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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07화 (207/805)

207화

유더는 키시아르가 어깨를 펴고 완벽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존재감이 흘러넘쳤다. 느긋하게 미소를 띤 여유로운 얼굴을 보며 방청석에 앉은 이들이 작게 술렁였다.

“저분이 바로 그 펠레타 공작.”

“소문대로 외모 하나만큼은 정말…….”

“직접 이곳으로 올 줄이야. 아페토 공작은 오지도 않았는데……. 그만큼 당당하다는 뜻인가….”

원형으로 둘러싼 계단형 방청석에서 들려오는 술렁임이 머리 위에서 넘실대는 게 신경 쓰일 만도 하련만, 키시아르는 제 자리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

마침내 의자 앞에 다가와 선 키시아르가 묵례하는 세 부단장과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유더가 선 오른쪽이었다. 유더의 인사까지 받고 난 뒤 그가 네 사람에게만 들릴 만한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다들 먼저 와서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군.”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심심할 틈이 없을 거야. 그동안 열심히 준비해 온 것들이 있으니 어디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

유더를 향해 눈을 가볍게 찡긋한 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직후 7인의 대재판관들도 각자 자기소개를 한 뒤 진실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다는 선언 후 착석하였다.

유더는 엄숙한 표정을 지은 재판관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황제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았다는 소개를 하고는 있으나 실상 그들 모두가 황제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무조건 아페토에게만 유리한 판결을 내리려 할 이도 있을 테고, 어쩌면 또 다른 이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재판관들의 성향이 어찌 되었든, 결국 이번 재판에서 아페토가 이길 일은 없으리라. 느긋이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미소 띤 얼굴이 그러한 결과를 확신하게 했다.

“만물을 공정히 내리쬐는 빛 앞에 한 점 어둠도 없이. 눈을 가리는 거짓을 물리칠 진실된 영광을 바랍니다.”

대신전에서 파견된 사제 한 사람이 시작 전 전통에 따라 성표를 향해 경전을 들고 짧은 기도문을 읊었다.

“재판을 시작합니다.”

시작 선언 후 이 사건을 맡아 재판 과정을 진행해 온 법관 두 명이 앞으로 나서 사건의 개요를 짤막히 설명했다.

아페토의 3공자 레블린 샨 아페토의 마병단 입단과 관련된 익히 알려진 사건, 그로 인하여 키시아르가 단원 몇 명만을 데리고 아페토 가에 방문하게 된 일. 그날 우연히 마주치게 된 끔찍한 진실과 아페토 가의 부정과 관련된 의혹, 그리하여 조사와 고발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하여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는 마병단장의 권한으로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레노어 샨 아페토와 벨트레일 샨 아페토, 그들을 도운 조력자들과 모든 사건을 알면서도 묵인한 아페토 가에 대한 적법한 처벌을 바란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인 데다 모두 다 직접 겪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제3자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다소 묘했다. 유더가 이전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 재판관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양측에서 준비한 첫 증인과 대리인들을 차례로 들여보내도록 일렀다.

“첫 시작은 아페토 가 측부터입니다.”

마병단으로부터 고발을 당한 아페토 가 측이 전통에 의해 먼저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얻었다. 유더는 아페토 가 측 대기실에서 빠져나오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눈길을 옮겼다.

오늘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결석한 아페토 공작의 입장을 대신 밝힐 대리인과 그들의 의견을 뒷받침해 줄 사람들이 몹시 거만하고 성의 없어 보이는 얼굴로 제자리에 섰다.

방청석을 메운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그들은 태양신 앞에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 말을 시작했다.

“우선 아페토 공작 전하께서는 이 일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시 발부터 빼려 하는군. 유더는 예상대로 이야기하는 대리인의 얼굴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삼켰다.

“가문의 수장이라면 무릇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는 하지만, 책임을 지는 일과 직접 잘못된 일을 저지른 건 아주 다르지요. 그 누구도 그분께서 가문 내의 모든 일을 전부 다 알고 계시는 게 당연하다 말씀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후에도 그는 아주 장황하고 지리한 의견을 중얼댔는데, 요약하자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고 아페토 공작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 이 일에 엮일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의 의견을 뒷받침하러 나왔다는 이들 또한 비슷한 말만을 반복해 댔다.

“아페토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 단 한 번도 이와 비슷한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었습니다. 바깥에서는 이 일과 관련하여 아페토를 향한 음해라는 말도 다수 도는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이 일의 핵심 인물인 레노어 2공자의 죽음도 너무나 공교로운 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실을 말할 입이 사라졌으니 어떤 분께서는 참으로 기쁘시겠지요.”

개중 한 사람은 대놓고 키시아르를 쳐다보며 교묘하게 비꼬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태연하게 웃었으나 그의 뒤에 서 있던 부단장들은 몹시 화가 났다.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사람 좋은 스티버가 이를 악물고 욕을 중얼거리자마자 에버가 손을 쥐락펴락하며 불길한 움직임을 보였고, 칸나의 얼굴 또한 분노로 붉어졌다.

“저런 말을 막 해도 되는 거야?”

물론 안 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지위가 낮은 법관만이 다소 난처해하는 눈빛으로 ‘해당 발언은 증언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설명만 했을 뿐이었다.

유더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 말을 한 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는 모르는 자였으나 지금부터는 아니게 될 참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아페토 가에서 일하는 이라고 했다. 유더는 그에 대한 정보를 아주 잘 기억해 두었다.

