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말없이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카치안이 다시 몸을 돌린 건 바깥에서 끝없이 들려오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을 때였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어둡고 냉혹해 보였다. 그는 고요해진 문 쪽을 잠시 응시하다 시종을 향해 짧게 명했다.
“머리가 아프니 가서 포네그리사를 탄 냉차를 내와라.”
“전… 전하.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는데 그 독한 포네그리사를 또 드시면…….”
“……너.”
이미 의자에 걸터앉은 카치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을 불렀다.
“내가 너를 유일하게 여기 들인 이유는 같잖은 걱정이나 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하라면 해.”
“…….”
결국 시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 어제부터 황태자가 유일하게 찾았던 포네그리사 차를 내왔다. 포네그리사는 극심한 고통을 단숨에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으나 그만큼 중독적인 마약 성분도 함께 든 식물 포네사의 성분을 희석시켜 식용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물건이었다. 포네사를 기르고 유통하는 일이 엄격히 제한된 탓에 당연히도 합법이 아니었지만 귀족들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기분이 좋아지게 할 요량으로 암암리에 그것을 구해 차나 술에 타서 마셨다.
그리고 카치안 황태자 또한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포네그리사를 찾는 이들 중 하나였다. 디아카 가에서 몰래 가져다준 포네그리사를 탄 차를 단숨에 크게 들이켠 카치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곧장 효과가 올라오는지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티가 나던 얼굴 근육이 풀리며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두어 모금을 더 마신 뒤 내뱉은 카치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시종이 머리를 조아렸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네가 이전에 서부 산골짜기까지 가서 가져왔던 두둘렘 버섯을 정제한 가루 말이다.”
눈을 뜬 카치안이 찻잔을 어루만지며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의 효능을 아는 이가 귀족들 중에 있었을 리가 없는데……. 어찌 이리 빨리 그들에게 꼬리를 밟혔을까. 그날부터 몇 번을 생각했지만 아직도 답을 모르겠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펠레타 공작에게 그 독 아닌 독의 정체를 밝히고 레노어를 죽였다는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까.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식에 키시아르가 나타나 모든 상황을 뒤집어 버린 이래 카치안은 방 안에 틀어박혀 그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레노어 샨 아페토에게 보낸 편지만으로는 그걸 짐작할 요소가 없어. 파티 당일에도 아무 일도 없었지. 바보 같은 놈들 몇이 갑옷 기사를 만나 기절했던 것만 제외하면 분명 모든 일이 예상대로 잘 마무리되었었는데…….”
사실 그들 중 몇은 유더의 단추에 맞아 기절한 것이었으나 이후 나타난 갑옷 기사 때문에 모든 일이 그 탓으로 덩달아 묶였음을 카치안은 알지 못했다. 그는 찻잔 끝을 계속해서 툭툭 두드리며 입술을 짓씹다가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약 기운에 취해 이내 몸을 늘어뜨렸다. 시종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시끄럽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혀가 조금 풀린 채로도 독기 서린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시종의 손을 거칠게 털어내고 허리를 숙여 손 안에 얼굴을 묻었다. 깊이 숨을 내쉴 때마다 머리가 점점 더 멍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는 이 차만큼 편한 게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시끄러운 바깥일에서 도망쳐 껍데기 속에 숨어 사라지고 싶은 때에는.
‘너무 일찍 일을 시작해버렸나.’
무슨 생각을 해도 결국 끝은 똑같았다. 펠레타 공작을 멀리 치워두기 위해 처음으로 몸소 나설 마음을 먹었던 얼마 전 일에 대한 후회였다.
‘분명 성공할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된 이후 카치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언제나 디아카 가의 뒤에 있었다. 그를 그 자리에 세워준 게 디아카였으니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으나 사실 그보다는 디아카 공작의 거대한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디아카 공작의 뒤에 서서 언제나 모든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훗날 황제가 되었을 때 필요할 정치적 수완들을 어깨 너머로 배워나갔다.
그러나 펠레타 공작이 그 이름조차 우스운 마병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단장 자리에 올라선 이래, 변치 않으리라 믿었던 디아카 공작의 영향력이 점차 기이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붉은 돌을 회수해 오는 데 성공하고 나서부터 수도에 계속해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가진 게 많은 디아카 공작은 그 정도 일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자고 이야기했으나 카치안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황태자라는 불안한 자리 하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도 황제나 펠레타 공작이 종종 그를 짜증 나게 할 때가 있었지만 마병단이 생긴 뒤에 느끼기 시작한 기분과는 정도가 달랐다.
