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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23화 (223/805)

223화

‘이제 와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한 것만으로도 갑자기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유더는 눈가를 쓸어 올리며 심호흡을 몇 번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도 의미가 없어. 전부 지나간 일이야…….’

전부 지나간 일.

맞는 말임에도 가슴 속 어딘가가 깊숙이 찔리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이래 전의 삶을 단 한 번도 아쉬워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건, 이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느끼는 기분을 도저히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몇 번이나 되뇌며 잡념을 지우려 노력하면서 침대에 도로 앉았으나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졸음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곧 있을 서부 토벌 임무도, 붉은 돌에 대한 생각도 아닌 키시아르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죽는 날까지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비밀스러운 사내.

제 손으로 처음 목숨을 거두었던 인간.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억눌렀음에도 결국 마지막 그 순간 떠올렸던 얼굴.

‘…차라리 이논에게 한번 물어나 볼까.’

지금까지는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그저 불규칙하게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꿈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이번은 그렇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논은 별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더가 놓친 어떤 점을 짚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줄 아느냐, 가지가지 한다며 성질을 부릴 이논의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상대가 그뿐이었으니까.

‘밤이 깊긴 했지만 이논은 잠이 거의 없는 편이니 아직 일어나 있을지도 몰라.’

일단 의료부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숙소 방으로 찾아가 불이 켜져 있는지 살피고, 아니면 도로 돌아오기로 마음먹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야명석이 반짝이는 어둑한 복도로 발을 내디딘 유더는, 몇 발자국 채 걷지도 못했음에도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눈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전신을 감싼 감각이 동시에 무언가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오감을 넘어 머리 안쪽을 자극하는 누군가의 존재감.

“……단장님?”

희미하게 달싹인 부름에 응답하듯 복도에 기대어 서 있던 이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둠에 묻혀 검게 보이던 붉은 눈동자 위로 희미하게 웃음이 깃들었다.

“밤 산책이라도 가나?”

“여긴 왜… 오신 겁니까.”

“…….”

당혹을 감추며 물었지만 키시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 질문 쪽이 먼저라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을 마주하자 간신히 억눌렀던 꿈속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비집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애써 그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잠깐 의료부에 내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왜?”

“잠이 오지 않아 이논이 아직 깨어 있다면 이야기를 좀 할까 싶어서…….”

좀 궁색하게 들리지만 아무튼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가 깨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말인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냥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선택보다 더 좋은 쪽이 있지 않나?”

바로 눈앞에. 중얼거리는 흰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유더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어려워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왜 오신 겁니까? 설마 절 보러 오신 건 아닐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장담하지?”

“……그럼 정말로 절 만나러 오셨단 말입니까?”

이 밤중에, 문조차 두드리지 않고 복도에 서 있었으면서?

복잡한 의구심으로 가득한 유더의 시선을 마주한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에 반쯤 취한 듯 평소보다 더욱 느른하고 몽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단의 보고를 듣고 나서 혼자 쉬고 있었던 듯한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여기 있었거든.”

“그건…….”

몽유병인가? 아니면 주기로 인한 건강 이상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의식하지 못한 사이 몸이 움직였다는 건 좋은 증상이 아니었다.

“루산 사제님을 불러올까요.”

“괜찮아.”

가볍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떼어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말을 나누지 않겠나.”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말의 끝부분은 너무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흐름이 그를 두르고 움직이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키시아르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검고 깊은 심해 속을 유영하는 듯 무겁고 부드러운 느낌이 피부를 압박했다. 고통스러운 감각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숨통이 조금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 유더는 저도 모르게 목 아래쪽 옷자락에 손가락을 넣어 조금 틈새를 벌렸다.

그러자마자 키시아르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그곳으로 향했다.

“혹 불편한가?”

“……아뇨.”

유더는 닫혀 있는 제 방문과 키시아르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논을 만나는 건 글렀군.’

며칠째 제대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가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마주치기를 소망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과거의 꿈까지 머리를 어지럽힌 상황에서 당사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무슨 대화를 하란 말인가.

제대로 된 보좌라면 몸이 좋지 않은 시기이니 어서 위로 돌아가라 말하는 쪽이 옳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유더는 그에게 곧바로 돌아가라 말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스스로에게 깊은 유감을 느꼈다.

‘발정기가 겹칠지 모른다고 말했던 것치고 향은 아직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저 상태에서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 잠깐 안으로 들이는 쪽이 낫겠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유더는 닫았던 방문을 다시 열었다.

