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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25화 (225/805)
  • 225화

    유더는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이곳이 제대로 치우지 않은 제 숙소라는 것도, 해가 밝으면 여느 때보다도 더욱 바쁘게 일해야 하는 날이란 사실도 순간 머릿속에서 모조리 사라졌다.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으니 키시아르가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뺨을 만지려는가 짐작했지만 어느 정도의 틈을 두고는 멈춘 채 움찔 떨며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망설임을 담은 손끝이 몇 번 움츠러들었다가는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단장님?”

    왜 그러느냐는 뜻을 담아 부르자 키시아르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욕심 같아서는 이대로 닿고 싶은데.”

    무언가를 강하게 억누르는 듯 지그시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뒤 말이 이어졌다.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힘 조절을 못 하고 상처 입힐까 싶어서 못하겠어.”

    이전에 단장실에서 어디까지 만져도 되느냐며 농을 해 놓고 피했던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 정도로 자제하지 않아도 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유더는 무릎 위에 올린 제 손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다칠 만큼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알아. 하지만 내가 무심결에 알파 발현자의 기운이라도 흘린다면 꺼려지지 않겠나?”

    “그건…….”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유더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미간을 찌푸렸다.

    키시아르는 유더의 2성 발현 때 겪었던 사건 이후 그가 알파 발현자를 두려워하거나, 최소 싫어하는 건 분명하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의 사건은 과거의 기억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그 일을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더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데 정확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저는, 알파 발현자가 싫은 게 아닙니다. 그냥… 그때는.”

    말을 하다 말고 결국 침묵하자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정하기도 하군, 내 보좌.”

    다정하다니. 평생 들어보리라고 생각지 못한 평이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해도 그리 당혹하지는 않았으리라. 유더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키시아르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릇에 금이 간 황족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나?”

    “모릅니다.”

    “제 기운을 제어하지 못하고 새어 나오게 되면 주변에 상처를 입혀. 작게는 들고 있던 잔이 터지거나, 크게는 몸에 닿은 생명체가 갑자기 죽어 나가기도 하지.”

    무심히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스스로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내 경우는 손에 닿았던 애마의 다리가 부러졌어.”

    차가운 바람이 뒤통수를 훑는 기분이 들었다.

    “생일 선물로 하사받아 정말로 아꼈던 녀석이었는데, 그 일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

    “…….”

    “나단도 몇 번이나 내 곁에 있다가 죽을 뻔했어. 기사답게 전투를 치러서가 아니라, 단순히 모시는 주군이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말이야.”

    부드럽지만 자조적인 어투였다.

    “지금도 때때로 그 일들을 떠올리곤 하지.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약한 생각을 하게 돼.”

    아마 힘이 멋대로 날뛰는 주기라서 더 그럴 터라 중얼거리던 눈동자가 유더의 얼굴로 향하더니, 문득 웃음을 흘렸다.

    “요즘은 주로 귀여운 내 보좌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너무 아끼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앞으로도 더 망설이면 망설였지 결코 덜해지지 않을 거야.”

    대놓고 농을 섞었는데도 내용 때문인지 무어라 한마디 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지겨운 기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는…….”

    기쁜 감정을 띠고 있기는 하나 묘하게 또다시 추워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던 유더는 키시아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불쑥 내민 손이 흰 뺨에 닿자마자 키시아르가 번개라도 맞은 듯 말을 멈추었다.

    “……아무 일도 없지 않습니까.”

    어색하기는 해도 다행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정도는 충분히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 생각합니다. 주기로 인해 예민해지셨다 해도 지나친 염려는 오히려 몸을 해칠 수 있으니 그러지 마십시오.”

    키시아르가 그제야 눈동자를 스르르 굴려 왼쪽 뺨에 닿은 손을 보았다. 차가웠던 뺨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누가 본다면 엄청난 불경죄라 외치며 당장 체포하려 들겠지.’

    감히 황족의 몸에 먼저 손을 대다니. 제국 역사상 그 어떤 평민이 이런 짓을 해 보았을까. 손바닥 안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기분에 슬슬 손을 떼어야 할지 말지 고민한 순간, 키시아르가 겨우 웃을 듯 말 듯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유더의 손등 위로 서늘한 온기가 새로 덮였다. 제 손으로 유더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감싼 키시아르가 고개를 슬쩍 기울여 뺨을 더욱 세게 쥐게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제 손 안에 머리를 기대고 비비는 듯한 착각이 드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려니 잠시 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맞아.”

