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빌어먹을 디아카. 이번 일도 그렇고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군.”
욕설을 내뱉은 타인 공작이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꺾어 이마를 짚었다.
“펠레타 공작을 이용해 서부를 해결하면 편할 것이라는 둥 지껄이더니 내가 물 먹는 모습을 보려고 한 짓이었던가. 그럴 수도 있지, 그 너구리라면.”
“…….”
테오라도 단장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공작의 투덜거림을 듣고는 있으나 크게 관심없어 보이는 태도가 역력했다.
“테오. 넌 이게 나만의 일이라 생각하는 게냐? 대체 내가 몇 달이나 남부에 투자 건으로 다녀오는 동안 넌 무얼 한 게야. 수도 상황이 이리 변했다는 사실을 너라도 빨리 알려주었어야… 아니, 됐다.”
공작은 사촌 동생에게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 화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그 또한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굳이 테오라도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 컸다. 타인을 향한 지독한 무관심과 각자 관심 있는 분야에만 집착적으로 파고드는 형질은 그들의 피에 새겨진 낙인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관심분야가 테오라도에게는 검, 그리고 공작에게는 도박적인 투자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한마디 해 봤자 펠레타 공작에게 대신 편지를 보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느냐는 소리나 하고 가겠지.’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고 입맛이 썼다. 설마 펠레타 공작이 황궁기사단 부지 내에 기생충처럼 비집고 들어와 지내는 주제에 기사단장의 부탁을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테오라도의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점까지 포함해 괘씸하고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타인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테오. 혹 네 힘으로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을 황궁기사단 부지에서 떠나게 만들 방법은 없느냐?”
“황궁기사단 부지는 제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소유지요. 기사단장의 권한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네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는 건?”
공작의 말에 테오라도 단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공작께서 국경 너머에 둔 투자 거점 개발 속도를 조금 포기하시면 될 문제가 아닙니까.”
“조금이라니.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줄 알아!”
“…지금 찾아가도 어차피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뵐 수는 없을 겁니다.”
“뭐? 그건 또 왜. 아페토보다 우리 타인이 더 우습다고 하던가? 그게 황제 폐하의 뜻이라도 된다던가?”
타인 공작이 역정을 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테오라도 단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궁중마법사 청사에 다녀오신 이래 며칠째 부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신다더군요. 확실하지는 않으나 몸이 좋지 않으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몸이 좋지 않은 시기?”
타인 공작이 반문하다가는 무언가 떠오른 듯 턱을 문질렀다.
“아. 반푼이 공작들이 겪는다는 그거 말인가. 각성자가 된 뒤로도 변함없나 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뻔하지. 각성자의 힘인지 뭔지를 좀 얻었다고 다 죽어가던 이가 갑자기 낫는다는 게 애초에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아페토의 그 얼간이들도 참 멍청해. 고작 그런 걸 보고 이득도 못 볼 투자에 뛰어들다니. 내가 아페토 공작이었다면 그런 바보짓을 하겠다고 지원해 달라는 헛소리 따위엔 절대로 승인해 주지 않았어.”
그러니 아페토 공작의 현재 꼴이 그리 된 것도 당연하다며 독설을 퍼부은 뒤 기분이 한결 나아진 타인 공작은 문득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흐음. 테오.”
“네.”
“생각해 보니 펠레타 공작의 몸 상태가 정말 안 좋다면 이번 몬스터 토벌 건으로 직접 오지는 않을 테고, 아랫놈들만 파견하겠지?”
“그렇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네가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에게 편지 한 통을 더 보내주어야겠다.”
타인 공작의 얼굴 위로 싸늘한 웃음이 스쳤다.
“그쪽의 답변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겠다고, 상황이 급해졌으니 한시라도 빨리 서부로 가 달라고 써.”
“그것으로 충분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나도 서부를 책임지는 가문의 주인으로서 그쪽에 있는 본 영지에 상황을 알리고 준비를 하라 일러야겠다.”
감히 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속내를 삼키며 타인 공작은 입술 끝을 비뚤게 치켜올렸다.
***
일전에 키시아르가 테오라도 황궁기사단장과 에제인 넬라른 2왕자에게 보낸 답신에 대한 답변들이 도착했다.
유더는 두 개의 편지를 서둘러 개봉해 먼저 내용을 훑었다.
‘타인 가 쪽에서는 협력 요청이 거부된 건 안타깝지만 서부를 위해 빨리 가 달라고 썼고, 에제인 왕자는 상황이 급해 먼저 길을 떠나겠다고 했군. 사라인 대삼림 근처에서 만나자고…….’
사라인 대삼림. 유더는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미간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역시 거길 통해서 가려는 건가.’
사라인 대삼림은 제국 서부 국경 근처를 전부 뒤덮을 만큼 거대한 숲이었다. 그 숲의 경계에 걸친 나라의 국경이 오르 제국을 포함해 무려 4개국이나 되었다. 벌목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을 만큼 온갖 식물이 뒤엉켜 자라나는 데다 지형도 험난하기 짝이 없어 길을 잃으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서부에서 발생하는 몬스터들의 처리가 다른 지역보다 유독 힘든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제인 왕자의 모국인 넬라른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또한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정말 엄청나게 사정이 급한가 보군.’
