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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00화 (200/805)

200화

“그렇다면 다른 무언가가 두려운 게로군.”

겨우 더 나아가 문고리 앞에 다다랐으나 귓속으로 파고드는 뜻밖의 말에 또다시 발이 붙잡혔다. 유더는 고개를 돌릴 뻔한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히 그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끌림이 뒤를 돌아보라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괜찮네. 나는 전에도 말했듯 벽을 부수는 걸 좋아하고…….”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이 느껴졌다. 그를 피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발이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뒤에 키시아르가 멈추어 섰다.

“확신에 이르기까지는 각기 다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유더는 창에서 들어온 빛을 통해 그의 긴 그림자가 제 그림자를 덮어버린 모습을 보았다. 어두운 청색 문 위에 어린 두 개의 그림자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처럼 엉긴 채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광경이 이상할 정도로 외설적이었다. 앞은 문, 뒤는 키시아르. 사이에 갇힌 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유더는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떴다.

이건 그저 2성 발현 때 서로 미친 영향이 지나치게 많았던 탓에 생겨난 충동의 연장선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깨끗이 해소될 테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또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느끼는 이 떨림과 열기도 나중이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터였다.

‘중요한 건 앞으로 해야 할 일이지, 이런 게 아니야.’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마음속에서 뱀 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나, 유더 아일?

키시아르는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방금 전 확실하게 표했다. 본래도 능수능란하게 목표를 조이고 풀며 바라던 바를 기어이 이루는 데에는 천재적이던 사람이다. 그런 이가 계속해서 밀어붙인다면 과연 유더 아일은 끝까지 밀어내고 거부할 수 있을까.

‘……못 하겠지.’

답은 아주 간단하게 나왔다.

당장 도망치는 건 가능하다. 여태까지도 계속 그런 식으로 피해 왔으니까. 그러나 키시아르를 피해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다시 마주했을 때는 이전보다 훨씬 더한 이끌림이 징벌처럼 내리꽂히고는 했다.

이미 느껴버린 불이 꺼지지 않는 한 이 충동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본능이 단호하게 판단했다.

‘너무 쉽게만 생각했어.’

유더는 키시아르를 지키기 위해 곁에 서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전 생의 감정이 다 희미해진 덕에 다시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다시 만난 남자는 어렴풋한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생생하고 인간적이었으며, 빠져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자신 아닌 타인을 향해 이토록 벅찬 감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유더는 시간을 되돌려 그를 다시 만났을 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일깨운 감정들은 하나같이 유더 아일에게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었다.

둘 중 누구도 발정기가 아니고, 2성 발현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는 이 순간은 다른 이들과 있을 때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애써 인지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모든 열망이 순식간에 까뒤집혀 새빨간 민낯을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언제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는 분명 제 육신을,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걸 상대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우리가 맞닿을 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침묵을 지키는 유더의 어깨 옆으로 다가온 손이 생각의 맥을 끊듯 부드럽게 문을 짚었다.

“나는 가끔 자네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져.”

숨결이 목 뒤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문 위로 겹쳐진 그림자가 뭉그러졌다.

“숨통이 트이고,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해방감을 느끼지. 달콤하고 기분 좋은 감각이야.”

유더는 제 어깨에 기댄 키시아르의 머리칼이 드러난 목 뒤쪽을 간지럽히는 감각을 어딘지 모르게 멀게 느끼며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보여주어도 괜찮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다음이 기대돼. 그리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욕심이 나 목이 마르지.”

“…….”

“이것도 나만이 느낀 거라 말할 텐가?”

나에게 매혹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유더는 닫힌 문과 그 위를 짚은 손을 노려보듯 바라보던 눈에 힘을 풀었다. 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차라리 그가 원하는 게 몸만이라고, 그저 본능에 진 충동일 뿐이라고 이전 생처럼 온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면 나았을까.

이런 말을 듣고서 어떻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간신히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던 머리에 또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돌아봐. 지금 뒤를 돌아봐. 보고 싶겠지. 저토록 매혹적인 것에 닿을 기회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 충동이 끊임없이 속살대며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간신히 힘겹게 내뱉은 말에 어깨에 기댄 머리 무게가 조금 더 묵직해졌다. 유더는 그 무게를 견디며 아주 작고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도…….”

“…….”

“어렵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나가 보게.”

명령이 아닌 짧은 한 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열기를 띠고 속삭였다.

“지금 당장 확신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간다면 곧바로 놓아줄 테니까. 하지만 만약 자네가 지금 뒤를 돌아본다면.”

문 위를 짚은 키시아르의 손가락 위로 힘이 꾹 들어갔다. 낮은 목소리가 살살 꾀듯 귓가를 덮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나도 내 확신에 따라 입을 맞출 거야.”

