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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98화 (198/805)

198화

‘라 오르’의 성을 지닌 공작은 키시아르까지 총 열 명. 이논은 그 중 6인이 최근 300년 사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키시아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죽을 때까지 세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으며, 초상화도 남은 게 얼마 없다는 정보를 듣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생각이 무엇이었던가?

사실 황실 혈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참 불경한 생각을 했었다.

“짐작하겠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피’와 관련된 아주 오래된 문제라네.”

그리고 그 불경한 추측이 지금 막 본인의 입으로 현실이 되었다.

“유더. 오르 제국을 건국하신 초대 황제 폐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태어날 때부터 태양신의 피를 이은 자로서 축복을 받으셨으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소드마스터이시고, 수많은 영웅들의 친구이셨던…….”

유더가 낮은 목소리로 건국절마다 들었던 초대 황제에 대한 설명을 읊자 키시아르가 중간에 손을 저어 “그래.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 하고 말을 끊었다.

“그분께서는 신력과 검기를 쓸 수 있으셨네. 그리고 황후께서는 마법사셨지. 두 분은 슬하에 다섯 자식을 두셨고, 그 중 네 분이 현 4공작가의 시조가 되었네. 즉 근원은 같다는 뜻이야.”

뒤이어 키시아르의 설명이 계속해서 담담히 이어져 갔다.

한 부모에게서 갈라져 나온 형제로 시작한 황가와 4공작가는 본래 서로 혼맥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몇 대가 흐르고 나자 상황이 점차 변화해 갔다.

누가 먼저 금기를 깨고 손을 내밀 필요성을 느꼈는지는 이제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가 예나 지금이나 혼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점차 옅어져 가던 혈통을 되살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초대 황제의 피를 이은 자손들끼리의 결합에서는 점차 옅어져 가던 우수한 혈통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자식이 태어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통치를 위하여 변치 않는 ‘신의 혈통’을 보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왔던 황가는 이후 계속해서 4대 공작가 내의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필요로 인해 시작된 일은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곧 법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가와 공작가들의 사이가 나쁜 때라 해도 황제의 배우자는 언제나 그 안에서 결정되었다. 황제의 배우자를 배출하는 일은 공작가들에게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공작가 사람들은 다른 귀족가 사람들과의 결혼이 보다 자유로웠으나, 그래도 4공작가 내에서 혼맥을 잇는 일이 더 잦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짙어진 피는 오랜 세월이 흐르며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갈구했던 신의 피로 인해 괴물이 태어나기 시작한 게지.”

아무렇지 않게 괴물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키시아르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800년 전쯤, 아주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던 어느 황자가 황태자 책봉을 앞두고 죽었네. 역사는 궁정마법사 청사에서 일어난 불운한 폭발 사고라 기록했으나, 사실은 지나치게 팽창한 능력을 이기지 못한 그릇이 단숨에 깨져나간 것뿐이었어. 육신이 터져 시체조차 찾지 못한 끔찍한 죽음이었네.”

황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낸 원인에 몹시 당혹했다. 그러나 신의 피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행히 지나치게 강한 능력을 타고난 탓에 몸이 버티지 못해 죽은 그런 불운한 이는 이후 오랫동안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그런 이들이 나타나면, 황가는 치부를 감추기 위하여 서둘러 합법적으로 계승권을 박탈하고 멀리 보낼 수 있는 허울뿐인 공작 작위를 주어 멀리 보냈다. 최초의 ‘라 오르’ 성을 지닌 공작 작위는 어느 모자라지만 권력 욕심은 많았던 황자를 사랑한 아버지 황제가 자식을 위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로서 만든 자리였다지만 이후는 달랐다.

쫓겨난 이들은 한순간 잃어버린 권력과 가족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그릇이 점차 깨져나가는 고통에 시달리다 채 30이 되기 전 모두 죽었다. 하나같이 생명력이 한계까지 빨려나간 뒤 한계에 달했을 때 몸에 든 모든 힘이 폭발하는 끔찍한 죽음이었다.

“그런 식으로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황궁에 두거나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곳에 둘 수 없었겠지. 안전을 위해서라도.”

냉혹하지만 몇 안 되는 실패작들보다는 살아갈 이들을 보호하는 게 더욱 중요했으리라. 진실은 역사에 기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덮였다.