이게 과연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까. 알 수 없었다.

“잠깐 들어와 차라도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먼저 찾아와 복도에 서 있었으면서 설마 정말 초대해 줄 줄은 몰랐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잠시 후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열린 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발을 옮겼다.

“좋아.”

숙소는 1인이 쓰기 적당한 크기라 넓지는 않아도 답답하다 여긴 적은 없었는데, 안에 키시아르가 들어오니 기이하게도 내부가 꽉 찬 듯 느껴졌다. 처음 들어온 공간을 탐색하듯 주변을 낯설게 둘러보는 사내를 두고 유더는 탁자 위의 물컵을 치운 뒤 등잔에 불을 붙였다.

“여기 앉으십시오.”

찻잔 두 개에 칸나가 언젠가 강제로 안기고 간 찻잎을 대충 뿌린 뒤 손가락을 움직이자 공기 중에서 형성된 물방울 덩어리가 두 줄기로 나뉘어 각자의 잔을 채웠다. 이어 한번 더 손을 흔들자마자 순식간에 적당한 온도로 덥혀져 수증기를 내뿜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유더는 가볍게 잔 하나를 키시아르 쪽으로 밀었다.

“향이 우러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드시면 됩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차를 타는군. 나단이 보면 허탈해하겠어.”

“능력이 있으면 써야죠.”

단호한 대꾸에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능력으로 만들어낸 차는 처음이라 맛이 기대되는군.”

우아하게 자리에 앉은 사내가 손을 뻗어 잔을 집어 들었다. 그다지 고급스러운 잔도 아니었는데 그가 쥐자마자 엄청나게 비싸고 귀한 물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체 왜일까.

유더는 그가 향을 음미하듯 눈을 내리깔고 있는 틈을 타 입을 열었다.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평소와 같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기분은 훨씬 좋군.”

“여기에 어쩌다 오신 건지는 정말 기억이 안 나시고요.”

“그래.”

“짐작 가시는 부분도 전혀 없습니까?”

“짐작 가는 부분이라…….”

중얼거리며 한 모금을 머금어 삼킨 키시아르가 일렁이는 등잔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아. 그래. 기억났어.”

드디어 무언가 기억이 났는가 싶어 고개를 들자 키시아르가 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내 방 앞까지 왔었지?”

동요하지 않으려 했으나 순간 유더는 저도 모르게 잔을 놓칠 뻔했다. 출렁대는 잔이 넘치지 않도록 곧바로 다시 힘을 주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접고 웃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안에서 느껴지더군.”

유더는 키시아르가 때때로 가만히 앉아서도 멀리 있는 이들의 움직임을 읽곤 한다던 나단의 말을 떠올렸다. 미약한 낭패감이 느껴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 하필 그때 왜 충동이 치밀어올라서…….’

“왜 왔다가 그냥 돌아갔지?”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믿었겠지만 말이야.”

낮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턱을 괴고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둔 탓에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유더 아일이라서 믿을 수가 없는데.”

“믿을 수 없다 하셔도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무어라 답하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말을 바꾸지. 내가 믿고 싶지 않은 쪽이라고.”

강경한 주장에도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선뜻 말을 바꾼 키시아르가 유더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사실 안에 들어와 줄 줄 알고 몹시 기다렸거든. 문 두드리는 소리를 그렇게 기대해본 건 처음이었어. 맹세해도 좋아.”

“…….”

피부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더욱 거세진 듯 느껴지는 건 키시아르가 내뿜는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기분 탓인가.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리 돌아서서 가버리더니, 나단이 와서는 앞으로 보고와 명령은 한동안 서신으로 처리해 달라 전하지 않겠나?”

“그건…….”

“발정기를 염려한 탓이지. 알아.”

말허리를 자르며 말을 이은 키시아르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때로는 그래서 더 씁쓸한 것도 있는 법이더군.”

“그래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음… 그건 정말로 의도했던 바는 아니야.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잠시 눈을 감았던 게 마지막이니 말해 봤을 뿐이네.”

잔 위를 매만지며 맴돌던 손가락 끝이 멈추었다. 잘게 출렁이는 물 위로 붉은 시선이 어렸다.

“혹시라도 나를 염려해 들어오려 했었던 것이라 말해 준다면 이 추위도 좀 가실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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