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한동안 소란이 일어났으나 간신히 진정된 끝에 레노어의 하인 피프는 할 말을 모두 마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레노어를 곁에서 오래 모셨기에 생각보다 훨씬 자세한 전후사정을 알고 있었다.
레노어가 가문 내의 후계자 다툼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 벨트레일의 연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피프는 하인으로서 몇 번이나 두 사람 사이에 편지를 전했다. 각지에서 데려온 각성자들을 직접 별저까지 안내한 적도 많았다. 그 모든 과정을 날짜를 포함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까지 상세히 읊으니 차마 완전히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는지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이 이를 갈았다.
피프가 마지막으로 같은 일을 함께했던 하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대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입막음이나 화풀이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밝히자 방청석은 충격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대체 무엇을 믿고 저리 거침없이 폭로하는지 모를 정도로 대담한 행동에 재판관들마저 근엄한 표정을 깨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을 정도였다.
귀족가에서 하인들이 별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특이한 건 아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졌을 때 지탄받아 마땅한 추문임도 확실했다.
언제나 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왔다고 으스대며 각종 특혜를 누려 왔던 아페토 공작가의 명분과 체면이 그들의 발가락만도 못하던 하인 한 명에 의해 바닥을 구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이들의 흥분 속에서 하인 피프가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겁에 질려 보였지만 속은 아주 후련해 보였다.
“저 사람, 저렇게까지 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에버가 그를 걱정한 듯 조용히 속삭이자 키시아르가 그 말을 들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늘 재판이 끝나는 대로 가족과 함께 제국을 떠나게 될 거라네. 그 일을 돕기 위해 펠레타 기사 여럿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지.”
“아…….”
부단장들을 포함하여 유더 또한 피프가 오늘 모든 것을 떨쳐버리듯 폭로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납득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노어 공자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벨트레일 전 원로사제 또한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된 지금, 그들과 관련 없는 가문의 일원들이 대신 죄값을 치러야 한단 겁니까?”
멀리서 아페토 가의 대리인 하나가 벌떡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 그는 상대편 증인들의 순서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레블린과 단데니온, 피프를 손가락질하며 그들의 증언은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평민 소년 한 명과 앙심을 품은 전 하인의 말만 믿고 각성자들이 억지로 끌려왔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페토 가가 그리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마병단이 애초에 이 일을 제대로 조사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어찌 합당한 증거도 없이……!”
“합당한 증거라, 좋지.”
그때, 여유롭게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처음으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려고 온 자리가 아니던가. 누군가의 열변만 없었더라면 이미 제시하고도 남았을 거야. 아무래도 재판 규칙조차 알지 못한 채 대리인이랍시고 온 이가 이 자리에 있는 듯한데, 그자가 조금만 예의를 알았더라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나고도 남지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하지?”
“…….”
그리 소리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명확히 파고드는 키시아르의 말뜻을 인식한 순간 모든 이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모든 이의 앞에서 예의도 모르는 자라 비꼬아진 대리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제가 흥분한 탓에 그만… 잠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숨을 몰아쉬다 겨우 이를 악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씩씩대는 아페토 측 대리인과 증인들을 보며 칸나가 아주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머지 부단장들 또한 속이 조금 시원해졌는지 미소짓고 있었다.
키시아르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받아넘기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뒤쪽으로 물러난 레블린 일행들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선 그가 모든 이를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마병단은 폐하의 명을 받아 이번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 아페토 가에서 당일 구출했던 각성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오랫동안 조사한 결과 상당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지.”
“…….”
“아페토 가가 그런 번거로운 일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고 했던가? 왜 그랬어야 했는지는 누구보다 자신들이 제일 잘 알 텐데, 재미있는 말이군.”
키시아르를 향해 무어라 소리치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키시아르의 말 속에 내포된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향하여 키시아르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이 열리며 아페토에서 가장 기다리지 않았을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는 아페토 가에서 조직적으로 각성자를 납치 및 수급하였던 곳 중 하나인 하르탄의 피해자들, 영주 대리, 붙잡은 죄인들을 다음 증인으로 세우겠다. 또한 너무 비밀스러운 정보를 담고 있다 판단하여 재판관들만 볼 수 있도록 비공개 제출했던 벨트레일 샨 아페토의 연구기록 일부를 이곳에서 낭독할 것을 요청한다. 이상.”
키시아르의 말에 모든 이들이 더욱 크게 웅성거렸다.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오늘 적당히 소란을 피워 아페토 가의 죄값을 최대한 줄일 요량으로 나섰을 뿐, 일을 더 크게 만들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레블린 3공자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만 다루는 재판이 아니었소?”
“저건 다 분위기를 몰아가려는 수작이요. 분명 벨트레일 님의 기록에는 별말이 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에이셰스 1공자께서는 그리 말씀하셨는데……!”
“하르탄은 대체 어디요? 아페토 공작 전하께선 그런 지역은 말씀도 하신 적 없지 않소!”
“거긴 동부요. 동부.”
“동부라고? 그러면 디아카 가 쪽의 세력이 아닌가? 설마 그들이 펠레타 공작 측과 손을……?”