충격적인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본 건 놀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을 내뱉은 키시아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깨닫지도 못한 사이 고개가 돌아갔고, 그 순간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미리 예고했던 대로 곧장 덮쳐눌렀다는 것뿐이었다.

아.

희미한 탄성이 머리를 울리고는 그대로 사그라졌다.

끓어오른 침묵 속에서 머릿속이 희어졌다 다시 되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더는 키시아르의 한 손에 허리를 끌어안긴 채 문과 그 사이에 갇혀 키스를 받고 있었다.

‘뜨거워.’

겹쳐진 입술이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내쉰 숨도, 마신 숨도 모두 눈앞의 거대한 뱀 같은 사내가 빼앗아갔다. 뒤섞인 열기가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으나 그런 생각도 잠시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내려온 입술 안에 빨려들어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그와 입맞춘 적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모르겠다. 언제나 가슴 속을 어지럽히던 이전 생의 고통들이 지금은 단 하나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그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손과 등 뒤에 닿은 딱딱한 문의 감각, 마침내 원하던 것을 얻은 양, 깊은 기쁨으로 사납게 웃고 있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서 상대 못지않게 새카만 열망으로 가득 찬 채 목을 끌어안고 허기를 채우느라 여념이 없는 제 얼굴뿐이었다.

***

“이봐, 유더! 정신 차려.”

날카로운 부름에 고개를 든 유더는 막 제가 수프 그릇 속에 자연스럽게 놓을 뻔했던 물컵을 도로 건져내 제자리에 놓았다.

“어제 잠을 못 잤어? 왜 그래.”

밥을 먹으러 온 식당에서 모처럼 마주친 데브란이 별일이 다 있다는 눈빛으로 의심스레 유더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잠깐 뭘 좀 생각하느라.”

“입가가 엄청 부르텄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

유더는 대답 대신 손을 올려 입가를 문질러 보았다. 과연 따끔거리는 통증이 약하게 느껴졌다.

“피곤하면 다른 녀석들 훈련을 봐 줄 필요 없으니까 좀 쉬지 그래. 안 그래도 넌 너무 일 중독자야. 세상에 발현이 끝나고 나서 2주 동안 쉴 수 있는 기회를 누가 너처럼 보내겠어?”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건 정말이었다. 하지만 데브란에게 차마 입술이 부르튼 이유를 말할 수 없었으므로 유더는 말없이 수프를 떠 삼켰다. 입 안도 평소에 비해 훨씬 예민해진 듯 곳곳에서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모든 낯선 감각이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했기에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그는 결국 평소에 비해 훨씬 적은 양만을 먹은 채 식사를 끝냈다.

“정말로 의료부에 안 갈 거야?”

“안 가도 돼.”

데브란의 걱정을 묵살하며 고개를 젓자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역시… 이유는 하나뿐이겠군.”

“…….”

“아페토 놈들과의 재판 때문에 그러는 거면 너무 걱정 말라고. 수도까지 올라온 우리 아버지와 데르밀라도 멀쩡한데 우리가 긴장해서야 쓰겠어? 안 그런 척 보여도 역시 너도 정이 많구나.”

혹시 데브란이 무언가 알아차렸나 싶었으나 역시 아니었다. 전혀 다른 말을 자신있게 내뱉은 데브란은 곧 다시 열릴 두 번째 재판을 앞두고 키시아르의 부름을 받아 수도에 올라와 있다는 하르탄 사람들과 가족 이야기를 쉴새없이 떠들며 유더의 등을 두드렸다.

“첫 번째 때는 다들 엄청나게 긴장했었지. 그런데 한번 파투가 나는 꼴을 보고 나니까 다들 분해서 오히려 기운이 난다고 하더라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 있었던 일들을 남김없이 증언할 거라고 난리들이야.”

“……그래. 다행이네.”

“단장님 덕이지. 그 많은 사람들이 다른 놈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푹 쉴 수 있는 숙소로 4벽의 유서 깊은 저택을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분이 그분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첫 번째 재판이 있던 날, 유더는 발현 때문에 황궁에 머물고 있었기에 증인을 서기 위해 올라온 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데브란의 반응을 보면 키시아르가 알아서 신변 보호 및 재판 준비를 다 해 둔 모양이었다.

“아페토 2공자 놈이 죽었다 해도 우린 하나도 안 잊었어. 반드시 그놈들이 지는 꼴을 보고 말 거야.”

그러니까 너도 기운을 내라고! 초점이 빗나간 위로를 남긴 데브란이 기세 등등한 발걸음으로 식당을 떠나 사라졌다. 유더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맑았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단원들의 훈련 소리는 평화로웠다.

오늘 여기서 평소와 같지 않은 것은 오직 유더 아일밖에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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