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그냥 두자.’
뺨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다리를 두고 결국 물러난 유더는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키시아르가 앉았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누운 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잠든 키시아르의 얼굴은 생각보다 몹시 편안해 보였다. 호흡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뒤척임 한 번 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왜인지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너무 시체처럼 자는 것 아닌가?’
시체. 무심코 떠올린 단어에 문득 오래전 묻어두었던 기억이 불쑥 물 위로 떠올랐다. 마병단장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겨울이 지나기 전 열렸던 펠레타 공작의 장례식 풍경. 이전 황가의 마지막 핏줄의 장례식이었음에도 황량하기 그지없던 관 앞.
전신을 후비고 찌르던 적대적인 시선과 수군거림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꽃을 놓고 돌아섰던 그때, 관 속에 누워 있던 얼굴이 저러했었던가.
“…….”
유더는 무릎 위에 두었던 주먹을 꽉 쥐며 잡생각을 몰아냈다.
‘이전 생의 꿈을 꾼 탓인지 자꾸 별생각이 다 드는군.’
키시아르를 마주하며 느끼는 뜨거운 충동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도 반동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는 했다. 시간은 되돌렸어도 기억은 그대로이니 당연할지도 모르나, 처음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던 비밀의 무게가 날이 갈수록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 문제가 좀 있었다.
키시아르가 스스로의 속내를 하나씩 내비쳐 보여줄 때마다 유더는 제가 감춘 기억들의 무게를 새삼 선명히 자각하고는 했다. 이전 생에는 키시아르가 감추는 비밀들을 알고 싶어 했던 그가 이제는 반대 입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차이는 확고했다. 그때의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진실을 밝히라 외쳤지만, 지금의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쪽에서 먼저 속을 내보이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이었으니까.
지금이야 괜찮다지만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 충동이 과연 그를 어디로 이끌까. 이전 생과 달라진 모든 일들이 대부분 기꺼웠지만 키시아르와의 관계만은 늘 다르게 느껴졌다.
쥐었던 손바닥을 펴니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유더는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을 올려 제 입술을 손바닥 안쪽에 대어보았다. 키시아르의 입술이 닿았던 때와는 달리 이번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나 싶어 허탈하게 숨을 내쉬고 나니 창밖 너머로 슬슬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비쳤다. 평소였다면 기꺼이 쐬었을 햇살을 피해 일어나 커튼을 치면서, 유더는 단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미 갈림길은 넘어섰어.’
무슨 생각을 해도 돌아서기에는 이제 너무 멀리 왔다.
그와 입을 맞추었던 기억이 아직도 종종 떠오르듯이 오늘 닿았던 손바닥 안쪽의 열기도, 품 안에 힘없이 쓰러지던 몸을 끌어안던 순간의 감각도 결코 잊을 수 없게 되리라.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상황은 당초의 예상과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내가 키시아르를 지켜야 하는 건 변함없지. 그것만 생각하자.’
유더는 도로 의자에 앉으려다 멈추어 선 채 키시아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잠들면서 몸을 두르고 있던 기운도 함께 잠들기라도 했는지 억지로 억누르던 때보다 훨씬 주변이 고요했다. 그래도 정신을 집중하면 공기 중으로 발산되는 묵직한 기운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릇이라…….’
키시아르에게는 무려 네 개나 되는 힘이 깃들어 있다. 오러와 마력, 신력, 그리고 각성자의 힘이었다. 존재 자체가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오히려 그 힘이 지나친 탓에 이리 오랜 세월 고통받고 있다는 게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그릇인지 뭔지를 눈으로 보거나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마법사들은 각자 얼마나 많은 마력을 쌓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들었다. 검사들도 소드마스터 정도 된 이들은 서로가 지닌 오러가 얼마나 오랜 세월 쌓아왔는지 대충 알 수 있다고 했다. 사제들의 경우는 더욱 확실하게 가진 신력의 양을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네 개의 힘 중에서는 각성자가 지닌 힘의 양을 파악하는 게 가장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힘을 사용하며 흐름에 예민해진 유더 정도 되는 이들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집중했을 때 눈으로 힘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각성자의 힘은 대개 상반신과 하반신이 갈리는 지점인 배꼽 아래에 고였다. 어떤 이들은 다른 데 고이기도 하지만 유더가 이전 생에서 단원들을 보며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다른 건 내가 못 하겠지만, 그래도 각성자의 힘 정도는…….’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주기 상태라 몸 주변을 두른 힘의 흐름이 남들보다 확연히 보이는 사람이니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민하며 내민 손이 이불 위에 닿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그 얇은 한 장의 가림막을 살짝 걷고 드러난 몸 아래, 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옷을 걷으면 더 확실하겠지만 혹 깨어났을 때 오해를 살 일은 방지하고 싶었다.
