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식당을 떠나 복도를 걷는 중에도, 아래로 내려가 훈련장 쪽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어제의 기억이 부유하며 둥둥 떠다녔다.
얼마나 오랫동안 붙어 있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열망을 채운 뒤 겨우 떨어졌을 때 마주쳤던 시선 속의 열기. 무언가 더 깊은 것을 바라 이를 드러내고 가쁘게 날뛰던 호흡. 제 안에서 날뛰는 낯선 사나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은 순간 입술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의 감촉. 치료가 필요한가? 잔뜩 잠긴 목소리를 인식하기도 전에 고개를 젓자 들려왔던 작은 웃음소리. 그 순간 피부 위로 느껴지던 간질대는 숨결. 그런 기억들이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줄줄이 끌려 올라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어제 키시아르는 확실하게 그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유더는 그와 닿은 순간 느꼈던 거대하고 깊은 일체감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듯한 초현실적인 감각이었다. 단순한 자극이나 쾌감 따위를 넘어선 그 감각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금이 꿈이고 몸은 아직도 단장실 안에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머리가 마비된 것 같아.’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지만 예상했던 자책이나 혐오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역시 아무래도 머리가 그때 제대로 마비되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발아래가 붕 뜬 기분으로 흔들대며 걷던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황궁기사단 1훈련장 입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으나 오늘은 평소처럼 마병단 뒤쪽 훈련장에 가고 싶지 않아 이곳으로 왔다. 키시아르와 너무 빨리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한몫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안 오느니만 못할 테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들어갈 셈이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지금 1훈련장에는 남아도는 힘을 조절하기 어려워하는 신과 단원들이 몰려 있을 시간이다.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기껏 마음을 정돈하고 훈련장에 들어선 유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목도하고 그 자리에 다시 멈춰 서고 말았다.
“다들 좀 더 제대로 하라고!”
“너야말로 손가락 하나 못 대본 게 말이 많아!”
훈련장은 평소보다 훨씬 더 난장판이었다. 모든 단원들이 동시에 날뛰며 능력을 발산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체 강화 능력이나 무기에 기운을 싣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대다수인 신과 단원들답게 휘두르는 공격 하나하나가 훈련장 전체를 부술 듯 위력적이었지만 보호 마법이 새겨진 바닥은 파인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키시아르가 있었다. 공격하는 쪽이 아니라 당하는 쪽으로서, 유일한 표적이 된 채로.
“이 정도로 끝인가?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군.”
“으윽. 아직 아닙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가벼운 훈련복 차림에 목검 하나만을 쥔 키시아르의 웃음 띤 말에 신과 단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손에 쥔 돌을 던졌다. 던진 물체에 힘을 불어넣어 화살보다 빠르게 쏘아 보내 폭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였다.
그가 던진 돌이 푸른 기운에 휩싸인 채 눈 깜짝할 사이에 키시아르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으나, 키시아르는 맨손을 가볍게 뻗은 것만으로도 그 공격을 아주 쉽게 막아냈다.
손바닥에 부딪힌 돌이 터져 사방으로 비산하자 신과 단원들이 각기 욕을 하며 조각을 피하려 몸을 굴렸다.
“저게 터지면 우리만 고생이라고 몇 번을 말해?”
“저 미친놈 같으니! 너부터 내가 죽여 주마!”
“우리끼리 싸우는 건 그만해!”
“다른 데 한눈을 팔 정도의 정신이 아직 남아있었나 보군.”
서로 싸우는 단원들을 발견한 키시아르가 낮게 중얼거리며 발을 굴렀다. 날아드는 몇 개의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부드럽게 피하고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싶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싸우는 단원들의 앞에 도달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움직이는 속도를 조절하여 모두의 인식을 속였을 뿐이었다.
“훈련을 하라고 했지,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네.”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 내뱉은 키시아르가 양손으로 놀란 눈을 한 두 단원의 등을 툭 쳤다. 물론 보는 이의 눈에만 툭 치듯 보였을 뿐, 당한 이들이 그대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훈련장의 끝과 끝을 향해 날아가 처박힐 만큼 압도적인 힘이었다.
‘대체…….’
분명 예정된 훈련을 하고 있어야 할 이들 속에 왜 키시아르가 있으며, 이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 지친 얼굴로 누워 숨을 헐떡대는 지미가 보였다.
“지미.”
“아. 유더 형.”
