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디아카와 황태자라. 현자도 이걸 알고 있었나?”
“…아니. 몰랐습니다. 뒤르망이라니… 내가 아는 뒤르망 남작이 맞다면 나도 들은 적이 있을 만큼 힘 있는 디아카 공작가 쪽 귀족인데 알았다면 여기에 미쳤다고 왔겠습니까?”
동료 사내가 그렇게 말했으나 나한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속내를 꿰뚫으려는 듯한 시선에 상대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나한. 설마 내게 능력을 쓰려는 건 아니겠죠. 애초에 이자들이 우리의 꼬리를 밟아 연락한 이유도 나한 당신이 아페토에 잠입하려고 수를 쓴 탓이 아닙니까. 현자께서는 정말로…….”
“이봐, 형제. 내가 한 번이라도 형제들에게 험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화상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의심은 좋지 않아. 여러모로 말이야.”
“나,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그래.”
나한이 금세 얼굴빛을 바꾸며 몸을 휙 돌렸다.
“내가 아페토에 잠입하기 위해 현자의 힘까지 빌려 방계에 선을 댄 건 맞지. 그 보답 겸 뒤처리를 위해 여기 왔는데 하필 이런 거물이 걸렸을 줄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뒤르망 남작과 그 부하의 얼굴을 훑었다.
“이자가 정신의 질병을 고치는 힘이 필요했던 건 확실해. 힘이 진짜인지 확인한 뒤 황태자에게 소개시켜 목적을 이루고, 그 뒤에 처리할 생각이었겠지.”
“처리라니…….”
동료 사내가 다시 한 번 몸서리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한, 당신 힘으로 이자들의 기억을 지울 순 없는 겁니까.”
“내 능력은 환상을 쓰는 거지 기억을 다루는 게 아니야. 차라리 환상을 계속 보여주어서 미치게 하는 쪽이 훨씬 쉽지. 아니면 이대로 무방비할 때 죽이거나.”
나한이 냉정하게 대답하자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런 이유로 고위 귀족을 죽여버리는 건 너무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러면… 일단 저자의 편두통은 없어진 척 해 주고 물러나서 도망칩시다. 현자님께는 내가 말하겠습니다.”
“고쳤다고 여기면 계속 우리를 찾으려 들 텐데? 얼마 전에도 펠레타 기사단에서 우릴 추적해오는 걸 피하는 일만으로도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았나? 거기서 디아카 가까지 늘리자고?”
“그렇기는 하지만 현자님께서도 일단 이 사실을 아셔야 대책을 내놓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그 일도 전부 나한 당신 탓에……!”
“쉿. 그리 큰 소리를 내면 환상에서 깨어날 수도 있어.”
동료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나한의 말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가 불안한 눈으로 환상에 취해 있는 뒤르망 남작을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옆에서 큰 소리가 나든 말든 멍하니 허공을 보며 몸을 흔드는 중이었다.
사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낮추어 부르짖었다.
“아무튼 우리가 이리 나날이 위험해져 가는 이유의 태반은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가일과 두일은 아직 우리 곁에 있었을 테고, 펠레타 기사단의 추적도 이리 끈질기게 달라붙지는 않았겠지요.”
“가일과 두일이라. 그 형제들을 안 찾은 건 현자도 마찬가지잖아.”
“펠레타 공작이 누구인지 잊은 겁니까? 우리보다 훨씬 강한 마병단의 손아귀에 잡힌 이들을 어떻게 찾습니까? 전 그들이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아마도 이미…….”
동료 사내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제발 더 위험한 쪽으로 행동하지 말고 얌전히 현자님의 말을 좀 따라요! 대체 누가 당신을 그 죽음의 늪에서 건져 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가 말을 끝낸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영점 이하로 내려가는 듯한 냉기가 느껴졌다.
사내는 그나마 짓고 있던 웃음을 완전히 거두고 무표정해진 나한을 보고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는 두 손을 들고 곧장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그 이야기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너무 초조한 나머지 그만 실언했습니다.”
“나를 구한 건 호산라와 현자 본인이야. 형제라도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어.”
나한이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형제들을 구해오는 일에 대해 현자가 한 번이라도 싫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 사내가 무어라 덧붙이기 전, 입술 끝을 비죽 올린 나한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형제도, 나도 결국 누군가 구해준 목숨이란 건 같아. 되찾은 자신의 안정을 깨트리기 싫다는 이유로 위험에 처한 다른 형제들을 구하지 않겠다는 건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해 나를 도우러 왔던 가일과 두일 형제에게도 못할 말인 것 같은데.”
순간 등 뒤에 있던 호산라가 울적한 얼굴로 주먹을 꾹 쥐었다. 나한은 그가 가일과 두일에게 일을 도와 달라 부탁해 끌어들인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른 척하며 동료 사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
결국 사내는 분함과 복잡함이 뒤섞인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환상에 걸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느긋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니 이번에는 일단 형제의 말대로 하지. 그 전에… 황태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에 우리를 찾은 건지는 물어봐야겠지만.”
