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어쩔 수 없지. 제자 놈이 돌아오면 이번에 새로 발견한 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세. 아주 흥미로운 걸 발견했거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스의 제자 알릭이 품에 무언가를 가득 안고 나타났다.
“엇, 유더. 언제 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그건 일단 내려놓고 이쪽으로 오거라, 알릭.”
알릭이 스승의 명을 듣고 가까이 다가오자 타이스 율만은 제 앞에 놓인 매개체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제자에게 건네주었다.
“자, 유더. 잘 보게나. 얼마 전 알릭이 매개체를 쥔 채 각성한 능력을 연습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현상이라네.”
알릭이 스승의 말을 듣고 곧장 제가 할 일을 깨달은 듯 매개체를 꾹 쥐며 힘을 주었다. 유더는 그의 손등 위로 힘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힘이 안개처럼 위로 퍼지며 미세한 물방울이 공기 중에 맺히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쥐고 있던 매개체 안쪽에서 붉은빛이 번득이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안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을 만큼 작았던 물방울들이 갑자기 묘한 소리를 내며 불쑥불쑥 불어나더니 순식간에 주먹만큼 커다란 물방울로 뒤바뀐 것이다. 세 사람의 주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물방울 덩어리들로 가득 찼다.
“이건…….”
“으윽, 스승님. 벌써 너무 힘이 드는데요…….”
“그래, 이제 없애도 좋다.”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든 물방울이 일제히 사라지며 매개체 안에서 빛나던 붉은빛도 사그라졌다. 알릭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몇 초밖에 안 되는데도 정말 힘드네요. 그래도 제대로 봤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유더의 질문에 노마법사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흡수와 증폭이야!”
‘흡수와 증폭?’
좀 더 설명을 해 달라는 뜻으로 바라보자 알릭이 입을 열었다.
“마도구의 원리를 전에 설명해 드린 적이 있었던 듯한데 기억하세요?”
“아, 네.”
유더는 그간 그들과 만나며 배운 마도구의 원리를 떠올렸다.
‘사용자가 지닌 마력을 정해진 양만큼 빨아들인 뒤 정해진 마법을 내뱉도록 짜여져 있다고 했었던가.’
“이 매개체에는 아무런 법칙도 짜 넣지 않았으니 본래대로라면 아무것도 출력될 일이 없죠. 하지만 이것과 접촉한 채로 각성자의 힘이 발현되면 매개체가 곧장 그 힘을 빨아들여 똑같은 결과를 더 크게 증폭해서 출력해 준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러니까… 어쩌면 스승님께서 세우셨던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거죠.”
“가설이라면…….”
“붉은 돌의 힘이 사람의 몸을 변화시키고, 많이 노출될수록 더 강한 힘이 발현될지 모른다는 그 가설 말이에요.”
“그래서 저 힘을 반대로 몸 안에 흡수할 수 있는지 살피려 했는데, 아직까지는 증폭하여 출력만 될 뿐 이쪽에서 빨아들일 수는 없더군.”
타이스 율만이 아쉬운 표정으로 첨언했다.
“알릭이 꽤 힘들어 보이던데, 힘이 빨려들어가는 걸 조절할 수는 없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듯해요.”
알릭이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증폭되는 순간의 감각은 마치 매개체가 제 힘을 온몸에서 있는 대로 빨아가는 듯한 기분이거든요.”
“그래도 해볼수록 점점 버티는 시간이 길어진다네. 처음에는 1초도 버티지 못했는데 지금은 유더 자네도 볼 수 있을 만큼 버티고 있잖나. 이 점도 내 가설에 어느 정도 힘이 되고 있지.”
쌓인 매개체들을 사랑스레 바라보는 타이스 율만의 설명을 들으며 유더는 매개체를 하나 집어 들고 얼굴 가까이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그의 손에 매개체가 들어가자 일순 두 마법사가 움찔 몸을 굳히며 긴장했지만 힘을 쓰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 모습들을 못 본 체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걸 쥐고 힘을 쓰면 쓸수록 안에 든 붉은 돌의 힘도 줄어들까요.”
“아, 네. 그럴 겁니다. 측정하기가 어렵지만 이론상으로는…….”
알릭이 무어라 설명을 했지만 숫자와 마법 용어가 또다시 길게 이어졌기에 유더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저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군요.”
“여기서는 하지 말게. 또 무너지면 이번에야말로 단장님이 정말 우릴 쫓아내려 할 수도 있어.”
타이스 율만은 이전에 키시아르에게 한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젊은 공작을 내심 내려다보던 연장자의 시선을 완전히 거두었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키시아르의 허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포기를 모르는 마법사였기에 유더에게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새벽에 훈련장에서 한번쯤 해 보는 건 괜찮을 수도 있겠지.”
“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진짜 해볼 거면 그땐 나도 꼭 부르게.”
유더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으로 감싼 손 안쪽의 반점은 2성 발현을 거치고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이 끝난 이후 이전의 통증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거의 아프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힘을 쓰면 조금씩 번지기는 했지만 색도 훨씬 옅어져 루산에게 가서 신성력을 받으면 금세 나았다.
