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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13화 (213/805)

213화

“유더. 요즘 에버 벡과 함께 새벽 수련을 한다지.”

“예?”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시작한 듯하던데 그건 잘 되어가고 있나?”

“아…. 네.”

갑작스럽게 뒤바뀐 화제에 의아해하면서도 유더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즘 에버에게 부탁했던 대로 새벽마다 함께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수련이라 해도 사실 에버가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힘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뿐이었으나 생각보다 더 흥미로웠다.

유더가 알고 있는 이전 생의 에버보다는 서툴렀지만 그녀의 힘 조절은 과연 다른 각성자들과 비교할 수 없이 섬세했다. 그 요령을 배워 제게 적용해 보는 게 현재 유더의 목표였다.

다만 그 일을 키시아르가 지금 갑자기 언급할 줄은 몰랐기에 의중을 파악하느라 답이 늦어졌다.

“에버는 현재 단원들 중 적은 단위의 힘 조절에 가장 능한 사람입니다. 제가 다소 서툰 부분이기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타이스 율만과 그의 제자도 계속 돕고 있고.”

키시아르가 또다시 화제를 바꾸었다.

타이스 율만은 지하실 실험 사건 이후 키시아르의 명에 따라 연구 장소를 옮겼다. 그의 새로운 연구실은 마병단에서 조금 떨어진 황궁기사단 창고 건물이었다. 며칠에 걸쳐 짐을 모두 옮기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쉬지 않고 앞으로의 새로운 연구 계획을 짜고 있던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홀해 보였다.

그의 제자 알릭은 스승을 돕는 한편 각성한 물 능력을 훈련 중이었는데, 유더가 올 때마다 어찌나 맹렬하게 질문을 해 대는지 한번 붙잡히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사실 그가 불러낼 줄 아는 물의 양은 모두 모아 봤자 겨우 컵 하나를 채울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리 강력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속성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을 어깨너머로 지켜본 경험이 많아서인지 발전시켜 나가는 속도만큼은 그 어떤 단원보다도 대단했다. 때문에 유더는 내심 그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 모든 말을 모아 유더는 한마디로 답했다.

“네.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의료부도 돌아다니고, 부단장들과 훈련도 봐 주고, 나그란의 별 소속이라는 각성자 두 사람도 쫓아다니며 조사하고 있지 않던가?”

“…예.”

‘내 일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은 왜 한 걸까.’

그러한 뜻을 담은 유더의 어색한 대답에 키시아르가 조금 더 짙게 웃었다.

“그런데 거기서 일을 더 얹어 달라니. 진심인가?”

“저는 지금보다 할 일이 더 늘어도 괜찮습니다.”

“유더 아일다운 답이군.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과로사하는 모습을 보려고 꺼낸 말이 아니야.”

유더는 문득 제 몸을 끌어당기는 듯한 무형의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단장실 전체를 가득 메운 기운이 술렁거리며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건…….’

키시아르의 기운이었다.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주기를 맞이하여 고삐가 풀린 기운들이 주인의 뜻을 반영하듯 한결 사납고 자유롭게 출렁이며 유더의 전신을 따라 빙글빙글 맴돌았다. 유더는 그 기운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키시아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간단한 다른 답도 있지.”

단장실에 들어와 오래 있을 방법이 일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바라보는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가슴이 절로 철렁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여기 있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있는 것.”

“…….”

“어떤가?”

아무리 평범하게 생각하려 해도 그 안에 내포한 의미가 심상치 않다는 정도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답하겠느냐는 듯 노골적인 열망의 색채를 띤 얼굴을 보자마자 유더의 안에서도 반사적으로 갈증이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입 안이 말라 오기 시작했으나 그는 간신히 그 열기를 억누르며 목울대를 울렸다.

“…유념해 두겠습니다.”

“유념만?”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오늘따라 더한 듯 느껴지는 이유는 키시아르가 두른 기운이 절제 없이 움직여대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상이 아닌 이를 상대로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경고를 울렸다.

“노력도 하겠습니다.”

“이런. 안 넘어오는군.”

키시아르가 코끝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한참 동안 낮게 웃던 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의자 위로 몸을 깊이 묻었다.

잠시 후 천천히 웃음이 사그라진 자리에 깊은 시선만이 남겨지고 침묵이 흘렀다. 붉은 눈동자를 유더의 속내까지 꿰뚫어 볼 듯 고정한 채로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그간, 내가 모습을 잘 비치지 않아서 섭섭하지는 않았나?”

유더는 문득 그 말이 키시아르가 그에게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었다.

“괜찮았습…니다만.”

말을 잇던 유더는 키시아르의 묘한 눈빛을 보고 이내 말을 바꾸었다.

