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단장님. 정말 연구기록을 법정에 보내셨습니까?”
“보냈지. 증거물을 재판관들이 보아야 하지 않나. 단, 1공자가 기대했던 결과물은 얻을 수 없겠지만.”
키시아르가 웃으며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답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에이셰스에게 기록을 넘겨줄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키시아르가 굳이 미끼를 대놓고 던져준 건 거기에 이미 손을 써두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었다.
“일부를 빼두시고 보내신 겁니까? 아니면…….”
“그것도 했지만 뭐… 다른 부분도 신경을 썼네.”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의미심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유더는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질문했다.
“다른 부분이라면 어떤 부분 말씀이십니까.”
“일단 실험체로 희생된 각성자들의 관찰기록을 비롯해 몇몇 부분들을 지우고, 벨트레일의 망상이 혹여나 쓸모 있을지 모른다 생각될 여지를 남겨두어 좋을 게 없으니 기록을 본 이들이 헛생각을 하지 않도록 가짜 정보를 대신 넣어두었지.”
벨트레일은 연구를 통해 그가 당초 원했던 결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겨진 각성자들의 실험기록은 지나치게 자세하여 악용될 소지가 넘쳤다. 때문에 키시아르는 그 부분을 망설임 없이 빼두었다고 설명했다.
“그 연구가 헛짓이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릴 경우 꽤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손은 써 두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추후 상황을 두고 볼 생각이네.”
이전 생에는 아페토 가의 치부가 드러날 재판이 열린 적이 없었고 레노어가 공작이 되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사라졌던 기록이지만 이번은 아니다. 재판을 통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키시아르의 비밀스레 웃는 얼굴을 마주한 유더는 어쩐지 조금도 그 이후가 걱정되지 않았다.
“1공자가 숙부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른 답을 찾기로 한다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겠으나, 과연 어떨지 모르겠군.”
자신이 찾아낸 것이 원하던 정답이 아니었으며 피로 물든 무가치한 길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욕망을 놓지 못하는 이는 많고도 많다. 유더는 벨트레일의 기록을 손에 넣을 생각에 기뻐하던 에이셰스를 떠올렸다. 아마 그는 벨트레일과 레노어의 실패를 보았으면서도 결국 같은 길을 가게 되리라.
‘그리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또다시 죽게 되겠지.’
지금쯤 벨트레일의 기록을 손에 넣을 생각에 신이 나 있을 에이셰스에게는 안된 일일지 모르나 유더는 그가 불쌍하지 않았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그 쓰레기 같은 글들을 전부 보고 골라내는 건 아무리 하룻밤에 책 십수 권을 읽고 외우는 나라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네. 정신이 오염되는 기분이었지.”
분위기를 일변할 생각인지 키시아르가 화제를 돌렸다. 유더는 에이셰스에게 닥칠 어두운 미래에서 생각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미래를 살아갈 각성자들은 단장님께 감사하게 되겠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답이었으나 어쩐지 그 말이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주었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는 웃었다.
“그리 말하면 투정을 부린 내가 부끄럽지 않나.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그렇게까지 거창한 의미를 둘 것은 아니야.”
“저 또한 거창한 의미로 드린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
여전히 소파 위로 고개를 젖힌 채 거꾸로 유더를 보고 있던 키시아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꾹 다물린 입술 아래쪽에 난 작은 상처를 그제야 발견했다. 웃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상당히 시선을 잡아끄는 위치였다.
‘아. 저게 지미가 말했던…….’
왜 치료를 하지 않고 저 상태 그대로 다녔단 말인가? 저걸 발견하지 못한 단원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분명 지미처럼 한눈에 알아챘을 터인데.
괜스레 가슴 속 어딘가가 울렁거려 가느다란 붉은 실선에서 슬쩍 눈을 피하는 순간 키시아르의 낮게 가라앉은 한숨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음……. 일할 때 사감을 끼워 넣지 않는 건 꽤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그게 참 어려워지는군.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 제대로 파악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고 싶으면서도 해서는 안 될 듯한 이율배반적인 기분에 눈을 깜박이자 키시아르가 짧게 웃음을 닮은 숨을 흘렸다.
“유더.”
“네.”
“이리 와 주겠나? 가까이.”