    “…….”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군.”

    “네. 이 정도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키시아르가 웃었다. 그와 동시에 차가웠던 뺨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조각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광경을 손을 통해 느낀다면, 아마 지금 같은 감각이었을지 몰랐다.

    “이게 얼마 만인지…….”

    한숨을 닮은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손바닥 아래로 움직이는 입술의 감각이 간질거렸다.

    “상상보다 훨씬 따뜻해.”

    키시아르가 점점 고개를 틀수록 입술이 손바닥과 가까워졌다. 손을 빼내야 하나 싶었으나 꽉 쥐고 있는 큰 손은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 마침내 유더의 손바닥 아래 완전히 입술을 묻은 키시아르가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었다.

    겨우 숨 쉴 곳을 찾은 새처럼 가느다란 호흡이었다.

    “……단장님.”

    “조금만 더.”

    부르자마자 더욱 꽉 잡힌 손 안에서 입술이 움직였다. 간지러워 손끝을 움찔 떨자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습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아…….”

    마침내 손이 저릴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을 뗀 키시아르가 아쉽게 손을 놓아주며 잔뜩 느른해진 맹수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입술에 이전과 달리 핏기가 몰려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선정적으로 보여 유더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두드렸다.

    “이제 일어나야겠어.”

    벌써 가느냐고 물어보려던 유더는 어느새 창밖의 어둠이 훨씬 옅어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다지 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언제 시간이 그리 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 있다가는… 나단이 내 부재를 깨달을 테니까.”

    “돌아가시자마자 조금이라도 주무십시오.”

    “내가 할 말을.”

    잠 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얼굴이 방금 전보다 더욱 느른하게 풀어졌다. 아무래도 손이 닿은 이후 억눌렀던 긴장이라도 풀린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따라 나오지 않아도…….”

    짧게 말하며 먼저 몸을 일으키던 키시아르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찻잔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단장님?”

    몸에 이상이 생겼는가 싶어 깜짝 놀라 일어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짚었다.

    “……아니야. 이건,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졸음이라뇨.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그간… 별로 못 자기는 했지.”

    잠을 못 잤다니. 주기 때문인가 싶어 더 물으려 했지만 키시아르가 또다시 한 발짝을 내딛으려다 비틀거려 그럴 수 없었다. 유더는 빠르게 일어나 키시아르를 부축했다.

    “닿으면 안… 괜찮다는데도.”

    뿌리치려 드는 손을 억지로 붙잡아 어깨에 둘렀다. 키가 범인과 비교를 불허할 만큼 큰 탓에 그것만으로도 약간 버거웠다.

    “되었습니다. 바로 단장실로 옮길 테니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그러나 몇 발짝을 내딛기도 전에 키시아르의 무릎에서 완전히 힘이 풀렸다. 유더는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윽.’

    다행히 본능적으로 발휘한 바람의 힘이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며 다치지 않게끔 쿠션 역할을 해 주었다. 유더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키시아르부터 살폈다.

    감은 눈, 아직 따뜻한 뺨, 단단한 몸. 어디를 매만져도 크게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호흡이 규칙적으로 고른 걸 보면 정말로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 단순히 갑자기 잠이 든 게 맞는 듯했다.

    ‘…아무리 그간 못 잤다지만 갑자기 잠이 들다니.’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확실히 상태가 보통이 아니기는 한 모양이었다. 유더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면 그를 옮길 수는 있겠지만,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오는 게 문제였다. 벌써 깨어 새벽 훈련을 위해 훈련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단원이 없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쓰러진 단장을 유더의 방에서 옮기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일단 내 침대에 옮겨두고 아침에 나단 주커만에게 보고해야겠군.’

    손을 한 번 휘둘러 바람을 불러낸 뒤 키시아르의 몸을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실내용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준 뒤 누운 모습을 보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다니…….’

    정말 새삼스럽지만 낯설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이전 생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일뿐더러, 이번 생에서도 그가 이 정도로 무방비한 상태가 된 걸 목격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다리가 너무 길어서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어떻게 한다.’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긴 다리를 굽혀 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낯선 고민에 어색해하며 손을 슬쩍 다리 위에 올리자 범죄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슬그머니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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