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대기실에 모인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더는 키시아르가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킨 시선들이 그의 얼굴을 간절히 따라다녔다.
“곧 우리의 차례가 온다.”
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훑은 키시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각자 수많은 분함을 삼켜 왔겠지. 곧 닥쳐올 상황이 두렵기도 할 것이다. 하나 이곳에 온 이상 그대들은 더 이상 홀로 싸우는 자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음에도 대기실 내부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키시아르는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도 그곳에 모인 이들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을 정확하게 두드렸다.
“이곳을 나갔을 때, 그대들의 등 뒤에 언제나 내가 있음을 명심하라. 나를 믿고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 테니.”
연설이라고 하기도 무엇한 아주 짧은 몇 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들은 놀랄 만큼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색하고 불안한 얼굴로 모여 있던 이들의 눈동자 위로 점차 침착함과 잘 정제된 감정만이 남겨졌다. 싸우는 데 익숙지 않은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키시아르는 이후로도 쉬는 시간이 다할 때까지 그에게 다가와 더듬더듬 말을 거는 이들과 편안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유더의 곁에서 문득 누군가 옷깃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유더.”
그에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레블린 샨 아페토였다. 여전히 인형처럼 아름답지만 이전과 달리 생기 넘치는 눈동자를 빛내는 소년은 곁에 과묵한 인상의 다른 소년과 하인 한 명을 대동한 상태였다. 유더는 그들과 눈으로 소리 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레블린.”
“옆은 내 연인, 니온이에요. 이미 알고 있죠? 그리고 옆은 레노어 형이 마지막에 편지를 맡겼던 하인인 피프고요.”
이전에 소개를 받았기에 레블린과 함께 있는 소년이 그의 연인인 단데니온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레노어의 편지를 들고 왔다는 하인은 지금 처음 보았다. 유더의 시선을 받은 하인은 약간 기가 눌린 얼굴로 우물거리며 눈을 돌렸다.
“세 분 모두 증언하러 오신 겁니까.”
“그래요. 다 단장님 덕분이죠. 어제까지도 원하지 않는다면 안 와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 덕에 우리 모두 마음을 정할 수 있었거든요.”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블린은 제 선택이자 은혜를 갚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더를 올려다보던 레블린이 문득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네요.”
“대신전 앞에서였죠.”
유더는 대신전 앞에서 열린 기도회 때 처음 레블린이 그를 찾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창백한 얼굴로 도와 달라고 중얼거리던 그날의 모습보다 지금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유더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나와 니온은 지금 여기에 설 수 없었을 거예요.”
“아닙니다. 저는 별로…….”
“고마워요.”
별로 한 일이 없다고 말하려던 유더의 입이 불의의 공격으로 멈추었다.
“그냥 이 말을 지금 꼭 하고 싶었어요.”
유더는 가만히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레블린은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유더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웃는 얼굴이 몹시 밝아 보였다.
그들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선 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키시아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데브란의 늙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숙소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물었고, 제클리스 하르탄과는 편지로만 의견을 나누던 사이에서 발전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황족이라는 사실에 겁을 먹고 있던 이들도 그와 몇 마디를 나누고 나면 금세 긴장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블린이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은 참 대단한 분이에요. 지금껏 다른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존경했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게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있어요.”
“……네.”
대단하다는 말로 과연 키시아르 라 오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유더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아주 작게 숨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레블린이 갑자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박였다.
“어. 방금 웃으신 거죠?”
“예?”
“웃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웃었던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블린은 유더가 웃었다고 확실하게 주장했다.
“단에 있을 때도 마병단원 분들이 단장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좋아한다고는 느꼈지만, 어쩐지 유더가 그러니 더 신기하네요. 죄송해요. 보좌시니까 당연할 텐데……. 그래도 뭔가…….”
신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레블린이 무어라 더 말을 걸기 전 다행스럽게도 쉬는 시간이 끝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다시 법정으로 들어섰다. 키시아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앉을 의자 뒷자리를 잠자코 지키고 있었던 세 명의 부단장들이 황급히 유더에게 눈짓과 손짓을 동원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 달라 요청했다.
유더가 그들에게 대기실에 있는 이들은 아주 멀쩡하며 문제가 없다는 답을 돌려주고 나서야 세 사람의 안색이 일제히 밝아졌다.
