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무례한 편지임을 확인하고도 그 사이에 맺힌 아주 작은 의문 하나만으로 바쁜 와중에도 지금까지 계속 서부 상황을 살폈단 말인가. 감탄을 넘어 등골이 쭈뼛해질 정도의 능력이었다. 유더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은 무슨. 나는 명만 내렸고, 일은 충직한 기사들이 해 주었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일 경이 정말인 줄 알지 않겠습니까. 전후과정을 분명히 해 주십시오.”
키시아르의 근처에 시립해 있던 나단 주커만이 갑자기 불쑥 입을 열어 끼어들었다. 웃고 있던 키시아르의 표정이 일순 슬쩍 변했다. 유더는 나단을 돌아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공작님께서 요청서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려 저희 펠레타 기사단을 파견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곳 영주의 검은 속내를 파악하신 후에도 곧장 귀환을 명하지 않고 오히려 몇 명을 더 보내신 이유는 단순히 시기에 맞지 않게 나타난 몬스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나단. 거기까지만 해두지 그래.”
키시아르가 나단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유더는 어쩐지 잘린 뒷말을 알 수 있을 듯했다.
“혹 거기 눌러앉아 무력시위라도 해 주라고 명하신 겁니까?”
“비슷합니다.”
“그렇게까지 직접적이지는 않았어.”
키시아르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몬스터는 흔히 신의 저주라 불리지 않나. 그것들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게 정말이라면 영주가 부덕한 탓이 틀림없어 보이니 주변에 머무르며 좀 살피라고 했을 뿐이지. 실제로도 몹시 부덕했더군.”
“덕분에 그곳의 영주는 곧 저희가 모은 증거로 익명의 고발을 당해 수도로 올라와 재판을 받게 될 예정입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예년에 비해 심상치 않다는 것은 그러던 중 알게 된 사실이니 부차적 수확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단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흡족하게 웃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사전답사를 한 셈 치자고.”
“바쁜 시기에 돼지 같은 놈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러 여러 명의 자리가 빈 탓에 저를 비롯한 나머지 기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유더는 그제야 저 충직한 기사가 드물게 주군의 말에 반기를 든 이유를 이해했다.
‘그런 거였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바쁜 축제 기간 내내 평소보다 줄어든 인원으로 일처리를 해야 했다면 누구라도 화가 났으리라.
“모처럼 나를 존경한다는 보좌 앞에서 능력을 뽐낼 기회였는데 너 때문에 다 망치는구나, 나단. 김이 빠졌어.”
“아일 경도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로 보좌가 나를 더 이상 존경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책임져야 할 거야.”
“…저는 단장님께서 타당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유더의 답에 나단과 키시아르가 동시에 유더를 돌아보았다.
“진심입니까, 아일 경?”
“예.”
“당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란 뜻입니까.”
“글쎄요. 저에게 그 거짓 요청서에 대한 처벌 권한이 있었다면, 아마 직접 가서 사는 곳 전체를 뒤엎어 밭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부덕한 증거를 찾아 재판에 넘기는 정도는 얼마나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대처인가.
나단 주커만이 순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눈을 조금 크게 떴던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더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듯한 기사의 시선이 얼굴을 훑었다.
“…아일 경이 그렇게 말하면 어쩐지 하나도 농담 같지가 않군요. 마치 이미 해 보신 분 같습니다.”
‘눈치가 빠르군.’
실제로 유더는 비슷한 일을 이전 생에서 여러 번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기에 그저 침묵을 지켰다.
“자. 보라고. 보좌도 내가 잘 했다지 않아.”
다행히도 키시아르가 뻔뻔한 얼굴로 끼어들어 분위기를 바꾸었다. 유더는 한발짝 물러나 키시아르와 나단이 다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시아르가 미래를 보고 온 자신보다도 대단한 예측력을 지닌 줄 알고 놀라 감탄했던 마음은 이제 가라앉았다. 그러나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방금 전 그가 농담처럼 내뱉었던 한 마디였다.
‘나를 존경한다는 보좌 앞에서 능력을 뽐낼 기회라…….’
묘하게 가슴 속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누구나 그런 기분을 느끼기야 하겠지만 설마 키시아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무례한 요청을 한 이를 벌하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강한 대응을 한 것도 사실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뜻을 도무지 다 알기 힘들 만큼 어렵던 사내가 내보인 진짜 감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생경한 일이었던가.
덕분에 타인 공작가와 에제인의 편지로 인한 심각한 기분도 훨씬 나아졌다. 유더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키시아르의 대화가 소강되기를 기다려 질문을 했다.
“단장님께서는 그래서 이 편지들에 쓰인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둘 모두와 대화는 해 보아야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겠지.”
키시아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타인 공작과 협력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마병단을 보내 서부 국경 주변을 정리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네. 그 김에 넬라른 2왕자 일을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테지.”
“…….”
완벽했다. 유더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답이었다.
혹 키시아르가 서부 지대에서 나타날 몬스터들을 그리 염려하지 않는다면 무어라 설득해야 할지 망설였던 일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서운 몬스터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걱정되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유더는 검은 장갑을 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몹시 기대가 됩니다.”
***
태양신을 모시는 사제의 옷을 걸치고 순례자의 모자로 얼굴을 깊이 가린 두 명의 사내가 레지엥 탑 앞에 섰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귀족 죄인들을 수감하기 위해 마법으로 보호되는 탑 앞에는 기사 여러 명이 엄숙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벨트레일 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기사들을 향해 다가간 사제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마지막 기도를 해 주시러 온 사제님들이십니까?”
“예.”
“대신전에서 나오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기사의 말에 보다 키가 작은 사제가 허둥지둥 품 속에서 성표와 경전을 꺼냈다. 손이 미약하게 떨렸으나 기사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이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여 안쪽을 향하여 턱짓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들어가십시오.”