당연히도 대가 거듭되면 될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만 할 뿐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300년 전쯤부터는 심각성을 깨달은 황가가 점차 최대한 공작가 방계 출신들을 배우자로 들이기 시작했으나 ‘라 오르’의 이름을 지닌 채 공작이 된 황자들 외에도 많은 황자와 황제들이 잇따라 의문의 단명을 했다.

한편 황가의 손이 점차 귀해지자 4대 공작가는 문득 황실의 피를 이은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그때부터 공작가를 비롯한 귀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황가에 반목하기 시작했다. 황가가 사라지면 다음 황실 혈통은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욕심에 모두가 눈이 멀었다.

결국 이번 대에 이르러 케일루사 황제의 그릇에 금이 가며 불임이 되었다는 사실이 공교롭게도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사건이 일어나며 그 물밑 전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카치안을 황태자로 세우는 데 성공한 디아카 공작가가 승자가 되면서 표면적으로 갈등은 사그라졌으나, 이번에는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각성자가 된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큼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 이는 아마 없을 거라 장담해도 좋네. 황실 족보를 비롯한 구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을 찾았지. 결국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으나, 살아서 서른을 앞두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키시아르의 냉소적이고도 담담한 설명 속에서 유더는 오랫동안 그가 해 왔을 처절한 노력의 일부를 엿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미 제 몸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노력해 온 지독한 집념가였다.

우연한 기회에 각성자가 되어 마병단을 만들었을 뿐인 놀기 좋아하는 펠레타 공작의 뒤에 숨겨진 야망가의 얼굴. 스러져 갈 몸을 이끌고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그 거대한 의지의 원천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키시아르가 이전 생에도 이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키시아르가 말없이 그를 밀어내고 반역 의혹을 부정하지 않던 순간들에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갑작스레 찾아와 밤을 보내던 날들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무어라 한 마디라도 더 물어볼 수 있었을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유더 아일은 새삼 다시 되돌아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나치게 이상하여 뱃속이 뒤틀리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될 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유더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림을 내뱉자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미소가 맺혔다.

“다 들어 놓고 이제사 말인가?”

“다 들었으니 드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유더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쉬며 어렵게 덧붙였다.

“믿어주시는 건… 물론 감사합니다만, 단장님의 불편함을 참으시면서까지 제게 그리 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전에는 필요로 하여 이논에게 조사 요청까지 했던 이야기를 손쉽게 본인에게 직접 들었는데 전혀 속 시원하거나 기껍지 않다니.

이야기 내내 키시아르가 짓고 있던 눈빛 때문이었을까. 냉소에 가득 찬 채 혐오를 숨기지 못하던 눈빛을 짓게 만든 게 제 질문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여서였을지도 몰랐다.

“이런. 내가 불편해 보였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장난스러운 대꾸 뒤로 사람을 홀릴 듯한 시선이 따라왔다.

“그저 앞일을 위해 필요한 정보야, 정보. 괜찮겠다고 판단했으니 했을 뿐이야. 믿음이란 본래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이지. 이토록 매력적인 존재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옛 이야기쯤이 대수겠나?”

유더의 표정이 괴상해지는 광경을 보았을 텐데도 키시아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라도 자네에 대해 알게 된다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그런 말은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자 나긋한 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 누구 말인가?”

누가 되었든, 아무튼 키시아르에게 매력적인 존재라는 말을 듣는 이가 저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입을 다문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지금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건 자네뿐인데 진심이 통하지 않았다니 슬프군.”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2성 발현의 영향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그랬다면 이 대화는 지금쯤 침대에서 이루어졌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네.”

그러니 이건 이전부터 이어져 온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연속이라는 뜻이야.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대꾸를 한 키시아르가 입을 다문 유더를 향해 눈웃음을 흘렸다.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처음부터 그랬어. 그렇지 않나?”

“…….”

“이토록 차갑고 매력적인 보좌에 비해 나는 장점이 얼굴밖에 없는 단장이니 솔직하기라도 해야지.”

“그때 그 말은 실언이었습니다.”

“실언이라. 실은 내가 잘생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는 뜻인가?”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만드십니까, 그게 아니라.”

“이거 섭섭하군. 대체 내가 아니면 누구를 잘생겼다 생각할 수 있지? 우리 단의 살아있는 장미 가케인 볼룬발트인가? 아니면 자네와 친해 보인다던 의료부 약사? 어느 쪽이든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거야. 신중하게 대답하게.”

이논에 대해서는 언제 들은 것이며, 가케인의 듣도 보도 못한 새 별명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큰 뱀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으며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잘생기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누가?”

“……단장님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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