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한눈에 보아도 두 편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방금 전까지 키시아르와의 대화로 인해 술렁대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유더는 침착한 손길로 테오라도 반 타인의 요청서를 먼저 개봉했다.
경애하는 펠레타 공작 전하께 보낸다는 제법 친밀한 서두로 시작한 글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내용은 예상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 …펠레타 공작 전하께오서는 혹 얼마 전부터 제국 서부 국경 너머에서 몬스터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예년보다 훨씬 이른 시기임에도 수백 단위의 몬스터 무리가 다수 관찰되었고 듀번을 비롯한 서쪽 주변국들에서는 벌써 몇 개의 인근 도시와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심상치 않은 정보가 들려올 정도입니다.
‘…이건.’
유더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읽어나갔다.
- 아직까지 제국에는 이렇다 할 피해가 오지 않았다지만 앞으로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하여 대대로 제국의 서쪽 땅을 지켜 온 저희 타인 가에서는 전보다 이르게 몬스터 토벌을 진행할 계획을 의논 중에 있습니다. 수확철 축제 내내 빛나는 활약을 보여준 마병단의 수장이신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이 이야기를 심각히 여겨주시어 도움을 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부디 제게 답신을 보내주십시오.
서부에서 갑자기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이 나타난 몬스터들. 그리고 토벌.
몹시 익숙한 이야기였다. 유더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이전 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분명 그때와 같아. 하지만 그때는…… 시기가 지금보다 더 뒤였는데.’
이전 생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다만 그때의 유더가 제국 서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큰 피해를 입고 난 후였다.
먼저 그곳으로 향했던 몇몇 기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제국군마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자 그때까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마병단이 등을 떠밀리듯 서부로 향하게 되었다.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던 마병단의 첫 공식 임무였다.
제대로 준비할 시간조차 얻지 못한 채 막중한 부담감 속에서 서부로 향한 마병단원들은 발버둥 친 끝에 어떻게든 영광스러운 첫 승리 소식을 수도에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뻐할 틈 따위는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나타나는 몬스터 떼들의 공격이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이어졌고, 승리한 마병단을 향한 저열한 방해와 견제가 연이었다. 피해는 당연히 예정된 수순이었다.
결국 단장 키시아르까지 몸소 몇 번이나 전장에 나섰음에도 몬스터 진압이 완전히 끝나기까지 무려 3달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초대 단원들이 중상을 입거나 죽었으며 그중에는 단 내에서 두루 인망이 높았던 가케인 볼룬발트의 이름 또한 끼어있었다.
당시 마병단은 그 일로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단을 추슬러야 할 키시아르가 후계자로 유더를 지명하고는 수시로 자리를 비우면서 불안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비슷한 시기에 케일루사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혼란은 극에 달했고 이전까지만 해도 단장을 믿고 따르던 단원들 다수가 탈단하거나 혹은 도망쳐 달아났다. 살아남은 단원들 또한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 마병단이 해체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대비하려고 돌아온 이후 그리 열심히 마병단 전체 훈련을 시켜 왔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먼저 정보를 접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전 생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하필 타인 공작가의 일원인 테오라도 반 타인 황궁기사단장의 서신을 통해서 말이다.
유더는 타인 공작가라 적힌 부분을 미심쩍게 내려다보았다.
‘미리 토벌을 하겠다……. 말은 좋군. 이전 생에서 안 하던 짓을 하려 드는 이유가 좋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타인 공작가의 본 영지가 서부에 있는 건 맞으니 본거지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몬스터 소식에 걱정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전 생의 타인 공작가는 자신들의 본 영지 코앞까지 몬스터가 쳐들어왔을 때에야 겨우 스스로 해결하기를 포기하고 마병단에게 도움을 청했을 만큼 그들을 꺼려했었다.
미리 토벌을 하고 싶다면 굳이 막 생긴 마병단에 도움을 청하기보다 용병을 고용하거나, 가문과 연이 있는 기사단을 부르는 방법 쪽이 더 쉽고 편하지 않은가.
‘역시 이건 마병단과 키시아르 측을 향한 견제 의도가 들어간 수작질이라 생각하는 쪽이 편하겠지.’
몇 달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라면 무시해 주었겠지만 이 일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해결해야 할 일이니 빠르면 빠를수록 나을 터였다.
