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하지만 유더는 직접 뵙고 왔으니까 뭔가 더 자세히 들은 게 있을까 했죠.”
유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 훈련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시간이라서인지 훈련장이 텅 비어 있었다.
키시아르가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마병단을 파견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지 3일 정도가 지났다. 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그는 서신 등을 이용해 간접적으로나마 최대한 업무를 소화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단장을 자주 대면하고 일을 하는 단원은 부단장 셋과 유더뿐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버의 말을 들으니 편지를 분류하는 업무를 본다는 이유로 저만이 단장실 내부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 다른 부단장들에게는 어찌 비쳤을까 싶었다.
에버도, 스티버도, 칸나도 키시아르에게 특별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유더를 배척하거나 싫어할 이들이 아니지만 혹시 모른다. 유더는 최대한 신중하게 대답했다.
“저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습니다. 단장님께서 계속 자리를 비우고 계시기도 하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장실에 원하는 만큼 있으라고 했으면서 정작 키시아르 본인이 3일 사이 얼굴을 내민 건 한 번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조차도 몹시 피로한 얼굴로 나타났다가는 편지만 건네받고 아쉬운 듯 웃으며 도로 들어갔다.
“그래요……. 아직도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그래도 서부 파견 건은 이미 결정 내리신 일이니 곧 더 자세히 말씀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버의 걱정스러운 말에 키시아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겨우 사라졌다. 유더는 혹 그녀가 지나치게 걱정할까 염려되어 화제를 비틀어 돌렸다.
“그런데 에버. 서부로 가면 몬스터를 상대해야 할 텐데 걱정되지는 않습니까.”
“음. 제가 처음 각성했던 계기가 뭐였는지 잊었어요, 유더?”
에버가 씩 웃으며 주먹을 장난스레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드러나도록 만든 특수한 장갑 위로 힘이 아지랑이처럼 아주 작게 일렁이다 사라졌다.
“각성하자마자 우리 마을을 헤집던 몬스터 수십 마리를 해치웠다구요.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오히려 말 안 들을 신과 단원들을 통솔할 일이 더 걱정이죠.”
“그곳에서 나타날 몬스터들은 지금까지 보고 배운 놈들과는 전혀 다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말입니까.”
“전혀요.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졌고, 이젠 등을 믿고 맡길 동료들도 있잖아요. 유더는 혹 걱정이 되나요?”
그간 걱정될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에 대한 자신도 있다. 하지만 에버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직접적인 질문을 들으니 또 기분이 새삼 묘하기도 했다.
단원들은 언젠가 나갈 임무를 위해 대륙 곳곳에 자주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이름과 모습, 그리고 약점을 배웠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쌓아 만든 정보였기에 정확도가 높았다. 그것만 외운다면 어떤 몬스터든 다 해치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절로 솟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더는 이전 생에 처음으로 파견되어 나갔던 서부 몬스터 진압 임무 때 처음으로 그 정보가 실전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정보로 남겨진 몬스터는 그저 일부일 뿐이었다. 본 이의 대다수가 죽어버린 탓에 제대로 기록되지조차 못하거나 혹은 처음 보는 몬스터가 그 몇 배는 더 많았다.
그리고 그 몬스터들에게 제 힘이 직접적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순간의 공황은 또 어떠했던가. 제 방식대로 놈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게 되기 전까지 느꼈던 강렬한 혼란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철저히 계획하고 머릿속에서 수없이 모의진행을 했다지만, 100퍼센트 확실한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계획을 지녔다 해도 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통제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유더는 그 모든 생각들을 모아 한마디로 답했다.
“기대와 걱정은 별개니까요.”
“그렇기는 하죠.”
고개를 선선히 끄덕인 에버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전 왠지 이번 임무도 잘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계속 그랬잖아요. 수확철 축제 때도 정말 많이 걱정했지만 잘 되었고, 아페토 가의 재판 때도 결국 속 시원하게 끝났죠. 또…….”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 보니 희미하게 미소가 흘렀다. 줄줄이 나오는 말을 듣다 보니 어쩐지 제가 돌아온 이래 지금까지 해결해 온 일들을 대신 정리해 칭찬해 주는 듯 느껴진 탓이었다.
‘그래. 그 말대로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이 잘 흘러왔지.’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 방금 좀 너무 칸나처럼 말했나요?”
요즘 그 아이 옆에 있다 보니 대책 없는 성격이 좀 옮은 것 같다며 멋쩍어하는 에버를 향해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긴장감이 좀 풀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저도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아페토 가의 재판들을 지켜본 이후로는 생각이 많이 바뀌어서 안 그러려고 하거든요.”
“그때 무슨 생각의 변화를 줄 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에버가 증언을 서기 위해 온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재판에 따라갔던 것 이외에는 관련한 업무를 특별히 더 맡지는 않았던 듯한데,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묻자 그런 건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단장님 뒤에서, 그리고 증언을 위해 나온 분들의 곁에서 쭉 몇 번의 재판을 지켜보다 보니 든 생각이 있었어요.”
