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펠레타 공작을 위시한 마병단과 아페토 공작가 사이의 재판은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아페토 가가 패배하며 끝이 났다. 그러나 그 결과가 불러일으킨 폭풍까지 예상과 같지는 않았다.
진다 해도 실질적 피해 없이 고작 자존심이나 조금 다치리라 여겼던 아페토 가는 엄청난 양의 벌금과 함께 공식 재산의 삼분지 일 가량이나 몰수 선고를 받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관련자들이 여죄를 심판받아 유배를 갔고, 혹은 감옥에 갇혔다. 간접적인 조력자로 판단되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이도 거의 수백에 이르렀다.
아페토 공작은 이러한 처벌에 당연히도 반발하였으나,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의 공격은 마치 모든 일을 예상한 듯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아페토 공작이 체면이 상하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타 공작가들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망설이는 동안, 황제를 따르는 이들은 아페토 가에서 잡아들인 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온 불같은 성정 덕에 아페토 가의 사람들 중에는 애초부터 깊은 충성심을 지녔던 이들이 거의 없었다. 돈, 혹은 공포에 짓눌려 따라왔던 이들은 아페토 가의 여죄를 고발하는 대신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거래에 기꺼이 응했다.
배신자 한 명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어도 순식간에 수십 수백의 배신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니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아페토 가의 거대한 팔다리는 순식간에 끝쪽에서부터 썩둑썩둑 잘려나갔다.
아페토 공작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겉으로만 보면 공작을 비롯한 가문의 중진들은 처벌을 피한 듯했으나 그것은 팔다리를 잃고 몸통만 남겨진 꼴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계속 자신은 상관이 없다 주장하던 공작이 사실은 직접 벨트레일을 지원했다는 증거가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이었다. 가문을 책임져야 할 공작이 정작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온갖 비난과 원망이 빗발쳤다. 첫 재판에서 밝혀진 벨트레일의 기록과 관련된 갖은 소문 또한 아페토 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명분과 명예, 혈통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며 으스대던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또다시 사건이 일어났다. 레노어 샨 아페토를 죽인 진짜 범인이라는 의혹을 남긴 채 한동안 잠잠했던 황태자의 궁에 암살자가 침입했다 잡힌 것이다. 다행히도 황태자는 죽지 않았으나 독이 묻은 비수에 상처를 입어 한동안 정양을 취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암살자는 잡히자마자 즉시 자결했기에 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품속에 임무를 성공했을 때 남겨둘 요량으로 받은 듯한 패에 새겨진 꽃문양이 세인들의 화제에 올랐다.
그 꽃의 이름은 둘라쿠를레. 오래전부터 제국 내에서 어린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관 위에 올려두는 용도로 쓰여 슬픔의 꽃이라는 이명을 지닌 꽃이었다.
아페토 공작은 자신이 지시하지 않은 일이라 주장했지만 그의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디아카 공작은 늙은 너구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화를 내며 아페토 공작에게 정식으로 항의하는 서한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그 일이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얼마 뒤 결국 아페토 공작은 어린 시절 완치했다 여겼던 지병이 재발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가문의 기둥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그를 대신하여 하나 남은 후계자인 1공자 에이셰스가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에이셰스는 원하던 힘을 움켜쥐자마자 저에게 반발하던 아버지의 남은 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저돌적으로 나섰다. 그가 병약한 탓에 가문을 잘 이끌지 못하리라는 악의 서린 말을 했던 자들이 순식간에 가문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줄줄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페토 가의 추문들과 한 치의 관련도 없이 유일하게 제 자리를 지켜 온 에이셰스 1공자가 가문의 윗자리에 서게 된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라 평했다.
그리고 유더 아일은 그 모든 변화를 한 발짝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숨긴 채 묵묵히 지켜보았다.
***
유더는 5층으로 올라가 단장실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문이 열리며 나단 주커만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본 단장실 내부에 금발을 지닌 장신의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신 더미를 익숙하게 주워 담으며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는 오늘도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예.”
얼마 안 되는 시일 사이 세상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변하는 동안 키시아르 또한 미리 예고했던 대로 ‘주기’에 도달했다. 아페토 가의 재판이 거의 마무리될 때까지는 그래도 종종 멀쩡한 모습으로 직접 일을 지휘하고 참여한 이들을 독려했던 그였으나, 며칠 전부터는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단장실에는 일찍 나와 있었는데…….’