순간, 이전까지의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진득하게 달라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애써 지웠던 어제 일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저도 모르게 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에이셰스가 가기 직전 요청했던 차를 가지러 간 나단 주커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기척도 없었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키시아르의 바로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얼굴을 이쪽으로.”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허리를 숙이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는 쪽을 택했다. 소리 없이 몸을 낮추어 의자 곁 땅에 무릎을 대자 다가온 손이 입술 아래쪽을 더듬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예민해진 입술은 그것을 따끔한 통증으로 받아들였다.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펴기를 몇 번 반복하자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키시아르가 피식 웃었다.
“오늘 내내 이 상태로 돌아다녔나?”
“……네.”
“아팠겠군.”
“괜찮았습니다.”
괜찮았다고 답은 했으나 평소와 같은 확신은 없었다.
“굉장히 나쁜 생각을 자극하는 모습인데, 알고 있나?”
“…….”
그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키시아르 쪽에 돌려주어야 할 말이 아닐까.
유더는 제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끝을 내려다보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단장님이시야말로, 어째서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음?”
“입술 아래 상처 말입니다.”
“아. 이거 말인가.”
키시아르가 다른 한 손으로 제 입술 아래쪽을 느릿하게 건드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일 뿐인데도 마주하는 것조차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 만큼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기억하기 위해서지.”
열기를 띤 눈동자가 유더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얼…….”
“어제 그 순간을.”
순간, 키시아르의 손에 닿아 있던 입술 안쪽이 불에 덴 듯 훅 뜨거워졌다. 당혹해할 사이도 없이 뜨거운 모래를 삼킨 듯 목이 급격히 탔다. 갑작스러운 갈증에 놀란 혀 아래쪽이 부풀어 오르듯 젖어 드는 감각에 이마를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키시아르가 몸을 숙였다.
“…….”
이번의 키스는 짧았다. 그러나 뜨겁기는 어제와 매한가지였다.
“아팠나?”
“…아뇨.”
“그렇다면 한번 더 해도 괜찮겠군.”
질문에 답을 돌려준 건 실수였다. 답을 얻은 이가 다시 한 번 입술 아래쪽을 가볍게 깨물며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키시아르가 완전히 몸을 물렸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웃음 띤 눈동자를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어제는 열기에 반쯤 취해 있던 상황이었다지만 오늘은 멀쩡했는데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가 이토록 욕망에 약한 인간이었던가? 아무리 해도 키시아르의 젖은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단이 돌아오기 전에 이번에는 정말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유더는 그의 눈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결국 그 제의는 거절할 수 없었다.
***
“전하.”
카치안 황태자는 문밖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아하시는 음식을 가져왔으니 부디 귀하신 몸을 상하게 하실 일은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 전하. 겉으로는 그를 걱정하여 달려온 듯하나 그 안에 깃든 감정이 분노와 짜증에 가깝다는 것을 카치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끄러운 목소리에서 귀를 닫고 일어났다.
그의 바로 곁에 서 있던 단 한 명의 시종이 시종일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 광휘궁에서 그나마 가장 충직하다 여겨 가까이 두었던 그 눈빛도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지금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전하……. 벌써 몇 시간째입니다. 부디 식사라도 해 주시는 쪽이…….”
“너도 쫓겨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있거라.”
“…….”
카치안은 고개를 숙인 시종을 지나 전신을 볼 수 있도록 크게 만든 아름다운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이 오래된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광휘궁에서 오직 그 거울만은 다른 물건들과 달리 새 물건 티가 났다. 그것은 카치안이 황태자가 되어 이 궁으로 들어올 때 유일하게 가져온 짐이기도 했다.
카치안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황궁에 어울리는 빛나는 금발, 아름다운 꽃과 같은 얼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다운 가느다란 팔다리. 무엇 하나 화사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단 하나, 싸늘한 분노에 사로잡힌 눈을 제외하고는.
“이 거울을 준 이가 누구인지 아느냐?”
“디… 디아카 공작 전하시라 들었습니다.”
“맞다.”
거울에 비친 카치안의 입꼬리가 일그러진 채 올라갔다.
“매일 내 모습을 비추어 보며 주제를 알라는 뜻으로 보내준 물건이지.”
“……예?”
시종이 어깨를 떨며 반문했으나 카치안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