유더를 발견한 지미가 땀을 닦으며 단숨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훈련 도중에 단장님이 갑자기 같이 하자고 오셨어요. 몸을 움직인 지 오래되어서 찌뿌둥하다고, 모두가 달려들어도 좋으니까 공격해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고 웃음을 터트렸던 단원들은 이내 몇 명이 달려들어도 금세 가볍게 쓰러트리는 단장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여태 키시아르는 기초 훈련 참여 외에는 모두의 앞에서 제대로 된 능력 발휘를 한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리 강한 능력을 지닌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을 하고 있던 단원 여럿이 몸소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는 기회를 얻었다.
“유더 형은 아직 쉬는 기간이죠?”
“응.”
“아쉬워요. 형이랑 단장님 중에 누가 더 강한지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보고 싶었어?”
“당연하죠!”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한 지미가 문득 유더의 얼굴을 새삼스레 훑었다.
“음? 그런데 형. 입술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
데브란에 이어 지미까지 저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입술이 부르튼 게 상당히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조금, 피곤해서.”
“으음. 하긴…….”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년이 이내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단장님도 오늘 입술 아래쪽에 상처가 있으시던데, 계절이 바뀌어가는 중이라 그런가 봐요.”
그럼 이만 쉴 만큼 쉬었으니 도로 가 보겠다며 바닥을 구르던 연습용 검을 쥔 소년은 곁에 서 있는 유더의 눈빛을 스치고 지나간 드문 당혹의 감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또 가려고?”
“그럼요. 단장님처럼 강한 분한테 전력을 다해 달려들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단 말이에요. 끝장을 볼 때까지 할 거예요!”
그 외침을 들었는지 멀리 있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지미와 그 뒤의 유더를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더의 눈가가 움찔 굳었으나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키시아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손을 흔들며 눈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달려든 지미의 공격을 피하느라 뒤로 몸을 날리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뿐이었으나 유더 아일의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조용해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변하지 않았다.’
고요해진 가슴 속에서 조용히 목소리가 울렸다.
키시아르의 태도는 어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유더를 향해 웃었고 눈빛 속에는 약간의 거짓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유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발현 사고 후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 메마른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소리 없이 절망하고 있던 그 사내가 정말 방금 전 머리 위에 빛을 두른 듯 웃었던 그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이전 생과는 정말로 모든 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확실히 실감되었다.
‘…그래.’
어제의 그 일은 사고가 아니라 온전한 그와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졌다.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해방감이 가슴 안쪽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유더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닮은 미소를 짧게 흘렸다가는 이내 지웠다.
“간만에 몸을 푸니 개운하군.”
한참 뒤 키시아르가 등 뒤에 널브러진 단원들을 뒤로하고 어깨를 움직이며 유더의 곁으로 다가왔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단원들과는 달리 그는 이마에 땀이 약간 배어 나온 것 외에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훈련을 봐주러 왔을 텐데 할 일이 없어져 어떻게 하나. 미안하군.”
어제의 열기는 간곳없이 깔끔한 태도에 유더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단장님께서 몸소 나서주신 덕분에 훈련보다 더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겁니다. 다만…….”
유더는 잠시 그들의 말을 들을 만한 단원이 있는지 곁눈질로 파악한 후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렇게 힘을 쓰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각성자로서 키시아르가 지닌 능력은 다른 이들처럼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이전 생에 그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유더조차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직 햇병아리인 단원들이 어찌 상대하겠는가.
다만 능력을 사용했다가 이전에 마법을 썼을 때처럼 또 몸이 상할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괜찮네. 주기가 다가오고 있을 때는 평소보다 더 써야 해. 힘을 가만히 놀려두는 쪽이 오히려 독이 되니까.”
“그렇군요. 주제넘은 걱정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주제넘다니. 많이 걱정해 주게. 사실 걱정받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자네가 해 주니 그것도 꽤 기분이 좋군.”
남들이 듣고 있지 않아 다행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키시아르가 이내 앞서 걸어가며 손짓을 했다.
“같이 돌아가겠나. 저들이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야.”
유더는 단원들을 흘긋 돌아보고는 약간 미안한 마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훈련장을 나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눈빛으로 그들을 흘금대며 못본 척 멀찌감치 사라져 가는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보였다.
‘인사조차 안 하다니.’
황족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단의 일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건방진 태도였음에도 키시아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장이 묵인하는데 보좌가 무어라 할 수 없는 법이나, 유더는 그들의 면면을 슬쩍 기억해 두었다.
‘언젠가는 저 녀석들을 전부 손봐주고 키시아르의 그림자만 봐도 달려와 인사하게 만들어야겠지.’
“공작님.”
그로부터 얼마 걷지 않았을 때, 나단 주커만이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장 키시아르를 향해 온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묵묵히 인사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급히 단장실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아페토 1공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