그는 편지 두 개를 모두 도로 접어 정돈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단장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어쩐지 키시아르의 상태가 조금도 나아지고 있는 듯 느껴지지 않는 건 착각인가. 대화를 나누었던 날은 드물게 멀쩡했었는데, 이후로는 또다시 이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힘을 발산시킨다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 너머를 향해 눈길을 옮겼다. 나단도 없이 홀로 일하고 있으려니 저곳에 키시아르가 있다는 사실마저 어쩐지 환상처럼 느껴졌다. 고요한 공간을 메우는 유일한 소리는 타닥대며 타오르는 마석 난로뿐이었다.
그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를 쥔 채 복도 안쪽을 향해 걸었다. 침입자를 대비하여 발소리를 죽이기 어려운 타일이 깔려 있었으나 이 공간에서 10년 가까이 살아본 적이 있는 이에게는 어렵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타일의 틈과 틈 사이의 미묘한 공간을 되짚어 천천히 나아간 끝에 마침내 단장 침실 앞에 당도하자 큰 문이 방문자를 가로막았다.
‘…이건 너무 충동적이고 경솔한 행동이야.’
머릿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자고 여기에 온 거지?’
그러게 말이다. 스스로도 제 충동적인 행동의 원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키시아르가 왜 이 안에 홀로 틀어박혀 다른 이들을 물리고 있는지 안다. 그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제 몸 안의 거대한 기운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가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분명 그 판단은 옳다.
알고 있는데도.
“…….”
노크를 할 듯 올렸던 손이 문 앞에서 멈추었다. 유더는 눈앞의 문을 두드리고 싶은 기이한 충동과 이성 사이에서 짧은 순간 갈등했다. 그러나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가 긴장을 깨트렸다.
유더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올 때와 달리 빠져나가는 움직임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도로 마석 난로가 있는 집무실 쪽으로 빠져나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다시 한 번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아, 유더. 역시 거기 있었구나. 나야, 칸나. 널 찾았는데 지금 이 시간에는 단장실에 있을 거라고 해서 왔어.”
문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몰라 단복 겉옷 자락을 한 번 잡아당겨 정돈한 뒤 문을 열려 하는데, 문득 어두운 청색 양문 위에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반사되며 묘한 흔적이 드러났다.
무언가 뭉툭한 것으로 내리누른 듯 움푹 패인 다섯 개의 자국.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분명하며 묘하게도 제 눈높이보다 조금 더 위쪽에 있는 그 자국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 유더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불현듯 깨달았다.
‘……손가락?’
그가 이 문을 열고 나가지 못했던 날, 키시아르가 손으로 짚었던 위치가 대충 저쯤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라 해도 그 위에 보호를 위한 방비책을 수십 개 정도 발라두어 강철보다도 단단할 텐데 이리 손쉽게 패여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유더?”
“아. 미안. 잠깐 정돈하느라. 지금 나갈게.”
유더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칸나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오늘은 단장님이 나와 계셔? 그러면 여기서 단장님께 바로 말하고 전해드려도 될 것 같은데…….”
“…아니. 안 계셔. 그냥 내게 말해 줘.”
다행히 칸나는 그 이상 묻지 않고 곧장 먼저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바쁠 텐데 미안해. 다른 게 아니라 가일과 두일 때문에 말야.”
“그들이 왜?”
혹 그들이 마병단 내부를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게 되어 무슨 사고라도 쳤는가 싶었으나 칸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가일과 두일이 본래 서부에서 살다가 나그란의 별에 흘러들어 갔으니 그들의 본부 중 하나쯤은 그쪽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 정보를 읽으려 노력했거든. 오늘은 설거지를 돕고 있길래 같이 도우면서 능력을 좀 써 봤는데, 경계가 풀려서인지 제대로 된 위치들을 읽은 것 같아.”
“어디인데?”
“하나는 사라인 대삼림 안쪽, 다른 하나는 남부 사막 근처, 그리고 마지막 본거지는…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붉은 돌이 있던 그 산 근처 같아.”
“아이리크 산맥 쪽?”
“으응.”
고개를 끄덕인 칸나가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혹시 그때 단장님을 공격하러 왔던 암살자들이 그쪽에서 온 이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곧 서부로 가야 할 텐데 그러면 또 마주칠 수도 있잖아. 그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되어서.”
‘과연.’
각성자를 모두 제 형제라 부르며 이상한 신념을 강요하는 나한 같은 놈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무리에 끼었을 것 같지는 않으나, 나그란의 별이라는 집단이 분열되어 있다는 그들의 추측이 맞다면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붉은 돌 회수와 관련된 극비 정보를 알 수 있던 이들은 제국 내에서도 몹시 한정되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게다가 서부의 사라인 대삼림이라면 정말로 곧 가야 할 목적지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알려줘서 고마워. 나도 단장님과 주커만 경에게 보고할게.”
대답한 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응.”
그제야 칸나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돌아섰다. 유더는 제 안에 있는 이번 서부 몬스터 토벌 임무 계획 사이에 나그란의 별이라는 변수를 하나 더 추가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