대리인들이 모여 다급히 의견을 모았으나 이렇다 할 대응 방법을 생각해내는 자가 없었다. 키시아르가 직접 나와 있는 상대편과 달리 그들 쪽에는 아페토 공작도, 에이셰스 1공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인을 불러 아페토 본가를 향하여 황급히 서신을 보내는 동안 복도 안쪽에서 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도, 젊은 여인도, 갑옷 차림의 젊은 귀족 사내도, 추레한 중년 사내도 있었다.
펠레타 기사단복을 입은 이들의 손에 이끌려 쇠사슬을 발목에 찬 젊은 청년과 겁에 질린 각성자 두 사람도 그들 사이에 끼어 벌벌 떨었다. 혼란 속에서 제일 먼저 나선 이는 하르탄의 영주 대리, 제클리스 하르탄이었다.
“저는 제클리스 하르탄이라고 합니다. 현재 하르탄의 영주 대리를 맡고 있으며, 이전에는 은십자 기사단 소속 기사였습니다.”
선량한 얼굴의 제클리스가 기사식으로 인사를 하자 몇몇 이들이 은십자 기사단에 대해 수군거렸다. 동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기사단이었기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선, 멍청했던 제 동생이 저지른 끔찍한 죄와 그 아이를 부추긴 이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제클리스는 제 동생인 자카일을 앞에 세운 채 그가 영주 자리를 노리고 아버지와 누나 부부를 화재 사건을 가장하여 죽인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 사건으로 누명을 쓴 데브란과 가족들이 모조리 납치될 뻔했다는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데브란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납치되었던 장소에서 구출된 이들이 각각 비슷한 증언을 하자 재판관들의 표정도 점점 무겁게 변화해 갔다. 누가 보아도 아페토에서 조직적으로 저질러 온 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납치 및 인체실험과 살해.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페토가 무엇을 바랐을지 모든 이들이 서서히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제가 때마침 다시 한 번 마을에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동생은 뜻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자카일은 본디 그런 악한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1년에 걸쳐 저 아이를 꼬드겼지요.”
증인들의 증언이 끝나고 무겁게 중얼거린 제클리스가 아페토 가 측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자카일처럼 갑자기 누군가의 꼬드김에 넘어가 가족을 해하고서라도 자리를 얻으려 하는 젊은이들이 요즘 동부에 많아졌다는 사실을 여러분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그게 지금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페토 가의 대리인이 벌컥 화를 내자 제클리스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그런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긴장되다 보니 자꾸 다른 말도 함께 나오는군요.”
“지금 무슨 말장난을……!”
“그때 현장에서 납치를 주도하던 이들은 모두 죽었으나, 두 명의 각성자 용병과 몇몇 각성자들이 운 좋게도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펠레타 공작 전하의 요청에 따라 데려왔습니다만, 한번 말을 들어 보시지요.”
대리인들의 말을 무시한 제클리스가 말을 끝내자 펠레타 기사들이 포박한 각성자 용병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능력을 쓸 수 없도록 서약과 마법을 사용한 금제를 걸어둔 상태였다.
그들은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잔뜩 주눅이 들어 입을 열었다.
“저… 저희를 고용한 분이 어디의 사주를 받은 분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분은 관리관이라 불렸고, 때때로 ‘본가’와 연락하시고는 했는데……. 가끔은 본가에서 사람이 직접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아페토 관리관의 이름과 모습, 그리고 본가에서 나왔던 이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을 끌고 나온 펠레타 기사들이 그 정보를 토대로 찾아낸 아페토의 고용인 정보를 법관에게 넘겼다.
“우리는 매일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 본가라는 곳에 끌려간 다른 각성자들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요. 말로는 일을 시킨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확실했어요!”
하르탄에서 구출된 각성자들이 몸을 떨며 외치자 아페토 별저에서 그보다 더한 일을 겪었던 다른 각성자들이 더 큰 목소리로 동조했다.
“제 몸에는 그때 난 상처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강제로 발정기를 이끌어낸다며 먹은 약물 때문에 피를 토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런데도 그게 없던 일이라고 하실 겁니까?”
“…….”
아페토에서 구출된 각성자들의 울분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아페토의 대리인들은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없이 울려 퍼지다가는 사그라졌다.
애초에 처음부터 납치 피해자들만 나와 떠들어댔다면 가볍게 거짓말로 치부하고 부정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페토의 피를 이은 레블린의 냉정한 증언으로 시작하여 하르탄 사건을 거쳐 여기에 다다르니 격앙된 분위기가 마치 터져버린 둑과 같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방청석에 앉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건 그만한 신분과 권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콧대 높은 얼굴로 평민 무지렁이에 불과한 이들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을 이들이 레블린 샨 아페토와 제클리스 하르탄의 이야기에 연이어 공감을 하고 말았다.
피해를 입은 자들의 이야기보다 아페토 가와 디아카 가 사이의 분란 쪽이 더욱 그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부터 죄의 경중을 가리는 데 있어 주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만큼 큰 무기는 없는 법이었다. 유더는 제 죄가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은 채 환호를 지르며 꽃을 뿌리던 사형장의 인파를 아스라이 떠올리다가 지웠다.
마치 그때처럼 뜨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법관이 다시 한 번 앞에 나섰다.
“증언은 이제 끝입니다. 다음으로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요청하셨던 비공개 증거물 낭독을 수락할지에 대해 7인의 대재판관께서 잠시 의견을 나누시는 동안 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번에는 모든 분들께서 자리를 떠나셔서는 안 됩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