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내뱉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키시아르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대체 왜 그런 대답을 해서 이런 일을 겪는가 싶은 자책감이 슬그머니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
“흠?”
키시아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케인이든, 이논이든 다른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 단장님은 단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이논? 아, 그 약사의 이름이었던가.”
화제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네.”
“이름을 그리 부르다니 정말 친한가 보군. 그러고 보니 그 약사와는 어떻게 맺어진 친분관계지? 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았나?”
지금 막 상대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전부 듣고 나서 이런 질문을 듣는 건 아무리 유더 아일이라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키시아르가 벽을 무너뜨리는 만큼 자신은 반대로 새로운 벽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상황이 새삼 인식되었던 탓이었다.
이러니 어떻게든 거리를 유지했어야 했는데.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최대한 표정의 변화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이전에 단 밖에서 도움을 조금 받게 되어 알던 사이였습니다.”
“도움을?”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아니, 그거야말로 중요한 사실이 아닌가? 내 보좌가 도움을 받았다는데. 관심이 가니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게.”
화제를 돌리려던 노력은 곧바로 실패했다. 유더는 짧은 침묵 속에서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수없이 고민했다. 아주 거짓을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온전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이논이 들어온 걸 알자마자 미리 알아서 보고해 두었으면 좋았으리라는 후회가 뒤늦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쩔 수 없군.’
가장 쉬운 것은 거짓과 진실을 섞는 것이다. 유더는 지금의 이논이 아닌 이전 생의 그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어쩌다 조금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만나 치료를 받게 되면서 생긴 인연입니다.”
키시아르가 의외의 말에 놀란 듯 침묵했다.
“생면부지의 저를 망설임 없이 도와준 사람이라 이후 감사를 표하기 위해 몇 번 찾아갔습니다. 단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좀 놀랐습니다만… 저 때문에 이논의 능력이나 배경을 의심하시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과연.”
키시아르가 팔걸이에 올린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인연이라 내가 그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그리 경계하는가.”
그 짧은 사이 긴장했던 기색을 읽어냈나. 유더가 답하지 못하고 몸을 살짝 굳히자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느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약사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할 만큼 조사한 뒤에 들이도록 결정했으니 새삼 의심하지는 않아. 상대에 관계없이 베푸는 선행과 혜안으로 평소에도 7벽 내에서 유명했던 이더군. 오랫동안 가장 가난한 이들의 곁에서 지내왔고 말이네.”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논의 이야기가 낯설었다. 이전 생에는 서로 접점이 없던 이들이 서로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 가게까지 가지고 있는 이가 왜 우리 단에 갑자기 들어올 마음을 먹었나 했는데…. 역시 자네와의 연 때문이었나.”
방향은 조금 다른 추측이었으나 원인만은 정확했다. 이논이 유더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요량으로 들어왔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키시아르의 날카로운 감에 놀라움을 넘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으나 유더는 계속해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건…….”
“아니.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이다음에는 또 무슨 말이 올까. 뭔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고 답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은밀한 긴장감을 깨트리는 웃음이 갑자기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 갑자기 정말로 질투하게 될 것 같잖나.”
“예?”
“정말로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이야. 관심 있는 이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마음 아니겠나?”
긴장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조금 섭섭하기도 하군. 이토록 관심을 보이고 문을 열어두어도 내 마음을 영 믿는 것 같지가 않다니. 이 정도로도 안 된다면 뭘 더 해야 하나.”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더 안 해주셔도 됩니다. 믿습니다.”
“믿는다고?”
“네.”
“그러면 내 관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해줄 수 있겠나?”
이번 질문은 이논에 대해 의심을 표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때보다 더욱 강력했다. 유더는 시선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상를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연스러운 관심이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타인의 오해를 살 것 같으니 다른 이들 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자제해 주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뿐인가?”
“보내주시는 신뢰의 무게에 답하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돌려드리지 못하는 듯 느껴지시는 듯해 고민이 됩니다.”
키시아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미심쩍게 올렸다.
“그것뿐?”
“뭘 더 답해드려야 합니까.”