“그건 또 왜 하려는 겁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조용히 해. 이유 정도는 알아야 현자도 판단하지 않겠어.”
냉정하게 동료를 무시한 나한이 앞으로 나아가 손을 다시 한 번 살짝 휘두르자 뒤르망 남작이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혼탁한 눈빛으로 비틀거리던 그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여기에……. 음? 아. 미안하네. 황태자 전하의 용태가 괜찮으시냐고? 말도 마.”
자리에 앉은 귀족 사내가 담배를 피우듯 손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망할 놈의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모든 게 난리야. 그때 정신이 뭔가 잘못되셨는지 얼굴에 난 상처가 다 나았는데도 자꾸만 붉은 흉터가 보인다며 거울이란 거울은 전부 깨트리고 있다지 않겠어. 제기랄 아페토 놈들 같으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충분히 반성하시고 디아카 공작 전하께 숙이러 오셨을 텐데 이 꼴이 날 줄이야.”
말을 듣던 나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동료 사내는 황가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들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겁에 질리고 말았다.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만 해. 그분을 우리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려두었나. 여기서 무너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말을 끝낸 사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또다시 멍하니 눈이 풀렸다.
“…황태자의 정신이상이라. 과연.”
나한이 턱 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쯤 되어야 우리 같은 이들에게라도 연락해 보는 거군.”
“나, 나한 당신. 설마 저 이야기에 흥미라도 생긴 겁니까? 귀족이라면 죽어도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료 사내가 기겁하여 묻자 나한이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싫어. 흥미도 없고. 이 돼지 같은 작자들이 뭘 하고 놀던 나와는 상관없지. 가능하면 평생 엮이고 싶지 않아.”
나한의 대꾸에 동료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면 빨리 대충 치료해 주는 척하고 도망가잔 말입니다. 진짜든 아니든 이 이야기를 들은 게 들키는 즉시 우리 모두 죽을 겁니다!”
“알겠으니 표정 관리나 잘하도록 해, 형제여. 곧 환상을 끝낼 테니까.”
잠시 후 나한은 귀족 사내와 그의 부하에게 몇 가지 환상을 추가로 보여준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들은 자신이 잠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나리께서는 편두통을 느끼지 못하실 겁니다. 며칠이 지나 믿음이 생기셨다면 이전과 같은 곳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정말인가?”
반신반의하듯 물은 귀족 사내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미소를 지었다.
“좋아. 오늘은 일단 몸 성히 보내주도록 하지. 물러가라.”
그는 귀족답게도 오만하였기에 제가 살려준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겼다. 축객령을 받은 세 사람은 재빨리 물러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이 그 집에서 한참을 멀어진 뒤에야 겨우 호산라가 식은땀 맺힌 이마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혹 환상이 잘 안 들으면 어쩌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면 잘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래도 상관없지만 저런 작자들은 정신력이 바닥이라 내가 아무 노력도 안 해도 될 정도로 환상에 금세 빠져들더군. 걱정하지 않아도 문제없을 거다, 호산라.”
나한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 말을 곁에서 들은 동료 사내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어 물었다.
“당신 능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당연히 있지.”
“봤어요?”
“봤어. 몇 번이나.”
나한의 대꾸에 동료 사내가 눈을 껌벅였다. 설마 정말 그런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듯한 태도였다.
“아…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우리 나그란의 별에 꼭 와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토록 정신이 튼튼한 인재라면 현자께서도 기꺼워하실 테니까요.”
“싫다던데.”
“예?”
나한은 이후 답이 없었다. 때문에 동료 사내는 잘못 들었다고 여기고 금세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는 현자에게 돌아가 보고할 생각으로 꽉 차 무거운 마음으로 나한과 호산라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나한은 잠시 말없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다가 호산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호산라. 현자는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네?”
“황태자 말이야.”
“그… 글쎄요.”
호산라가 주변을 둘러보다가는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니까… 이런 위험한 일로 저희를 두 번 부르시진 않겠죠. 아마도요…….”
“좋은 분이라.”
나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래. 그러길 바라야겠군.”
“왜요. 걱정이 되시나요?”
“아니. 됐다. 그리고 방금 만난 그 돼지 같은 작자가 우리를 못 믿고 미행을 붙인 것 같으니 다음 골목에서 바로 시장 너머로 이동해.”
호산라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짐짓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골목 너머에서 빛이 한 번 흘러나왔다. 그들을 미행하던 뒤르망 남작의 부하가 느릿하게 뒤쫓아갔을 때 골목 안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
“유더.”
에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더는 새벽이 지며 떠오르는 햇살을 마주하고 눈을 찌푸렸다.
“네.”
“우리가 곧 서쪽으로 파견될지도 모른다는 말, 정말일까요.”
“단장님께 이미 듣지 않으셨습니까? 부단장들에게는 언급하신 줄 알았는데요.”
“서신으로만 짧게 내려받았더니 실감이 잘 안 나서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코끝을 찡그린 에버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