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한편, 카치안 황태자가 떠올리고 있던 디아카 공작은 그 시각 측근인 뒤르망 남작과 함께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도 방에 틀어박혀 계시다지요? 정말 큰일입니다.”
뒤르망 남작이 혀를 차자 디아카 공작이 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더군. 그런 식으로 숨을 거라면 늘 하던 대로 내 뒤에나 있었으면 되었을 일을, 저질러 놓고 수습할 의지조차 없이 침묵하면 해결은 대체 누구더러 하란 말인가? 덕분에 나는 우리를 물어뜯으려 신이 난 아페토 놈들과 폐하를 동시에 상대하느라 죽겠단 말일세.”
“본래 그 나이쯤 되면 말을 아무리 잘 듣던 아이라 해도 제 능력을 과신하여 말썽을 피우게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다 우스워 보일 나이이지요.”
“그래… 그분께서도 벌써 18세 생일을 넘기셨던가.”
황태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듯 말끝을 흐린 디아카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머리가 많이 굵어지셨다고는 생각했지. 그렇다 해도 황좌에 오를 때까지는 제 위치를 잘 알고 참을성을 보일 재목이라 생각했는데, 고작 이 정도에 흔들려 경거망동한 데다 해결을 위해 나설 최소한의 뻔뻔함조차 보이지 못할 줄이야. 실망이 아주 커.”
마냥 어리게만 보고 달래려 했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군. 중얼거린 디아카 공작이 받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파이프를 물었다. 안에 채워 넣은 향초가 연기를 내며 붉게 타오르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향기가 피어올랐다.
“사고를 쳐도 하필 아페토를 건드릴 건 또 뭐란 말인가. 증거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 일로 기껏 조용해졌던 타인과 헤른마저 황태자의 자질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 곤란해.”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 되돌리겠습니까. 그래도 이리 처참히 실패하였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앞으로는 큰 교훈을 얻으실 것입니다. 공작 전하께서도 이번 일 덕분에 몰랐던 그분의 일면을 알게 되셨으니 그리 생각하면 오히려 일찍 일이 터져 다행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옳군.”
늙은 디아카 공작의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여 이번은 그분께서 제대로 숙이고 들어오도록 만들 거라네. 제 위치를 모르고 큰 꿈을 꾸신다면 현실을 알게 해 드리는 것도 내가 할 도리이니.”
“아… 역시 폐하께서 거절하실 줄 알면서도 부러 이번 일의 언급 금지 요청을 보내신 이유가 그것이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아랫것들까지 더욱 말이 많아지고 있지 않나.”
디아카 공작이 다시 한 번 파이프를 빨았다 연기를 뱉으며 낮게 웃었다.
“여태 내 뒤에 숨어 좋은 말만 듣고 패배를 겪어본 적이 없으시니 이번 기회에 아주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보게 해 드려야지.”
“하하하. 황태자 전하께서도 폐하처럼 영영 궁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 뒤르망 남작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수습을 하시려면 황태자 전하를 궁에서 한 번은 끌고 나오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하의 고견을 제게 조금만 알려주십시오.”
“흥. 뭐, 별것이 있겠나. 늘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파이프에 쌓인 재를 아름다운 그릇 위에 털어낸 디아카 공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페토 놈들은 알아서 자멸하도록 놓아두고, 황태자 전하가 저지른 일을 대신 뒤집어쓸 놈을 찾아 제물로 삼을 생각이네.”
“누구로 할지는 이미 생각해 두셨습니까?”
“다시는 이번 같은 경거망동을 저지르지 않으시려면 전하께서 직접 고르라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나?”
주름진 눈가에 교활하고 잔혹한 살기가 드러났다.
“겨우 만들었다 여긴 손발들을 제 손으로 직접 베어내 보아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구나 하는 교훈을 다신 잊지 않으시겠지.”
“과연… 현명하십니다. 하면 폐하와 펠레타 공작 쪽은 어찌 하시렵니까?”
“이번 재판에 꽤 공을 들이고 계시니 확실히 이기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겠다 제안할 생각이네.”
“그 정도로 받아들이려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증거가 너무 확실하여 질 재판이 아닌 것을요.”
“안 받아들이면 어쩔 텐가? 질 재판이 아니라지만 우리의 도움 없이 아페토를 상대로 중형 선고는 어려워. 아페토는 자식을 잃었지만 펠레타 공작은 본래 없던 체면만 조금 더 깎이고 말았을 뿐이네. 목숨과 체면을 같은 선상에 둘 순 없지. 그 정도면 충분해.”
디아카 공작의 말투는 한 나라의 황제와 그의 혈족에 대해 말한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신랄했다. 뒤르망 남작은 속이 시원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전하께서 그러하시다면 그리 될 것입니다.”