“곧 펠레타 공작 전하와 마병단 측 증인들의 차례입니다.”
새로운 차례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페토 측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키시아르와 그 뒤의 대기실 입구를 노려보았다. 검게 입을 벌린 길을 따라 처음으로 나온 이는 레블린 샨 아페토와 단데니온, 그리고 레노어의 전 하인이었다.
“세상에. 아페토 3공자가!”
“아무리 가문과 연을 끊고 나가겠다고 했다지만 여기까지 올 줄은…….”
첫 순서부터 예상치 못한 등장에 순간적으로 내부가 시끄럽게 들끓었다.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 또한 당혹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며 당황한 얼굴을 빠르게 숨겼다.
‘레블린이 나올 거라는 예상까지는 했었나 보군.’
그래도 첫 순서로 나올 줄은 몰랐으리라. 보통 오르 제국의 재판에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일수록 맨 마지막에 배치하는 편이었다.
키시아르와 뒤에 선 유더를 향해 아주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인 레블린이 마병단 측 증언석에 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레블린 샨 아페토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할 말에 대해 신 앞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단데니온과 피프 또한 같은 소개와 맹세를 했다. 레블린은 저를 노려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주변을 돌아본 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벨트레일 숙부와 레노어 형이 저질러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지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축소하려 하여 축소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레블린 공자!”
“거짓말입니다! 가문을 배신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찌 이런!”
“펠레타 공작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어떻게 아직 사리분별도 못 하는 어린 공자를 이런 자리에!”
아페토 가 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레블린은 그쪽으로 눈조차 돌리지 않은 채 턱을 당당히 쳐들었다.
“형과 숙부가 계약자들과 계약을 맺어 합법적인 연구를 했다고 주장하셨지만, 제가 아는 바와는 다릅니다. 두 분과 계약을 맺어 아페토에 온 뒤 저의 경호 겸 놀이 하인으로 배치된 단데니온과 레노어 형을 마지막까지 모셨던 피프가 이 사실을 보다 명확히 증언해 줄 것입니다.”
방청석이 또다시 크게 술렁였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레블린이 자신의 앞으로 나서는 연인의 손끝을 가볍게 꾹 잡았다 놓았다. 그 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자 소년의 얼굴에도 흐린 웃음이 어렸다.
‘역시 긴장되었겠지.’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자리다. 하지만 레블린은 진실을 폭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선 정의로운 귀족 소년에 걸맞은 태도로 누구보다 잘 해 주었다. 방청석에 앉은 이들의 반응이 그를 증명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선 단데니온이 자신은 본디 평범한 평민 소년이었으나, 각성 이후 부모에게 팔려 납치에 가까운 방식으로 아페토 가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나이와 생일을 들은 레노어가 동생의 놀이 상대로 변덕스럽게 그를 골라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운명 또한 별저 아래에서 끝났을 터였다.
이후에도 그는 레노어의 분노를 사 별저에 갇혔고, 레블린을 만나기 위해 마병단이 왔을 때에야 겨우 구출되었다. 구출 당시 그의 상태는 빈사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 재판에서는 그와 레블린의 관계보다는 아페토 가 측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각성자들을 끌어들여 잔혹한 일들을 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게 중요했기에, 소년은 미리 준비한 대로 최대한 간결히 제가 겪은 일들을 설명했다.
그간 잘 먹고 잘 쉬며 보살핌을 받았다지만 단데니온은 아직도 보는 이의 동정심을 자극할 만큼 작고 깡마른 소년이었다. 물론 외견만 그러할 뿐, 지닌 능력은 그를 구출하러 갔던 에버를 꽤 고생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났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다.
뒤이어 나선 레노어의 하인, 피프가 아페토 가에서 7년이나 일했다는 소개와 함께 레노어를 모셔 왔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레노어의 마지막 날에 편지를 받아 레블린에게 전한 하인이었기에 듣는 이들의 집중도도 남달랐다.
“레노어 공자님은 벨트레일 님과 하시던 일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페토 가의 세력이 미치는 제국 전 지역 곳곳에서 각성자를 수급해 오는 일로 화를 내신 적도 잦았습니다. 워낙 자주 죽어 나갔기 때문에…….”
“네 이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런 거짓말을!”
“법정 내에서는 정숙하여 주십시오.”
더듬대며 증언하는 그의 앞에서 화를 내는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을 법관이 황급히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