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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24화 (224/805)

224화

희미한 등잔 불빛을 먹어치우려 달려드는 어둠만큼이나 춥고 메마른 속삭임이었다. 유더는 그 목소리 안에서 처음 느끼는 낯선 감정들을 읽었다. 전부 다 키시아르가 내보이리라고는 상상하지조차 못했던 것들이었다. 목 안쪽이 문득 저릿해지며 거친 파도에 올라탄 듯 울렁거렸다.

이건 대체 뭘까.

입을 맞추었던 순간의 강렬한 충동도 아니며 옮겨붙은 불처럼 타오르던 이끌림과도 다른 이것은.

밀어붙이는 강요도, 명령도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의 빗장이 쉽게 흔들거렸다. 솔직하게 입을 열어 그가 방 안에 있는지 확인하러 가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후가 걱정되기도 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갈림길에 던져진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요즘 키시아르의 앞에 설 때는 종종 이 같은 초조함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이토록 망설임을 느꼈던 일이 전에도 있었던가. 유더는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앞둔 미지의 탐색자와도 같은 기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잔 위에 닿아 있던 키시아르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꿈과 달리 장갑으로 감싸지 않은 저 커다란 손이야말로 예전과 지금이 다르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증거였다.

중지 안쪽에 남은 펜대 자국이 개중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이곳에 오기 거의 직전까지도 일을 했기 때문이겠지. 유더의 머릿속에 침실 안에서 일을 하는 키시아르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전에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침실에 누워 있던 모습을 보았던 탓인지 어렵지 않게 그가 누워서 일하는 모습도 대충 짐작이 갔다. 오늘도 계속 그렇게 있었을까. 문밖의 기척에 신경을 기울이면서 조용히, 그리고 홀로.

‘뭘 봐도 생각의 끝이 다 똑같다니.’

기가 막혀 시선을 돌리려던 순간, 문득 키시아르의 소매 안쪽에서 얼핏 붉은 무언가가 보였다. 착각이라 느낄 만한 짧은 틈이었지만 상처와 죽음에 익숙한 유더의 눈은 본능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상처 자국?’

그는 방금 전까지 머리를 메우던 복잡한 생각들이 일시에 새하얗게 사라짐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의문보다 행동이 앞서 튀어 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키시아르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위로 걷어 올린 뒤였다.

“단장님, 이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소매 안쪽에서 드러난 붉고 가느다란 자국은 분명 상처를 치유한 흔적이었다. 아주 깊은 상처의 경우, 신성력으로 치유해도 얼마간은 붉은 자국이 남고는 하는데 키시아르의 자국은 정확히 그와 일치했다. 이전 생에서 지겹도록 본 자국이라 싫어도 알 수 있었다. 강렬한 충격과 분노 때문인지 닿은 손바닥이 저릿했다.

“이게 뭡니까. 누가 이런.”

“신경 쓸 필요 없어.”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유더의 손을 피해 팔을 당겼다. 상처 자국이 다시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그보다, 결국 답은 안 해줄 건가?”

“지금 답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그럼.”

태연한 대답에 기가 막혔으나 유더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일단 누가 그랬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깊은 상처가 남았는데 주커만 경은 어디서 뭘 한 겁니까. 치유는 누가…….”

키시아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겠어.”

“예?”

“스스로 낸 거야. 치유도 내가 했고. 그러니 진정하게.”

키시아르가 직접 내고 치유한 상처라고? 진짜인가?

어째서?

유더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왜…….”

“인간의 몸에서 기운을 일시적으로 많이 빼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하지만 물론 조금 과격해 보이기는 하지.”

제 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냉정한 답변이었다. 유더는 눈을 몇 번 깜박인 뒤에야 겨우 그의 말이 주기와 관련된 사항임을 이해했다. 일시에 목 안쪽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빼내는 중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자연스러운 방법입니까?”

“…….”

“아니지요?”

키시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니겠지. 자해의 어디를 보아도 자연스러운 방법일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본래부터 이런 방식으로 주기를 보냈을까? 나단 주커만도 이 사실을 아는가? 이전 생에서도 그랬을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이전에 키시아르가 주기를 보내기 위해 썼던 방법이 무엇이든 지금 이건 아니리라는 본능에 가까운 확신이 들었다. 나단 주커만의 성정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주군의 몸에 상처를 내는 방법을 그리 아무렇지 않게 넘길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이리 갑자기 본래 진행 중이던 방식을 포기하고 팔을 찢는 쪽을 택했는가?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말을 잇지 못하는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올렸다.

