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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16화 (216/805)

216화

제국 수도 7벽의 가장 구석진 빈민가 골목 안쪽에서 빛이 타오르며 공간이 찢어졌다. 열린 공간 안에서 나타난 사제복 차림의 두 사내는 그들을 보고 놀라 달아나는 생쥐 몇 마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에 기억해 두라고 했던 그 위치인가?”

“네. 혹시 몰라 일단 이쪽으로 위치를 설정했습니다.”

“좋아. 마침 약속 장소에서도 가까운 위치인 듯하니 잘 되었군. 호산라. 바로 이동할 테니 모자와 장갑을 써라.”

얼굴 반쪽에 끔찍한 화상을 입은 사내, 나한은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얼굴로 목까지 전부 가리는 순례자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손에 긴 장갑까지 껴 피부를 완전히 가린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곁에서, 호산라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모자와 장갑을 뒤따라 착용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나한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고귀한 빛의 사제들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쩌다 오셨을까…? 내가 파는 약을 한 번 맛보실라우?”

“…….”

“형씨들. 누굴 찾고 있어? 도와줄까…?”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주변에서 경계와 탐욕 어린 시선들이 맴돌았다. 나한은 불길한 웃음과 함께 손을 내민 노인을 무시하고 지나갔으나 호산라는 어쩔 줄 모르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어느 노인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결국 다시 돌아온 나한이 호산라를 붙잡은 노인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자 끔찍한 괴물이라도 본 듯한 비명과 함께 불길한 시선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능력을 쓰신 건가요.”

“그래.”

“들키시면 안 되는데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나한은 호산라의 사과를 무시하고 그의 팔을 끌어당겨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아무 방해도 없이 큰길로 나갈 수 있었다. 평범하게 시장 어귀의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아무도 순례자 차림을 한 사제 두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파 사이로 자연스레 녹아들어 걸음을 옮긴 지 한참이 지났을 때 비로소 나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호산라.”

“네, 도련님.”

“그리 큰일은 없을 듯하지만 혹시 모르니 미리 말해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너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마. 그리고 만일의 경우 내가 수신호를 보내면 즉시 공간을 열어. 곧장 도망칠 수 있는 곳으로.”

“…알겠습니다.”

“곧 도착이니 긴장을 늦추지 마. 현자가 보낸 형제 한 명이 그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을 거다.”

냉혹한 목소리가 순례자의 모자 안쪽에서 음울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6벽에 가까운 어느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 오래되고 허름한 여관들 사이에 위치한 낡은 집 앞에 도착했다. 녹이 잔뜩 슨 대문 앞에 붙은 작은 명패를 확인한 나한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뒤쪽 골목 안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으셨군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그만.”

“나한, 당신은 대체 현자께서 부탁하신 일을 매번 그리 아무렇지 않게…….”

찌푸린 채 무어라 말하려던 이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이 일은 꼭 보고할 겁니다.”

“마음대로 하게, 형제.”

나한은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남자가 녹슨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안쪽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웬 사제님들이 오셨소? 여긴 신전이 아닌데.”

“여기에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고 싶은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만하던 말투를 일시에 바꾼 나한의 말에 안에서 나온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세 사람을 위아래로 훑은 뒤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이름을 대시오.”

“나그란의 별.”

“…별 희한한 차림들을 하고 오셨군.”

그제야 사내가 코를 실룩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들어오시오. 그분께서는 이미 도착해 계셨소. 단, 들어가기 전 위험한 걸 소지하고 있는지 검사를 조금 해야겠지만 그건 이해해 주시오.”

나한과 호산라,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내는 사내가 그들의 안주머니를 뒤질 수 있도록 얌전히 대기했다. 그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나한을 넘어 호산라의 품 안에서 경전과 성표를 꺼낸 뒤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짜 사제인가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됐소. 따라오시오.”

집 안은 아주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사내의 안내를 따라 올라간 2층의 어느 방 안은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방의 절반을 가린 커튼 앞에 피워 둔 향초가 몽롱한 향을 뿌렸다. 나한과 호산라는 초가 내뿜는 미약한 불빛을 통해 커튼 뒤쪽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풍채가 몹시 좋은 중년 사내라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주인님,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왔군.”

커튼 안에 앉아 있던 이의 그림자가 슬며시 움직여 손을 흔들었다.

“거기 앉도록 해라.”

