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이걸… 제게 말입니까?”
에이셰스의 반신반의하는 눈을 보며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아름다울 뿐 아무런 의도도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순간 에이셰스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리며 입을 쩍 벌린 탐욕이 드러났다.
저 버섯은 키시아르의 말마따나 아직 세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이었다. 즉 그가 방금 전에 말했던 대로 말려서 가루로 만든다면 레노어가 죽은 방식 그대로 누구에게든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이를테면 그의 아버지 아페토 공작에게도.
“하지만… 전하께서도 어렵게 구하셨을 물건을 제가 어찌 이리 쉽게 받겠습니까.”
에이셰스는 탐욕 어린 눈동자를 감추지 않은 채 일단 한 번 예의상 거절의 뜻을 밝혔다. 키시아르가 그 뜻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다정하게 대꾸했다.
“1공자가 어렵게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는데 이 정도쯤 나누어 주는 게 어려울까. 어차피 아페토에서도 곧 구할 물건을 조금 더 빨리 구한 내가 작은 호의를 베풀어 몰래 나누어 주는 것뿐이니 사양하지 말게.”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전하의 배려와 혜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에이셰스는 누구보다 우아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그 상자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미소가 자꾸만 입가로 비집고 나오려 해 참기가 힘들었다.
“죽은 레노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잘 조사하도록 이르겠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군.”
“실은 약소하지만 저 또한 오늘의 만남을 위해 가져온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래? 뭔가.”
흥미를 드러낸 키시아르의 눈앞에서 에이셰스가 곁에 서 있던 하인에게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이것입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은 물건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그는 종이에 아무 장치도 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직접 눈앞에서 봉인을 뜯고 펼쳐 보여주었다.
“레노어와 벨트레일 숙부가 각성자를 대상으로 함께 연구하기로 결정했던 당시 아버님께 보낸 요청서입니다. 연구장소로 사용할 별저와 상주 하인, 재료 수급 경로들을 비롯하여 필요한 예상 경비와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승인한다는 뜻으로 인장을 찍어주셨죠. 재판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대단하군.”
키시아르가 낮게 감탄을 표하며 종이를 집어들었다.
“어디서 손에 넣었나? 가문에서 제일 먼저 없애려 했을 텐데.”
“본래는 벨트레일 숙부가 대신전 내에 있는 본인의 방에 숨겨 두었던 물건입니다. 숙부께서 파문을 당한 뒤 그분의 방을 정리하던 도중, 우연히도 저와 연이 있는 어느 사제께서 그것을 먼저 찾아내셨죠.”
운이 좋았습니다. 에이셰스는 그저 그렇게 말했으나, 뒤에 서 있던 유더는 그 말 뒤에 숨겨져 있을 피비린내를 은은히 느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저걸 찾아내고 여태 지켜 오기까지 분명 꽤 많은 피를 흘렸겠지.’
그 종이는 아페토 공작이 레노어와 벨트레일의 연구를 대놓고 지원해 주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아버지의 뒤통수를 칠 무기를 적에게 넘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에이셰스 샨 아페토의 태연함에 뱃속이 절로 서늘해졌다.
“고맙네. 그 귀한 선물, 감사히 받지.”
키시아르는 종이를 접어 뒤로 넘겼다. 오른쪽에 시립한 나단이 아니라 유더가 서 있는 왼쪽이었다. 유더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나단을 향해 눈을 돌렸다. 주군이 저보다 유더의 힘을 더 크게 평가했다 생각해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나단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한 번 끄덕였을 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붉은 돌 매개체 사건이 정말 큰 인상을 남기긴 했나 보군.’
유더는 말없이 키시아르의 손에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건 아직 저도 확실히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혹시나 하여 말씀드립니다.”
유더가 종이를 받아들자마자 에이셰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조만간 광휘궁에 은밀히 밤손님을 보낼지도 모른다 걱정하는 말들이 가문 내부에 흐르고 있습니다.”
“밤손님을?”
“네. 아페토 가의 사람들은 대대로 성정이 불과 같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 아페토의 사람이면서, 에이셰스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이번 일로 아버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하인 여러 명의 시체가 그 방에서 은밀히 치워졌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더군요. 판단력이 많이 흐려지신 지금이라면 정말로 하실지도 모르지요. 소문일 뿐이겠지만 정말 걱정이 됩니다.”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에이셰스가 말하는 그 ‘소문’은 진짜 소문이 아닐 터였다.
‘아페토 공작이 조만간 카치안 황태자가 사는 궁에 암살자를 보낼 예정이란 정보를 이런 식으로 주는군.’
키시아르의 얼굴에 띤 미소 또한 더욱 짙어졌다.
“그것참… 몹시 걱정이 되겠어.”