“아까 주커만 경에게 들으니 단장님의 이번 주기가 길어지는 편이라 하시기에 몹시 염려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단과 이야기하던 게 그거였군.”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염려할 필요 없네. 이번 주기가 길어지는 건 전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힘을 발산시키려 하다 보니 그런 것일 뿐이야. 나단은 그래 보여도 걱정이 많은 성정이다 보니 때로 상황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때가 있어.”

자연스럽게 발산하느라 주기가 길어졌다는 건, 이전에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힘을 발산해 왔다는 뜻일까. 묘한 어감이었으나 자세히 묻기도 이상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도록 만들어야겠지.”

키시아르의 부드러운 시선 속에 열기가 어른거렸다.

“진짜를 알아버린 탓에 다른 것들로 눈을 가리며 허망하게 연명하고 싶지는 않아졌거든.”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키시아르가 홀가분해 보였기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기가 어른거리는 시선이 닿은 피부가 간질거렸다.

유더는 등을 타고 오르는 듯한 감각을 떨쳐내듯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닿고 싶은데.”

갑자기 툭 흘러나온 말에 분위기가 또다시 변했다. 금방이라도 ‘예?’ 하고 반문하고 싶은 것처럼 벌어진 유더의 입을 보며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답해 주었다.

“굉장히 만지고 싶어.”

“뭘 말씀이십니까.”

반문은 했지만 답은 이미 알았다. 시선이 제 얼굴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으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었다. 잠시 후 정말 모르겠느냐는 듯 키시아르가 손을 살짝 들어 흔들면서 입술 끝을 비밀스럽게 들어 올려 웃음으로써 그 예감은 온전한 확신으로 변했다.

‘왜 저런 의뭉스러운 짓마저…….’

눈을 뗄 수 없다 못해 외설적으로 느껴지는가. 예전처럼 능구렁이 같은 사내라 투덜대며 단박에 피할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그 시절은 이미 너무나 멀었다.

“……어디쯤이면 되겠습니까.”

“정말 만지게 해 줄 건가?”

침묵 끝에 무겁게 중얼거리자 짐짓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도움이 된다면 너무 지나친 곳이 아닌 한 괜찮습니다.”

“지나친 곳이라.”

고개를 끄덕인 유더에게 키시아르가 확인하겠다는 듯 반문을 던졌다.

“어디……. 머리카락은 괜찮나?”

“예.”

“손은?”

“예.”

“뺨도 만져봐도 되나? 귀는?”

“…예.”

대체 뭘 일일이 확인하려 드는 것인가 싶었지만 일단 대답은 했다.

“흠. 그러면, 여기는?”

키시아르가 검지 끝으로 제 입술 아래를 가볍게 두드리며 눈웃음쳤다.

“……죄송합니다만, 처음부터 절 놀리려고 꺼내신 말이셨습니까?”

“하하하.”

싸늘한 답에 키시아르가 별안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유더는 일순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생각을 잊은 채 멍하니 굳어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따스한 햇살 아래 녹아내리듯 피어나는 꽃이 그러했을까.

이제까지 키시아르 라 오르의 웃는 얼굴을 수도 없이 보아 왔음에도 그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그라졌다. 알 만큼 아는 상대라 생각했던 사내의 웃음이 마치 태어나 처음 보는 무언가 마냥 유더 아일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미안하네. 닿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내 쪽이 안 돼.”

힘을 조절하기 어려워서 한 번 만지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거든. 웃음에 뒤섞인 쌉쌀한 중얼거림이 귓가에 울려 퍼진 후에야 유더는 겨우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렸다.

“모처럼 허락까지 해 주었는데 정말 아쉽군.”

“…….”

“공작님. 차를 가져왔습니다만…….”

무어라 답을 해야 할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유더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나단 주커만이 돌아왔다. 그는 웃음기가 남은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한 뒤 유더를 짧게 돌아보았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주 귀여운 일이 있었지. 알고 싶나?”

농담 어린 대꾸에 나단 주커만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구는 키시아르를 한두 번 대한 게 아닌 티가 나는 묵묵한 얼굴로 찻주전자와 잔을 내려놓았기에 유더는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면 저는 마저 일을 끝내겠습니다.”

“그러게.”

키시아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더는 빠르게 제 자리에 앉아 분류해 두었던 편지들을 끌어당겼다. 한시라도 빨리 전부 읽고 나서 나갈 생각이었으나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이건 궁중마법사청에서 온 서신. 이건 이전에 재판 때문에 불러온 이들에게 쓴 비용 때문에 보낸 것 같고… 이것도 비슷하군. 그리고 이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글자를 파악하던 눈길이 순간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유더는 손에 든 두 개의 편지 겉면에 쓰인 글자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는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에제인 아파난 넬라른 2왕자. 둘 다 요청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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