탑의 문이 열렸다. 두 사제는 기사의 인도를 따라 탑의 가장 꼭대기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키가 큰 사제는 기사를 잘 따랐으나 보다 작은 사제는 몇 층 정도 오르자 급격히 속도가 느려졌다.
“죄송합니다. 일행을 업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십시오.”
기사는 키가 큰 사제가 사제치고는 몹시 기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많이 걷고 나서야 나타난 문은 마법 열쇠로 일곱 번이나 자물쇠를 푼 뒤에 겨우 열렸다.
낡기는 했지만 일반 귀족들의 방과 비슷하게 꾸며진 내부에는 죽음의 기운이 짙게 풍겼다. 창가 곁에 놓인 침대 위에서 곧 숨이 넘어갈 듯 껄떡이는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제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곳에 누워 있는 사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갇힌 유일한 죄인, 벨트레일 샨 아페토는 이전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깡마르고 쪼그라든 채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백탁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찔거리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는 모습이 마치 악마에라도 씌인 듯했다. 이가 거의 빠진 입술이 무어라 중얼댔으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사제들이 충격에 빠졌다 생각했는지 안내해 준 기사가 위로를 해 주었다.
“독 때문에 모습이 저리 변했을 뿐, 악마에 씌인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정신이 나갔을 뿐이지요.”
“…그렇군요.”
두 사제 중 키가 더 큰 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제님들께서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마지막 기도는 가족 이외에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전통이니 말입니다. 기도 도중 무슨 일이 있다면 기사님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문 밖에 있을 테니 소리를 치시면 바로 오겠습니다.”
뭐, 곧 숨이 넘어갈 분께서 기도를 들으실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귀찮아하는 눈빛이 벨트레일을 한 번 향하고는 이내 돌아섰다.
사제들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키가 작은 사내가 순례자의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뒤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그는 정통 남국인 특유의 짙은 붉은색 피부를 가진 남국인 청년이었다.
“…도련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이 사람은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곧 죽을 거예요.”
“호산라. 여기까지 와서 그 소리를 할 거면 돌아가.”
“하지만…….”
“진정한 형벌이란 죽고 나서도 끝나는 게 아님을 알 텐데.”
키가 큰 사내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저자를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지. 이제 그걸 마무리 지을 때다. 죽어간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저자는 결코 편안히 기도나 들으며 죽어서는 안 돼.”
“…그래도 밖에 있는 이들에게 저희가 누구인지 들키기라도 하면.”
“내 능력 덕분에 네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도 들키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호산라라 불린 청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의 시선이 사제복 사이에 가린 제 다리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업고 올라오시게 하는 폐를 끼쳐서.”
기가 죽은 호산라를 향해 키가 큰 사내가 혀를 찼다.
“그 소리도 이젠 지겨워. 못 보겠으면 돌아서 있어. 금방 끝날 테니까.”
키가 큰 사내는 호산라를 두고 침대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경건히 기도하는 사제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순례자의 모자를 벗었다.
“벨트레일 샨 아페토. 이쪽을 봐라.”
얼굴 반쪽이 끔찍한 흉터로 뒤덮인 얼굴이 드러난 순간 힘없이 허공을 맴돌던 벨트레일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오랜만에 정신이 좀 드나?”
“흐, 흐, 헉, 너, 너는……!”
“네 목숨을 거두러 온 죽음의 사자지.”
“사, 살려……. 거기, 누, 누구 없……!”
“형제들을 위해 너는 편안히 죽어서는 안 돼.”
싸늘한 답과 함께 남자가 손을 뻗어 벨트레일의 얼굴을 쥐었다. 벨트레일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죽음이 목전에 이른 그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아, 안……!”
잠시 후 남자의 손 안에서 흐린 빛이 흘러나왔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끔찍한 몸부림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피해 등을 돌린 호산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이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죽기 전까지의 몇 분을 수백 년처럼 느끼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수백 년간 영원히 홀로 지옥불에 타고 온몸이 갈리는 고통 속에 비명지르게 되겠지.”
그의 말대로 몇 분 뒤 벨트레일의 버르적대던 몸부림이 멈추었다. 사내가 쥐고 있던 머리에서 손을 떼자 몇 분 사이에 마치 몇백 년쯤 산 노인처럼 희게 센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우수수 빠졌다. 추하게 쭈그러든 얼굴은 고통을 형상화한 가면마냥 입을 벌리고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었나요.”
“그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멸하는 눈빛으로 벨트레일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조차도 이자에게는 너무 편한 최후였어.”
“…….”
“가자, 호산라. 현자가 부탁한 일은 마저 끝내야지.”
“그것만요? 가, 가일과 두일은…….”
“그래. 네가 그리 신경 쓰는 그 두 놈들도 찾고.”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린 사내가 고개를 돌려 우중충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오는 것 같은데.”
“예?”
호산라가 반문하기가 무섭게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내가 입술 끝을 비뚜름히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와야 할 진짜 사제들을 생각보다 빨리 찾았나 보군. 흔적 없이 나가기는 어렵겠어. 네 힘으로 나가야겠다.”
깜짝 놀란 호산라의 표정이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손을…….”
잠시 후, 탑 끝까지 달려올라온 기사들이 7개의 자물쇠를 열고 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들어왔다.
“꼼짝 마라, 이 사기꾼들! 어디서 온 놈들인지 당장 밝……! 어?”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긴 마법도, 마도구도 쓸 수 없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혼란에 빠진 기사들이 좁은 탑 내부를 뒤지는 동안, 침대 위의 시체는 쓰레기처럼 싸늘히 자리를 지키며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