‘어차피 흐름을 통해 파악하려는 거니까 거기까지는 필요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배 위에 손을 얹고 눈에 막 힘을 주어 집중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한 압력이 손 아래에서 느껴졌다.
‘음?’
대비할 틈도 없이 훅 하는 소리와 함께 키시아르의 몸 안쪽에서 침입자에게 반발하듯 밀려나온 강렬한 기운이 유더의 손을 쳐내듯 밀어냈다. 동시에 덩달아 뜨거워진 손등 위로 붉은 빛이 어렸다.
요즘 몹시 옅어졌던 자줏빛 반점에서 남아 있던 자국들을 따라 터져나온 빛이 키시아르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과 팽팽히 서로를 밀어내듯 맞섰다.
‘…이게 무슨.’
재빨리 손을 거두었지만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멈추지 않았다. 유더는 마치 지하실에서 일어났던 붉은 돌 매개체 사건 때와도 비슷한, 이 공간에 존재하는 힘들을 제가 만지고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윽…!”
급속도로 빨려나가는 기운에 신음하며 힘겹게 다시 한 번 키시아르의 몸 쪽으로 손을 뻗자 기운이 한번 더 발산되며 몸이 한 번 흠칫 튀었다. 키시아르가 깨어난 줄 알고 놀라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건…….’
유더는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키시아르의 몸 주변을 휘감은 기운 일부를 꽉 붙잡았다. 손에 닿는 실체는 없었지만 ‘잡았다’는 감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붙잡은 지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후 손 안에서 날뛰던 기운이 부르르 떨며 스르르 사그라졌다. 키시아르의 몸을 두르고 있던 기운 전체가 동시에 힘없이 가라앉더니, 갑자기 눈에 이전과 다른 낯선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의 전신 위로 서로 색과 결이 다른 기운들이 휘몰아치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단 한 번도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것들이건만 이상하게도 그 정체가 곧바로 선명히 느껴졌다.
머리 쪽을 휘감은 흰 신력, 양손에 가장 많이 두른 바람처럼 푸른 오러, 심장에서부터 바깥을 향해 핏줄처럼 가지를 뻗친 금빛 마력, 그리고 배 아래쪽에서 시작하여 전신을 단단히 감싼 붉은 힘.
아마도 그 마지막 붉은 힘이 키시아르가 지닌 각성자의 힘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드물게 너무 놀라 머릿속이 희어질 정도였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유더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붉은 기운을 짜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몸 이곳저곳을 감싸고 도는 네 개의 힘은 얼추 균형을 맞춘 듯 보였지만 서로 만나는 부분이 군데군데 어지럽게 얽혀 묶인 탓에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뭉친 부분은 중앙에 가까운 명치 부근이었다.
마치 제2의 심장처럼 뭉친 채 펄떡대는 주먹만 한 덩어리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저건 또 뭐야.’
눈에 한껏 힘을 주어 보니 그것은 마치 모든 힘이 처음부터 시작된 뿌리처럼 보였다. 서로 엉키고 설켜 덩어리처럼 변한 뿌리에서 네 개의 힘이 흘러나가고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서로의 경계를 나누고 합치기를 반복했다.
피 대신 기운이 연결되어 흐른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로 제 2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부분인 모양이었다.
덩어리의 가장 바깥쪽을 두르고 있는 건 이번에도 붉은색 힘이었다. 그 힘이 주변을 강하게 감싸고 있어 비로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설마 저게 그릇이란 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거대한 힘이 느껴졌으나 동시에 몹시 초조해졌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몸을 휘감고 흐르는 그 힘들의 흐름을 지켜보다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엉킨 힘의 묶음 쪽에 슬며시 손을 대어 보았다. 일단 그것들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볼 셈이었다.
붉은 힘이 서린 손끝이 서로 엉킨 힘 쪽에 닿자 얽힌 매듭처럼 보이던 부분이 꿈틀 튀더니 불꽃이 타닥 튀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키시아르 또한 같은 부분에서 통증을 느낀 듯 눈꺼풀을 움찔 떨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더는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잠시 참다 숨을 내쉬었다.
‘…반점이 불어나던 때와 비슷하게 아픈데.’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했다. 혹시나 싶어 내려다본 손은 붉은빛에 휘감겨 있어 반점이 늘어났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한 번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이번에는 붉은 기운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배 쪽이었다. 유더의 손을 휘감은 기운과 같은 빛을 띤 각성자의 기운이 그를 환영하듯 부드럽게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