“뭡니까.”
“이전에 제가 괜히 주눅 들고 겁먹었던 귀족들도 법정 안에선 정말 별것 아니었단 거?”
에버가 장난스럽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잘못을 어떻게든 줄여 보려고 추하게 굴고, 벌을 받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거나 우는 모습이 하나도 고귀해 보이지 않더라구요. 증언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려던 이들이 제 힘 한 번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망치던 모습도 우스웠고요.”
“…….”
“혹시 기억해요? 이전에 마병단원들끼리 모두 모여 술을 마시러 갔던 날, 우리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잖아요. 약자를 위해 주변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유더가 말해 주었었죠.”
처음엔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 싶었지만 잠시 후 아스라이 기억이 났다.
‘키올레 다 디아카를 훈련장에서 처음 만나 쓰러트렸던… 그즈음이었던가?’
평민 출신들이 황궁기사단 훈련장을 쓰는 게 싫어 무례하게 굴던 놈들 앞에서 갓 마병단에 들어온 이들은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버는 그때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했으나 미래에서 돌아온 유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 주었다. 몇 년이 지나면 황궁기사단 따위는 눈에도 차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을 쥐게 될 그들에게 부족한 건 스스로 가진 힘을 자각하는 과정과 경험뿐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네. 납니다.”
“그때는 사실 가능할까 싶었는데, 재판을 위해 온 분들을 도우면서 어느샌가 제가 정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단 걸 깨달았어요. 믿어져요?”
그건 정말 생경하고 멋진 기분이었다고 에버는 말했다.
“그래서 이젠 그 어떤 일도 별로 겁나지 않아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저 자신을 향한 신뢰가 있다는 건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모두 단장님과 유더, 그리고 마병단 동료들 덕이죠.”
“음. 저는…….”
“본인은 거기서 별것 안 했다고 말하려는 거죠?”
좋은 말끝에 나온 지나친 칭찬이 근지럽고 당혹스러워 중얼거리자 에버가 말을 가로챘다.
“그러지 말아요. 유더는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했어요. 지금도 제 능력 발전을 저보다 더 상세하게 살피면서 도와주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겠어요?”
“…그건 제 훈련을 하며 같이 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다들 절 굉장히 부러워한다구요. 혼자만 유더랑 1대1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엄청 분해하면서 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몰랐죠?”
유더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버가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심지어 단장님까지도 저한테 참 좋은 기회를 잡게 되어 부럽다는 농담을 서신에 덧붙여 주셨었어요. 믿어져요?”
“……단장님께서 말씀입니까?”
주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면서 부단장들에게 보내는 서신 사이에 그런 말을 끼워 넣었단 말인가? 이전의 다섯 배쯤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에버의 웃음이 더 커졌다.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과거와 현재가 머릿속에서 엉기다가는 이내 풀어져 백지가 되어 사라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을 지키다 올려다본 하늘 위로 해가 완전히 떠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제 아침 먹을 시간이네요. 들어가요.”
유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에버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빛을 받아 빛나는 마병단 건물 맨 위층.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친 그곳에 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문득 가슴 안쪽에서부터 차오른 열이 입술 끝으로 번져 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펠레타 공작이 우릴 돕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냈다고?”
타인 공작가 본저의 아름다운 응접실 내부에서 기가 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염을 멋스럽게 잘라 다듬은 타인 공작은 웬만해서는 그 수염을 함부로 매만지는 일이 없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 탓에 저도 모르게 턱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페토와의 재판에서 한 번 이겼다고 간이 부으신 겐가?”
“정확히는 타인 공작가와 협력할 생각은 없으나, 서부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현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 동감하니 마병단을 따로 파견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테오.”
타인 공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 앞에 앉은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에게로 향했다. 테오라도 단장은 공작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고 서부의 몬스터들을 알아서 처리하겠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인지. 펠레타 공작이 보낸 이들이 우리 영지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지 않은가.”
“그러시다면 애초에 생각하셨던 대로 기사단과 용병단들을 보내신 뒤 접근하지 않도록 선을 그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기가 문제야.”
타인 공작이 머리를 짓누르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 새로 개척한 해상 무역로를 통해 상단을 대거 내보냈단 말이지. 그걸 보호하기 위해 이미 동원 가능한 이들은 다 보내 두었는데 그 직후부터 이렇게 몬스터들이 다량 발생할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야.”
한숨을 내쉰 타인 공작이 고개를 돌려 테오라도 단장을 바라보았다.
“테오. 황궁기사단원 중 약간만 빌려줄 수 있겠나?”
“어렵습니다.”
“훈련을 핑계로 그쪽으로 내보내면 되지 않아.”
“아시지 않습니까. 몇 달 전 같은 이유로 디아카 쪽에서 키올레 다 디아카와 다른 기사 몇 명을 훈련 삼아 동부로 보냈다가 사고가 난 이후 감시의 눈길이 거셉니다.”
“빌어먹을 디아카. 이번 일도 그렇고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