“나는 자네도 나를 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 부분은?”
순간적으로 가슴 안쪽이 울렁거렸다. 유더는 과거의 제가 키시아르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떠올렸던 며칠 전의 감정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으나 이내 다시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존경합니다. 단장님께서 이루실 뜻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키시아르의 눈빛이 더욱 묘해졌다. 잠시 후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등을 소파에 깊이 파묻었다.
“유더 아일.”
“네.”
“장갑을 벗고 손을 이쪽으로 주어 보겠나.”
뜬금없는 명령에 유더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손등의 반점은 오늘 훈련 도중 날아온 눈먼 불꽃을 막으려 힘을 썼음에도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키시아르가 드러난 손등을 살피며 나직이 물었다.
“오늘 힘을 쓴 적이 있었나?”
“아까 훈련 도중 날아온 공격을 막느라 조금 사용했습니다.”
“통증은?”
“없습니다.”
“좋아. 다행이군.”
키시아르가 손을 내밀어 유더의 손가락 끝을 붙잡아 이끌었다. 길고 매끄러운 큰 손 안에 빈틈없이 감긴 오른손이 어딘지 모르게 근질거렸다.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곧장 치료를 하려나 싶었으나 키시아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맞닿은 손만 점점 더 저릿해져 갔다. 유더는 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움츠리다 조심스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제 반응을 지켜보듯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아…….’
순간 손끝에서부터 저릿함이 번지며 몸이 떨렸다. 키시아르와 닿은 손이 뜨거워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각이 머리를 사로잡았다.
‘또 그때처럼.’
마차 안에서 그와 손이 닿았던 그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열기와 충동이 마주친 시선 속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유혹당해 이끌려 그대로 빨려들어 갈 듯한 흡입력에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키시아르의 얼굴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적인 마음에 휩싸였다.
금빛 속눈썹. 그 아래의 투명한 불꽃 같은 눈동자. 슬며시 찌푸린 미간을 덮은 머리칼. 무언가를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듯 살짝 벌린 입술.
이상하게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가 허기질 만큼 느끼는 달콤한 열망을. 그 또한 유더와 같은, 어쩌면 더 큰 감정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가 이대로 끌어들여 품에 넣고 싶어 하는 열망의 목표는, 다름 아닌.
“놓아주십시오.”
거기까지 멍하니 느낀 뒤 유더는 헛숨을 삼키며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빼냈다.
‘대체 이건.’
호흡이 가빴다. 숨이 그렇게 변한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키시아르는 아무 말 없이 떨어져 나간, 빈 손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가?”
“예?”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느냐는 말이야.”
“…….”
없었다고 부정하기에는 이미 같은 감각을 느꼈다는 사실을 안다. 두려운 것이 없던 유더 아일이 처음으로 먼저 뿌리치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기이한 이끌림이었다.
달콤하게 홀려 그대로 깊이 맞대고 싶은 이 감각이 당연하다 속삭이는 듯한, 그 지옥의 불처럼 뜨거운 열기라니.
먼저 뿌리쳤음에도 도로 차가워진 손이 아쉬웠다. 제가 아쉬움을 느꼈다는 사실 또한 낯설기 그지없었다.
“무슨 답을 바라시는 겁니까.”
혼란스러운 중얼거림이 입 사이로 흘러나갔다.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키시아르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게 이끌리고 있지 않나.”
쿵. 마치 발현했던 날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유더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대로 가려고? 치료도 안 했는데.”
“루산 사제님께 받겠습니다.”
“뭐. 그래도 되겠지만.”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장갑을 집어 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도로 끼고 가야지.”
“…….”
유더는 말없이 그의 손에서 장갑을 받아들었다. 도로 장갑을 끼는 동안 키시아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맹수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유더는 말없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더.”
그러나 그가 몇 발짝을 옮기기도 전, 등 뒤에서 느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주인의 목줄에 붙잡힌 개처럼 저절로 멈추었다.
“혹 내가 아직 그때처럼 두려운가?”
“……아뇨.”
유더는 망설임 끝에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