유더는 노려보듯 바라보던 편지를 접으며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이번에는 이전처럼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테니 상관없어.’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면서 타인 공작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편지를 보낸 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
테오라도 반 타인이 타인 공작가의 일원이며 황궁기사단장이라고는 하나 이 일에서는 제3자에 불과하다. 타인 공작가와 테오라도 단장이 진심으로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직접 마병단 건물로 찾아오는 정도의 정성은 보였어야 했다. 어차피 황궁기사단과 마병단은 같은 부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키시아르를 비롯한 마병단에는 발도 들이고 싶지 않으며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더더욱 싫다는 의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테오라도 반 타인의 아래에 있는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마병단원들을 벌레처럼 무시하며 키시아르에게 인사조차 없이 무시하고 지나가는 상황인데 그런 놈들의 상관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유더는 싸늘한 마음으로 넬라른의 2왕자 에제인이 보낸 두 번째 편지를 폈다. 이번에도 중점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중히 설명한 뒤, 축제가 끝난 후 다른 사절들이 모두 귀국하고 나서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제국의 문물을 좀 더 구경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도에서 머물고 있었음을 밝혔다.
- …제가 이 편지를 전하께 보내드리게 된 이유는 간결합니다. 저는 본디 제국에서 좀 더 머물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곧 넬라른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저를 둘러싸고 있는 다소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들 때문에 최대한 적은 인원만을 대동하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제인은 그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적지 않았다. 덕분에 유더는 한참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이전 생에 에제인이 왕자 시절 뛰어난 능력을 여러 번 드러낸 탓에 형제들에게 목숨을 자주 위협당했다던 정보를 떠올렸다.
‘각성자가 된 뒤에야 확실하게 전부 정리하고 왕이 되었다고 했었던가.’
유더는 계속해서 아랫부분을 읽었다.
- 소식통에 의하면 최근 서쪽 국경지대에 나타나는 몬스터 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하는데, 적은 인원으로 제국 국경을 떠나 안전한 곳까지 향하기에는 여러모로 위험 요소가 큽니다. 하여 황제 폐하께 사절의 한 사람으로서 인도적인 도움을 빌릴 수 있을지 요청한 결과 마병단을 맡고 계신 펠레타 공작 전하께 서신을 보내면 될 것이라는 몹시 감사한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인도적 도움이라 써 있으나 속은 케일루사 황제가 키시아르를 내세워 확실하게 에제인 왕자를 보호해 주기로 결정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에제인의 모국 넬라른 내에서 일어나는 왕위쟁탈전을 모르지 않을 황제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사절로 온 왕자와 황제 사이에 어떤 정치적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이 위험한 시국에 에제인 왕자가 굳이 사절로 제국에 온 이유가 처음부터 그걸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고.’
결국 넬라른의 왕좌를 차지할 최종 승자가 될 자는 에제인이니 케일루사 황제의 선택은 옳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유더는 새삼 케일루사 황제 또한 동생 키시아르만큼이나 일찍 죽기에는 아까운 안목과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편지를 다시 접어두었다.
그러기를 기다린 듯 옆에서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는 내내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무슨 편지들이기에 그러지?”
“이 편지들은 아무래도 단장님께서 오늘 바로 보시고 답을 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게 다급한 내용인가?”
유더는 설명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들을 키시아르의 책상 위에 올렸다. 잠시 후 편지를 모두 읽은 키시아르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군. 하필 두 개 모두 같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몬스터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단장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서부 국경지대에서 이전 해보다 훨씬 많은 몬스터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정보 말이라면, 그래. 알고 있었네.”
놀라움 한 점 담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기억하나? 축제 전에 왔던 편지 중 서부의 어느 영주가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 토벌을 위해 마병단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런 편지가…… 아.”
언제 그런 편지가 왔었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자기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편지 분류를 도왔던 날이었던가.’
내내 소외당하리라 예상했던 마병단의 일정이 편지 한 통으로 뒤바뀌었음을 깨달았던 날, 유더는 수많은 편지 중 그나마 정상적이라 생각했던 편지를 딱 두 개 골라내었다. 하나는 황궁에서 보낸 편지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키시아르가 말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던 요청서였다.
“처음으로 온 제대로 된 요청서라 생각해 기꺼운 마음으로 확인해 보았더니, 사실은 기사들을 부릴 돈이 아까워 차라리 각성자 노예를 두는 쪽이 싸게 먹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의 지극히 무례한 요청이었더군.”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유더의 사과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은 키시아르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그 편지에서 사실을 담은 건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부분뿐이었어. 그런데 사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거든. 지금 이 시기에는 국경 안쪽까지 몬스터가 발생할 시기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펠레타 기사들을 몇 명 보내 주변 정황을 계속 살피도록 명해두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