그다음에 나선 이는 이 일의 시작이 된 벨트레일 샨 아페토 전 원로사제였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유더는 바퀴 의자에 앉은 채 대기실에서 나오는 벨트레일을 순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의 그보다 훨씬 늙고 추레해진 벨트레일은 연신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보며 무어라 중얼대는 중이었다. 죄인임에도 줄에 묶이지 않고 비싼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었으나 조금도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모든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의자를 밀고 있던 평사제 한 명이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벨트레일 님께서는 보시다시피 자유롭게 증언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날의 일에 대해 물었을 때에는 발언의 방향이 언제나 일정하시지요.”

그 평사제는 키시아르가 마병단원들을 데리고 아페토 본저로 갔던 날, 벨트레일을 모셨다고 주장했다. 본저에 있는 벨트레일의 방을 지키고 있느라 직접 사건 현장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얼마나 훌륭한 원로사제였는지는 안다며 줄줄이 읊는 모습에서 한 점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이번 일로 파문되셨다고는 하나 대신전과 제국을 위하여 오랫동안 봉사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날의 일로 아끼던 조카를 잃고 자식 같은 사제들의 죽음을 목도하신 탓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게지요. 이런 분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상처입혔다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유더는 이 말을 그때 구해 온 알파 각성자들이 면전에서 직접 듣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아마 법정이고, 뭐고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벨트레일 님.”

평사제가 바퀴 의자에 앉은 벨트레일을 향해 무릎을 꿇고 물었다.

“…으…흐흐…….”

“벨트레일 님.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 그날. 그날…….”

“벨트레일 님의 결백함을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겨, 결백. 결백… 나……. 는……. 크으… 어…….”

멍하니 평사제의 말만을 따라 읊던 벨트레일이 불안한 얼굴로 침을 흘리며 발작적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러던 중 문득 키시아르를 본 그의 눈이 찢어지도록 커지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손발을 휘젓기 시작했다.

“아아악. 가, 각성자. 각성자. 괴물! 괴물!! 괴물!!”

괴물이라 반복적으로 외치는 벨트레일의 시선을 따라 모든 이들이 키시아르를 보았다. 키시아르는 팔걸이에 올린 손등 위에 턱을 괸 채 벨트레일의 발작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괴물!”

결국 벨트레일은 그 말만을 울부짖다가 도로 끌려나갔다. 재판장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침묵을 깬 이는 아페토에서 나선 대리인 중 한 명이었다.

“레노어 님께서도 생전에 이 일이 그리 크게 처벌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지 않으셨다고 반복하여 주장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벨트레일 님의 연구기록이 증거물로 제출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계약을 통하여 돈을 받고 연구에 참여하기로 한 이들을 상대로 한 일이라면 참작해 주셔야 한다 생각합니다.”

“계약이라. 증거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최대한 찾아서 가져오느라 시간이 걸렸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아페토 측에서 다량의 계약서 뭉치를 법관에게 전달했다.

“벨트레일 님은 각성자가 처음으로 발생한 2년 전부터 줄곧 그들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 하셨던 분이십니다. 각성자와 관련한 많은 사실을 밝혀내시고 명칭도 다수 지정한 뛰어난 학자셨죠. 그분께서는 엄청난 재산을 대가로 지불하며 각성자들과 연구 계약을 하셨습니다.”

“뛰어난 쓰레기였겠지.”

유더는 옆에 서 있던 칸나가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덕분에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이후에도 자신들의 죄를 줄이기 위한 아페토 가의 길고도 장황한 변명이 끝나고 나자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전통에 의하여 일정 시간이 지나면 쉬는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었기에 모래시계 한 번이 흐르는 시간 동안의 휴정이 선언되었다.

“특이사항은 역시 없었군.”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의 짧은 평 속에는 그를 음해하려 노력했던 이들에 대한 조금의 반응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미쳐버린 벨트레일을 포함하여 그 누구의 말도 키시아르에게 흠집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더는 조금 안도했다.

“그러면 나도 잠시 대기실에 들렀다 와야겠군. 유더, 뒤를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유더는 세 부단장들을 남겨두고 키시아르를 따라 왼쪽의 작은 복도로 들어섰다. 재판에 참여할 증인과 대리인들이 기다리며 쉬는 대기실이 그곳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단장님!”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여기까지…….”

“화, 황송합니다.”

데브란과 레블린이 벌떡 일어나 곧장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하르탄의 평민 각성자들과 아페토 가에서 구출된 각성자들은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유더는 그들 중 데브란의 여동생 곁에 딱 붙어 긴장된 얼굴로 서 있던 하르탄의 영주 대리, 제클리스 하르탄을 보고 조금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그도 왔을 줄이야.’

그리고 그들을 지키듯 문 가장 안쪽에 서 있던 펠레타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나단 주커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네. 안으로 들어오려는 시도가 두어 번 있었습니다만, 모두 차단했습니다.”

“아래쪽에는?”

법정 아래쪽에는 재판에는 필요하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죄인들을 수용해 두는 임시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은유한 질문을 알아들은 나단이 곧장 주군이 원하는 답을 내뱉었다.

“하르탄에서 잡아들인 이들도 모두 잘 있습니다.”

“좋아. 기대가 되는군.”

키시아르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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