“원, 나이가 드니 아부만 느는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디아카 공작의 얼굴에는 잠시 미소가 스쳤다. 뒤르망 남작은 눈치 빠르게 그 틈을 타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 펠레타 공작이 요즈음 마병단이란 것을 만든 이래 계속 기고만장하지 않았습니까. 장례식 사건 때는 솔직히 저도 그분을 다시 볼 정도였기에 조금 걱정했었습니다.”
“그래. 이번 일로 나도 그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기는 했지. 꽤 당혹스러운 일의 연속이었으니.”
디아카 공작의 탁한 암적색 눈동자가 연기로 가득한 허공을 응시했다.
“마병단이란 것의 힘을 믿고 꽤나 기고만장해졌다지만 고작해야 평민 나부랭이들의 집합. 지금쯤 한껏 신이 나 있을 텐데 그 힘이 무너지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역시 있으셨군요.”
“힘을 믿는 자들은 힘으로 무너뜨리는 게 최고가 아니겠나.”
디아카 공작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최근 서부에서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은 자네도 들어보았겠지.”
“예. 아, 그러면……?”
무언가 깨달은 뒤르망 남작의 얼굴을 보며 디아카 공작이 느긋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미 그쪽 나라들은 난리가 났다고들 하더군. 타인 공작 또한 꽤나 애가 달은 모양이기에 소식은 찔러두었네.”
“과연……. 거절할 수 없는 도움 요청이겠군요.”
“이번에 이토록 큰 활약을 한 마병단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겠나.”
연초가 내뿜은 연기 사이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
드디어 아페토 가에서 일어난 각성자 강제 납치 및 연구와 관련한 두 번째 재판의 날이 밝았다. 4대 공작가가 이토록 큰 추문과 재판에 연루된 일은 오르 제국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일이었다.
특히나 첫 번째 재판이 사건 외부에서 일어난 일로 큰 난리가 난 끝에 강제로 폐정되었었기에 제국민들의 관심은 더욱 뜨거워진 상태였다.
과연 아페토 가는 정말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그들을 법정에 세운 장본인인 마병단의 단장 펠레타 공작이 사실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레노어 샨 아페토를 죽였다는 말은 사실일까 아닐까?
레노어의 장례식에 나타난 펠레타 공작이 직접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였는데 그 결과 드러난 진짜 범인은 황태자였다는 더욱 충격적인 소문이 흥미를 더욱 부추겼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 웅장한 제국 법정 내부를 메운 이들의 얼굴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호기심이 그러한 열기를 증명했다.
그리고 유더는 황족이 앉는 법정 오른편 상석 뒤에 부단장들과 함께 선 채 그 열기를 두 눈으로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일곱 재판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자리가 전부 차다니. 이런 일은 제국 천 년의 역사 중에서도 얼마 없었을 거야.”
칸나가 흥분과 걱정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대기실에 있을 데브란과 다른 분들이 조금 걱정이네. 긴장하지 말고 증언하셔야 할 텐데.”
“…괜찮을 거야.”
유더는 며칠 전 아페토 가에게 반드시 한 방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불타오르고 있던 데브란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첫 번째 재판 때 갑자기 중단된 일로 오히려 기운이 넘쳐 보였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두 사람은 긴장도 안 되나?”
칸나의 옆에 서 있던 술과 부단장 스티버가 긴장한 얼굴로 뺨을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나, 나는 수도에 살면서도 여기는 처음 와 봐서 너무 긴장되는데. 파티 때보다도 더 긴장이 돼. 에버도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걸 보라구.”
그의 말대로 에버는 완벽한 시립 자세로 선 채 앞만 보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누가 말을 하고 있어도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저도 당연히 긴장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말해야 풀려요. 물론 유더는… 아닌 것 같지만요.”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칸나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사실 유더 또한 이 공간에 그리 좋은 추억이 있지는 않았기에 기분이 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 생에서 세계구를 가져가려다 붙잡힌 뒤 곧장 이곳으로 끌려와 마병단 단장 자리에서 강제 해임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유더는 하얗게 질린 스티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생각하려 잠시 노력했다.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티버.”
“응?”
역효과였는지 스티버의 얼굴이 오히려 창백해졌다. 유더는 재빨리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어차피 누군가 이쪽을 본다면 단장님을 보는 것일 테니 저희에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아. 그래. 그렇지. 허허. 맞는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스티버가 크게 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긴장하지 말아야지.”
“곧 제국의 법을 수호하는 7인의 대재판관과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입장하실 것입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십시오.”
그 순간 큰 안내가 들려오며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렸다. 진실의 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큰 문이 열리며 검은 옷을 걸친 대재판관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 서자 마지막으로 흰 단장 제복을 걸친 키시아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