이논은 그것을 보며 손을 통해 독처럼 파고든 붉은 돌의 힘에 점차 몸이 익숙해지며 정상화되는 과정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추측과 오늘 본 마법사들의 실험이 어떤 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건 알 수 없었다.
‘손이 괜찮은 덕에 이번 서부 파견임무도 그리 걱정되지는 않지만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는 말아야겠지.’
유더는 서부에 가기 전에 이 증폭 효과를 한 번은 꼭 시험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그의 품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매개체도 하나 있었다. 키시아르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하사한 그것을 드디어 제대로 살펴볼 날이 온 듯했다.
‘쓸모가 있다면 몇 개 정도 서부에 갈 때 가져가는 것도 생각해 보고.’
그렇지 않아도 본래 만들어진 매개체 양에서 몹시 많은 수량을 키시아르가 거두어 갔다며 안타까워하던 타이스 율만이 들었다가는 기겁했을 생각이나, 유더는 아무렇지 않게 미래를 가늠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게요? 제가 새로 생각해낸 물의 힘 응용법을 봐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알릭이 겨우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며 아쉬워했다.
“곧 떠날 곳이 있어 준비를 해야 해서요.”
“아. 무슨 몬스터 토벌 임무 때문에 곧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했었던가? 단장님이 보내준 서신을 읽고도 잊어버렸구만! 그래, 어디로 갈 예정이지?”
“서부 쪽입니다.”
“서부. 으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모르고?”
“네. 여러 곳을 다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이스가 잠시 후 손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마병단은 이게 첫 토벌 임무인가?”
“예.”
“긴장되겠군그래. 나도 진주탑에 들어가 처음으로 몬스터를 마주쳤을 땐 다리가 벌벌 떨렸어. 속성마법을 못 쓰니 여간 무서워야지. 그래도 내가 만든 마도구들이 큰 힘을 발휘해 준 덕에 나를 무시하던 붉은이리 탑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뒤이어 한참 동안 제 젊은 시절 자랑을 늘어놓은 타이스가 은근한 얼굴로 제안을 했다.
“유더 자네 혹시, 가는 길에 내가 편지를 좀 써줄까?”
무슨 편지인가 했더니 타이스가 내준 물건은 일종의 소개장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이래 봬도 이 늙은이가 탑의 원로를 맡았다보니 아는 마법사들이 꽤 많아. 서부 마법사 연합 수장직을 맡고 있는 미칼린이란 놈에게 이걸 보여주면 그쪽 녀석들이 자네들을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 거라네. 내 친구거든.”
유더는 이전 생에서 마병단에게 한없이 적대적이었던 기사,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그들과의 갈등도 서부에서의 임무를 어렵게 만든 요소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들과의 신경전을 각오해야 할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편지를 받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첫 임무를 맡은 마병단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드물게 긴 감사의 말을 건네자 타이스가 한없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무얼. 다 돕고 사는 게지. 단장님께 내가 이리 협조했다고 꼭 말해 주게나. 꼭!”
그는 미칼린이란 마법사가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타인 가의 본영지, ‘타이누’에 있을 것이라 말했다. 유더는 편지를 받아들고 흔쾌한 마음으로 연구실을 떠났다.
***
유더는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눈앞이 검었다. 입 안이 메말라 물이 마시고 싶었지만 여기서 누군가 물을 가져다주는 사치를 바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침상이라 하기도 무엇한 짚단 위를 더듬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다가온 손이 어깨를 잡아 도로 뉘였다.
‘누워 있어.’
무겁고 낮은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키시아르 라 오르. 어둠 속에서도 홀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듯한 저 금발과 붉은 눈동자를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얼굴이기도 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키시아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는 그것밖에 지을 만한 표정이 없어서 움직인 듯한 기묘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키시아르가 등 뒤에 있던 물컵을 들어 올렸다. 컵을 쥔 흰 장갑이 평소와 달리 깨끗하지 않고 얼룩덜룩했다. 분명 이전에는 없었던 물건인데 어디서 가져왔을까. 그래도 목마른 건 이쪽이었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유더는 어깨부터 손끝까지 전부 붕대로 감긴 팔로는 물컵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터운 붕대투성이 팔을 사이에 둔 채 시선이 마주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키시아르가 조용히 컵을 입술에 대어주었다.
‘…….’
괜찮을까.
될 대로 되라 싶어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미지근한 물이 잔뜩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목을 축여주었다. 순식간에 한 컵을 모두 삼키고도 입가로 흐른 몇 줄기 물방울이 아까워 고개를 숙이자 느릿한 질문이 들려왔다.
‘더?’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또다시 한 컵을 내밀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첫 번째보다는 받아먹기가 더 쉬웠다. 입을 벌리고 잠자코 고개를 든 채 목울대를 움직이는 동안 붉은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일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컵까지 비운 뒤에야 유더의 몸에서 힘이 풀리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몬스터에게 물어뜯겼다면서.’
‘…….’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