 비슷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유더의 눈동자 안쪽을 붉은 자줏빛으로 물들였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손끝에 붙잡힌 순간.
유더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벌벌 떨리는 손 안에서 붉은 기운이 불타오르듯 강하게 빛을 냈다.
‘잡았다!’
키시아르의 몸 안에 흐르는 각성자의 ‘힘’을 잡았다.
유더는 제 손을 피해 달아나려 하는 듯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 안에 붙잡은 키시아르의 기운이 일렁거리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제가 쥐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무언가를 억지로 붙잡은 기분이었다. 손가락이 터질 것처럼 아리고 뜨거웠지만 주먹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붉은 돌의 힘을 붙잡았던 그때와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손을 통해 힘과 연결되어 있었다.
‘키시아르는…….’
붙잡고 나서 반사적으로 눈을 돌려 바라본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잠든 상태였다. 아까 뒤엉킨 힘 부분을 그냥 손대보려다 반발이 일어났던 때와는 달리 고통을 느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제 어떻게 할까.’
멍하니 생각하자 마치 답을 주듯 각성자의 힘이 꿈틀거렸다.
‘…그래. 엉킨 덩어리를 각성자의 힘이 감싸고 있으니 엉킨 기운이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바깥쪽에서 길을 넓히는 느낌으로… 움직이면…….’
유더는 숨을 내쉬며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유더의 손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뒤엉켜 있던 작은 힘 덩어리를 감싸고 있던 각성자의 기운이 그의 의지를 따라 팽창하거나 짓눌리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미약하게 고개를 쳐들었던 의문이 서서히 울컥거리며 작아져 가는 기운을 보면서 점차 확신으로 뒤덮었다. 귀 안에서 광풍이 몰아치는 양 윙윙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모든 기력이 오로지 손을 움직이는 데만 집중적으로 빨려 나가는 듯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를 움직였을까.
엉켜 있던 기운들이 완전히 스르르 풀리며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막힌 곳 없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 깨끗하게 흐르는 기운뿐이었다. 유더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참았던 숨을 일시에 내쉬었다.
“……하.”
정말로 해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고작 키시아르의 몸 안에 엉켜 있던 힘의 뿌리 하나를 없앴을 뿐이지만 마치 태어나서 해낸 모든 일 중 가장 큰 일을 성공한 듯 느껴졌다. 심장이 산 하나를 꼬박 달려서 넘었던 때처럼 마구 뛰어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 있던 키시아르의 호흡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느릿하고 안정적으로 변한 듯도 했다.
‘…이 이상 뭔가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본능적인 판단과 함께 유더는 천천히 손을 폈다. 손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스르르 사그라지며 눈을 통해 보이던 모든 풍경이 이지러졌다. 지독한 피로와 허기가 몰려들었다.
잠시 후 눈을 다시 감았다 떴을 때에는 본래대로 이상한 힘 따위는 보이지 않는 평범한 방 안 풍경만 보일 따름이었다.
“…….”
눈을 꼭 감은 채 잠들어 있는 키시아르와 그를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는 자신.
그러나 닫힌 커튼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손등을 물들인 짙은 자줏빛 반점, 그리고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대는 손바닥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처럼 빛나고 있었다.
유더는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줏빛으로 변한 피부가 끝없이 이어졌다. 소매를 내리고 어깨 쪽 옷자락을 조금 잡아당겨 안을 보니 반점은 어깨를 넘어 가슴 아래까지 번진 상태였다.
‘…….’
순간 머리가 아찔했으나, 이상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힘을 쓰면 다를지도 모르지…….’
유더는 혹시나 싶어 손가락 하나를 올려 물의 힘을 미약하게 사용해 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아주 작은 물줄기를 불러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주전자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법한 물이 공중에서 퍽하고 흘러넘치며 그의 무릎과 얼굴을 적셨다.
유더는 물에 젖은 무릎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바람을 불러내었다. 이번에도 물을 마르게 할 정도의 힘만 불러낼 생각이었는데, 순식간에 헛숨이 터져 나올 만큼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며 옷을 말리다 못해 빳빳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게… 대체.’
힘 조절에는 분명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몇 배 정도 증폭되어 나타났다. 순간 타이스 율만과 그의 제자 알릭이 보여주었던 실험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당연한 결과였다. 혹시 제 옷 안에 매개체가 있었던가 싶어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침의용으로 입었던 평상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난리 도중에도 키시아르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더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멈칫했다.
‘반점이 옅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