“아무래도 많이 놀랐나 보군.”

놀랐다는 말로 퉁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잠이 전부 깰 정도였다.

“주커만 경도 알고 있습니까?”

“나단은 몰라. 알면 놀랄 테니 비밀로 해 주게.”

“이번 주기가 시작되신 이후 계속 이렇게 해 오셨던 겁니까?”

“아니야. 일시적인 방법이라 말하지 않았나.”

아니라고 해도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유더는 머리를 짚으며 이 일을 반드시 내일 날이 밝자마자 나단 주커만에게 상의하겠다고 결심했다.

복도에 서 있던 때 보았던 핏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이 단순히 밤이라서가 아니었다. 추위가 가실 것 같다는 둥 했던 말도 괜한 비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피가 빠져나가면 당연히 체온이 차가워지고 추위를 느꼈겠지.

기막힌 기분과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번갈아 어지럽게 찾아들었다.

‘나와 달리 제 쪽은 몸 소중한 줄 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보통 사람과 그릇 상태조차 다르다는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의문 속에서 키시아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노려보던 유더는 문득 다정하게, 그러나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쭉 그를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 속에서 답을 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나올 리 없을 답이었지만 어쩐지 감정이 뒤흔들린 지금 이 순간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설마.’

“…혹시 저 때문입니까?”

“…….”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미소짓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썹이 조금 더 누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부정해 주기를 바랐던 마음이 일시에 깨져나갔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동자 속에서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 얼굴을 희미하게 보았다.

‘나를 찾아오려고 팔을 찢었다고? 정말로?’

무언가 제 안에서 툭 떠밀려 비탈길을 따라 굴러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안에서 구르기 시작한 그 무언가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미안하네. 사실 이곳에 오는 동안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었어.”

유더가 지키는 침묵의 의미를 무어라 생각했는지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 싶었거든.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렬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아직 밖에 나가기에는 불안정한 상태라…….”

팔을 찢을 수밖에 없었다는 속삭임 뒤로 수많은 말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왜 오늘 내 침실 앞까지 왔는지.

혹 나를 생각했는지.

기다리는 줄 알고 있었는지.

“…….”

“실망했나? 너와 달리 이리도 자제력이 없어서.”

묘한 미소 위로 등불이 비쳤다. 누가 내쉬었는지 모를 한숨 때문에 마구 흔들리는 빛을 따라 키시아르의 미소도 마치 일그러진 초상처럼 흔들거렸다. 유더의 안에서 굴러떨어지던 어떤 것이 그 미소를 본 순간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 앞에 다다랐다.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가 비슷한 말을 했던 날의 꿈을 떠올리며 유더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도 그리 자제력이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화낼걸.”

“…제가 자제력이 그리 강했다면, 단장님이 어디 계시며 무엇을 하는지 다 알면서도 충동적으로 그 앞까지 가지는 않았겠지요.”

얼굴 위로 와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힘겨운 기분이었으나 유더는 어떻게든 마지막 말을 끝내려 노력했다.

“정말로 충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꼭 확인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팔을 찢고 유더의 방 앞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했던 그처럼.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하였던 그와 자신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절로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상대라 생각했는데 이리 보면 그들은 꽤 닮았는지도 몰랐다.

‘키시아르에게 모든 걸 배워 단장이 되었으니 어찌 생각하면 행동 양식이 닮게 된 것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지…….’

“무엇을?”

무엇을 그리 확인하고 싶었느냐고 키시아르가 물었다.

유더는 한숨을 흘리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장님이 그곳에 정말로 계신지가 알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뿐이었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진실이었다.

내뱉고 나니 너무나 간결하여 감춘 의미도 없는 말처럼 느껴져 허탈했다. 그러나 들은 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서서히 그림자가 걷히고 불빛보다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똑같았군.”

그가 속삭였다.

“우리 둘 다 똑같았던 거야. 그렇지?”

“……예.”

작은 대답이라도 제대로 들었는지 더욱 환한 웃음이 방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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