‘전하의 불안하신 마음을 신도 압니다. 하지만 저희가 지나치게 나서는 쪽이 오히려 빌미를 줄 기회가 될 수도 있지요.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게 정답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승리는 전하께 돌아갈 것입니다.’
알기는 무엇을 안단 말인가? 카치안에게 그 말은 발밑이 불안하지 않은 이의 방심 가득한 신중론으로만 들렸다.
결정적으로 디아카 공작이 카치안의 눈앞에서 처음으로 실패했던 축제의 그날, 소년 황태자는 내심 큰 실망감을 느꼈다. 거대해만 보이던 디아카 공작도 사실은 별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그날의 계획들은 본디 디아카 공작의 방식대로 오랫동안 준비된 것들이 아니었다. 펠레타 공작을 경계하는 카치안을 달래고자 갑작스레 만든 엉망진창인 계획이 성공할 리 없었다.
이후에도 디아카 공작의 계획은 축제 내내 계속해서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마병단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추문이 하나같이 이쪽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카치안은 우습지도 않았다.
그러나 디아카 공작은 또다시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이번 일을 토대로 삼아 다음에 더 좋은 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카치안은 결국 디아카 공작의 앞에서 참았던 불쾌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군.’
‘전하?’
‘늘 물러서기만 한다면 대체 언제, 어떻게 펠레타 공작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지? 죽은 뒤쯤에나 가능한가?’
언제나 웃으며 듣기만 하던 카치안의 말에 디아카 공작의 눈 위로 당혹이 스쳤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주름진 눈가에 떠오른 감정은 가슴이 섬뜩해질 만한 짙은 경멸과 짜증이었다.
‘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아직 어리시니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 부디 잘 생각해 주십시오. 황태자 책봉을 앞두고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전하의 손을 잡고 이 수도에 데려왔는지를 말입니다.’
순간 카치안은 제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건 그들 사이의 금기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요즘 들어서도 다른 이들은 종종 황태자 책봉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중요한 건 황제 폐하나 펠레타 공작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이 아닐지요? 늙은 신은 참으로 걱정이 되옵니다.’
창백해진 소년 황태자의 얼굴을 본 늙은 공작은 인자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런 복잡한 일에 신경을 쓰시기보다 한동안은 제왕학에만 신경을 쓰시고 바깥일에는 눈을 돌리시는 쪽이 어떠실는지요.’
늘 카치안에게 져 주던 그가 처음으로 내보인 감정을 똑똑히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가 나간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싸늘해진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다.
한 번 금기가 깨지고 나자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 사이의 감정은 점차 빠르게 상하기 시작했다. 이전이 마치 깨진 그릇을 억지로 붙이고 있었던 마냥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자라난 답답함과 분노가 카치안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디아카 가와 평생 손을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 온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지금 다시 한 번 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디아카 공작의 뒤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서 벗어날 작업을 황제가 된 후에 시작해서는 늦었다. 어차피 궁 내외적으로 점차 세력을 불려 나갈 때도 되었고, 귀족들 간의 관계도 살필 만큼 살핀 참이었다. 때마침 일어난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 그리고 아페토 공작가 사이의 사건들은 카치안의 결심에 좋은 거름이 되어주었다.
디아카 공작에게 제 말이 옳았음을 보여줄 것이다.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의 심장에 검을 꽂고 디아카와 대등한 힘을 지닌 다른 이들과 손을 잡으리라. 위험한 줄타기가 되겠지만 디아카 공작 같은 이 하나를 믿는 쪽보다는 그 편이 낫다 여겼다.
혼자만의 힘으로, 그만이 아는 경로와 정보를 사용하여 일을 꾸몄다. 버섯 또한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도 카치안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레노어 샨 아페토 그자가 동생에게 편지를 넘긴 걸 몰랐던 시점에서 예견된 실패였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아페토 가와 디아카 가에서 연락이 왔으나 카치안은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성은 만나서 무어라도 둘러대는 쪽이 나으리라 판단하였으나 한 번 야심차게 출발했다 무너진 자존심과 제대로 된 실패를 보지 못한 경험 부족에서 일어난 공포를 미성숙한 소년의 정신은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다. 디아카 공작조차 방문하지 않는 지금, 황태자는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카치안 라 오르는 그런 연약한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디아카 쪽에 몸을 낮추고 사실을 밝힌 뒤 도와 달라 말해야겠지. 아페토 가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건 앞으로 포기해야 할 테고.’
생각만으로도 뼈가 시릴 만큼 분했다. 디아카 공작도 카치안이 그러기를 바라고 직접 찾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