“그렇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저는 앞으로 나설 수 없습니다만, 부디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대신 명료한 진실을 밝혀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꼭 그렇게 하지.”
겉으로 듣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대화였다.
‘그러면 이제 끝인가.’
선물을 하나씩 주고받고 서로의 뜻도 확인했으니 이제 일어날 줄 알았지만 에이셰스는 어쩐지 금방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물이 아니라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다는 요청을 한 뒤 계속해서 단장실 내부를 흘끔흘끔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뭔가를 찾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문득 느긋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레블린을 만나보겠나? 너무 급작스러워서 형제끼리 만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군.”
“아…….”
에이셰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가를 움찔거렸다. 레블린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질투심을 유더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뇨. 그보다는. 그…….”
눈을 굴리던 병약한 청년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공작 전하께서는 일전에 제가 보냈던 편지를 인상 깊게 보셨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랬지.”
“그때 저는 재판을 통해 벌 받을 자들이 처벌을 받는 일은 물론 필요한 과정이나, 저희 아페토에 물려 내려오는…….”
실제로 입 밖으로 내려니 무언가 꺼림칙했는지 에이셰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축복받은 피 때문에 레노어와 벨트레일 숙부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듯하다는 말을 드렸습니다. 그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네. 그 때문에 내가 압수한 연구기록을 추후 넘겨줄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던가?”
산뜻하고도 직접적인 표현에 에이셰스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명확히 주시지 않으셨지요. 혹… 오늘 답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과연 이전에 에이셰스의 편지를 보며 키시아르와 나누었던 예상 대화에서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약한 몸을 낫게 할 방법을 찾고자 애꿎은 각성자들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버렸던 벨트레일을 어리석다 비판했으나 결국 에이셰스 또한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벨트레일이 연구에 성공했더라면 애초에 지금 그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오로지 제 안위만을 생각하는 욕망 가득한 눈빛에 문득 속이 메슥거렸다.
에이셰스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만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키시아르 또한 피에 물려 내려오는 문제로 인해 지금도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유더 아일의 눈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더욱 남다르게 느껴졌다.
유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이셰스가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충분히 초조해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글쎄…… 당장 확실히 말하기는 힘들겠군. 내가 압수해 온 기록이기는 하나, 그런 큰일을 내 마음대로 결정하기란 힘들지 않겠나?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묻고서 넘어갈 수 없어. 1공자도 알지 않나.”
“압니다. 물론 압니다만… 한 가문이 오랫동안 짊어져 온 아픔의 역사를 그리 쉽게 드러내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다른 가문도 아닌 아페토가 아닙니까.”
에이셰스가 간절한 얼굴로 손을 모았다.
“전하께서는 오르 제국을 위하여 여태껏 샨 아페토의 이름을 진 이들이 얼마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 왔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가문을 배신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음에도 아픔을 지고 여기까지 온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시커먼 속내를 몰랐다면 속을 만큼 번지르르한 연기였다. 그러나 연기라면 키시아르 또한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더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이것 참……. 내가 정말 마음이 아프군.”
큰 고민에 잠긴 양 관자놀이에 손을 댄 키시아르가 숨을 길게 내쉬자 순식간에 ‘비탄에 빠진 태양신의 한숨’ 정도로 이름 붙일 만한 명화 같은 장면이 모두의 눈앞에서 완성되었다.
“1공자가 큰 희생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와 주었다는 사실이야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그 충직함을 어찌 외면하겠나.”
“그… 그렇다면…….”
에이셰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홀리지 않으려고 애써 눈에 힘을 주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재판에서 최대한 그 부분은 축소 언급되도록 설득해 보겠네. 그리고 공식적으로 기록을 건네주기는 어렵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허공을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지 않나? 증거물을 볼 수 있는 방법이 굳이 내게 넘겨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
순간 에이셰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벨트레일의 연구기록을 이미 법정에 보내두었네. 알려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알겠습니다.”
에이셰스가 기쁨에 찬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더는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을 듯했다.
‘법정에 들어간 증거물 정도는 사람을 매수하면 금방 손에 넣을 수 있겠다 생각하겠지.’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문의 눈을 피해 나온 상황이라 오래 있을 수 없기에…….”
“알고 있네.”
에이셰스는 하인과 함께 재빨리 사라졌다. 그가 요청했던 차가 아직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상관없어하는 태도가 실로 노골적이었다.
“유더. 아까 그 종이를 다시 돌려주겠나?”
에이셰스가 사라지자마자 한결 힘을 풀고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힌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처럼 장난스레 눈을 빛내는 이를 향해 종이를 내밀며 유더는 묵묵히 입을 열었다.
“단장님. 정말 연구기록을 법정에 보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