전형적인 제국 귀족다운 말투와 몸짓이 있다면 그와 같은 태도이리라. 오만하면서도 격식 있는 말투로 명령한 사내는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한 태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감과 공포를 참지 못하고 무어라 먼저 입을 열 만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들이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자, 마침내 커튼 뒤의 사내가 흡족한 듯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흠. 과연 보통 이들은 아닌 듯하군.”

“…….”

“이리 와 주어서 고맙군. 내가 어디서 소개를 듣고 당신들을 불렀는지 같은 재미 없는 부분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

나한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낮게 웃었다.

“지금은 비록 안타까운 일로 유배를 떠나기는 했으나 아페토의 방계였던 나의 지인이 당신들의 힘을 아주 높이 평가했었어.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어찌 사람의 힘으로 정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지. 하지만 오늘 당신들을 보니 이상하게도 믿음이 가는군.”

“…….”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그때 그에게 보여주었다는 기적 같은 일을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는가?”

기적과 같은 일. 몹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한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합니다. 약간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입니다.”

“조건이라. 직접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해야 한다는 그것 말이지.”

“예.”

“그렇다면 얼굴만 본다면 지금 당장도 가능하다는 뜻이고?”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담하고 간결하군.”

그렇게 평가한 뒤 중년의 귀족 사내는 손에 쥔 지팡이 끝을 툭툭 두드렸다. 잠시 후 결단을 내렸는지 그가 방구석에 서 있던 안내자에게 손짓을 했다.

“좋아. 이제 커튼을 걷어도 좋다.”

“예, 주인님.”

안내자가 공손한 얼굴로 다가와 커튼을 걷었다. 드디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나한과 호산라를 향해 거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궁금하지도 않고?”

“귀하신 분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저희가 할 일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똑똑하군. 그러면 이제 너희들의 얼굴도 좀 볼까.”

호산라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나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여 괜찮다는 수신호를 표시하는 것을 보고 이내 순례자의 모자를 벗었다.

“…….”

평범하게 생긴 다른 한 사람과 달리 나한과 호산라는 분명 눈에 띄는 생김새임에도 그들의 얼굴을 본 귀족 사내는 눈만 한 번 찡그렸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한이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능력을 사용해 좁은 공간 내를 순식간에 장악하고 보이는 부분을 왜곡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내게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독한 편두통이 있는데, 그걸 고쳐낸다면 작은 시험을 통과한 셈 치고 너희를 진정 필요로 하고 계신 분께 소개의 길을 열어드리지. 하지만 고치지 못한다면… 오늘 몸 성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건 시험이 아닌 협박이었다. 그러나 나한은 당혹하지 않고 오히려 슬쩍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 가까이로 다가갔다. 보석을 박은 화려한 지팡이를 짚은 중년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나리께서 손에 끼고 계신 그 반지들을 보니 과연 그간 얼마나 불편하셨을지 짐작이 가는군요.”

귀족 사내는 손에 알이 굵은 보석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눌러 자극할 수 있도록 세공한 반지였다.

“그걸 알아보는군.”

“이제 잠시 제 눈을 봐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되는…….”

나한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오만했던 귀족 사내의 얼굴이 순간 멍하게 풀렸다.

“…….”

“이봐. 주인님께 허튼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혹여 나한이 허튼짓을 할까 걱정되었는지 안내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슥 고개를 돌린 나한과 아주 짧게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주인과 똑같이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기이한 환상이 그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기 시작한 탓이었다. 뽑아 들었던 단검이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으나 누구도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그들을 향해 중얼거린 나한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눈만 마주쳐도 저항하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같이 구역질 나는 짓만 해대는군.”

“나한. 그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현자께서는…….”

“안 죽일 테니 조용히 좀 하지그래. 집중이 잘 안 된다고.”

나한의 대꾸에 동료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호산라가 긴장하여 그들을 훑었으나 나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귀족 사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이내 아주 즐거운 환상을 본 듯 입이 헤벌어진 사내가 손을 비비며 실실 웃어댔다.

“흐흐, 공작 전하……. 그렇습니다. 이 뒤르망이 디아카 공작 전하를 위하여 찾아낸 방법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상태가 이제 나아지셨으니 더 이상 근심 걱정으로 잠을 설치시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무슨 별인지 뭔지 하는 천한 자들은 일을 끝내고 곧장 처리했으니 뒷일도 문제없습니다. 부디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뒤에도 저의 충직함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나한이 손을 거두자 귀족 사내는 다시 멍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나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호산라와 동료 사내 둘 모두가 예상보다 훨씬 큰 거물들의 이름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디아카와 황태자라. 현자도 이걸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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