늦게 일어나 단장실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 게 오늘로 3일째였다.
‘이쯤 되면 여기 안에 있기는 한 게 맞는지도 모르겠군.’
몸 안에 든 힘이 넘쳐흘러 강제로 빼낸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리 말은 들었어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키시아르가 유더를 찾지 않으니 아무 말 하지 않고는 있었지만 이쯤 되면 약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잠을 언제 자는가 싶을 만큼 늘 일하고 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텅 빈 단장실에서 유일하게 마석 난로만이 변함없이 타닥대며 빛을 냈다. 유더는 난로 위에 놓인 신검 오르를 흘긋 바라본 뒤 단장 책상 근처에 마련된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제 일을 시작했다. 축제 기간과 발현으로 인한 업무 휴가 기간이 모두 끝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맡게 된 서신 분류 업무였다.
키시아르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모두 읽고 분류한 뒤 그가 당장 읽어야 할 만큼 중요한 서신을 골라내는 건 쉽기는 해도 시간은 꽤 걸리는 일이었다.
‘오늘도 대부분은 초대장이긴 한데…….’
그래도 마병단의 이름이 많이 높아진 덕인지 축제 이후로는 한 번도 광대 대용으로 쓸 각성자를 보내달라거나, 별 쓸모없는 용건을 대며 젊고 아름다운 각성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둥의 무례한 요청 따위는 없었다.
유더는 빠르게 편지를 모두 넘겨 파티 초대장이나 키시아르를 향한 다소 일방적인 연서 내용이 아닌 편지만 일단 분류해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8할 정도 되는 편지가 사라졌다.
남은 편지들을 앞에 놓고 뜯어서 본격적으로 읽어보려 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던 나단 주커만이 차를 가져와 옆에 놓아주었다. 산더미처럼 많은 초콜릿 또한 함께였다.
“드십시오.”
“…….”
유더는 초콜릿 더미를 바라보다 나단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어제도 나단 주커만은 그에게 케이크 다섯 조각을 주었고, 그저께는 잼을 올린 색색깔의 쿠키를 내놓았다. 안 줘도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돌아온 답은 ‘명을 들었으니 따르는 것뿐’이라는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이것도 단장님께서 주시라 말씀하셨습니까?”
“예.”
이런 것들을 매일매일 새롭게 내놓으라 명할 정신이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유더가 이 일을 처음 겪어 묘하게 여길 뿐, 키시아르에게 이 상황은 그리 이상한 게 아닌 것인지도 몰랐다.
혹여 키시아르에 대해 무언가 더 말할까 싶어 바라보았으나 나단 주커만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묵묵하기만 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결국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등을 돌려 사라지기 전 그를 불렀다.
“혼자 다 먹기 어려울 듯하니 잠깐 함께 드시겠습니까?”
“충분히 다 드실 수 있는 양이라 생각해 드렸습니다만…….”
나단 주커만의 시선이 초콜릿 더미로 향했다. 유더는 줄곧 그가 묵묵히 비워 온 디저트 그릇들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나단 주커만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차나 초콜릿에는 손대지 않고 그저 기사답게 반듯한 자세로 앉아 유더를 바라보았다.
“뭔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단장님의 주기가 다가왔을 때 제가 무언가 더 신경 쓸 일이 있을지 여쭈었던 날, 주커만 경께서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었죠.”
그것은 유더가 서신을 분류하는 업무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때 나단은 키시아르와 자신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니 다른 이가 새삼 신경을 더 써서 무언가를 조심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예.”
“그렇다면 이런 일도 보통인 겁니까.”
“잠이 많아지시고 주변을 물리시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네.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잠이 많아지고 주변을 물리려 한다. 유더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전에도 이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해 보면 이번 생에서나 이런 일이 처음일 뿐, 이전 생에서는 이미 시도 때도 없이 키시아르가 사라져 며칠씩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익숙했었다.
키시아르는 이미 주기가 다가올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경고도 해 주었다. 유더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 모두 곁에서 물리고 있는 거라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나단이 문득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걱정되십니까?”
“당연히 걱정이 됩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직접 겪는 건 처음이니 아무래도 그렇군요.”
키시아르에게 문제가 생기면 유더 아일이 선택한 새로운 미래에도 지장이 생긴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곧 미래와도 같았다.
유더의 대답에 나단 주커만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의외군요.”
유더는 한참이 지나 입을 연 나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의문과 묘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제가 단장님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줄 아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