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시종 중 한 사람이 그의 명으로 먼 땅에서 그것을 정제하여 수도로 들여왔다는 사실을 확인했지.”197화
“그렇다면…….”
유더의 시선을 마주한 키시아르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외의 증거들도 함께 확보했으니 아페토 1공자가 연락해 올 때 함께 흘려줄 생각이네. 황태자는 더 이상 아페토 가에 손을 댈 수 없을 거야. 디아카 가와 아페토 가 사이에도 깊은 골이 생기겠지.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지는 기분이 어떨지 기대되는군.”
“다행입니다.”
그 말은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불쑥 흘러나갔다. 유더는 조금 당혹하였으나, 이내 눈을 내리깔며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수확철 축제의 마지막 날 파티에서 수많은 수군거림 속에 홀로 서 있던 키시아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그보다 더욱 빛나는 당당함을 두르고 있었음에도 그를 둘러싼 악의와 소문 속에서 키시아르는 외로워 보였다.
그가 그 정도 일로 타격을 입을 사람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쏟아지는 폭풍우를 혼자서 맞이하는 듯 보였던 그 날의 흉터투성이 거목 같은 뒷모습을 유더는 그 이후로도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쪽에서 카치안 황태자가 독을 구해온 출처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발현을 비롯해 정신없이 일이 몰아치는 사이 한발 늦어버렸다. 그러나 가슴은 오히려 뜨거워졌다. 키시아르는 제가 당한 악의와 굴욕을 더 이상 전처럼 웃어넘기지만은 않을 것임을 이번 일로 분명히, 그리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보여줄 것이었다.
이미 레노어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던 일만으로도 에이셰스 샨 아페토든, 아페토 공작이든 황태자와 디아카 가를 이전처럼 믿기란 불가능해진 상태다. 디아카 가가 아무리 이번 일은 황태자가 홀로 저지른 일이라 주장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이가 얼마나 될까. 황태자와 디아카 가 사이에 생길 균열 또한 더욱 커질 터였다.
거기에 이번 증거가 더해진다면 적어도 아페토 가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들이 서로를 도우려 손을 잡을 일은 없다 확신해도 좋으리라.
‘키시아르와 황제가 그 틈을 타 에이셰스를 이용하여 재판 결과를 유리하게 몰아갈 테고.’
무너진 아페토를 에이셰스가 원하는 대로 빨리 가져간다 한들, 과연 그가 바라는 대로 일이 돌아갈지는 장담할 수 없는 법이었다. 호랑이의 발톱과 이를 빼놓은 뒤 손쉽게 목줄기를 물어뜯으려 눈을 빛내고 있는 이가 키시아르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게다가 이번 생에서 에이셰스가 공작이 된다 해도 그의 건강상태가 전과 다르지 않다면, 아마 이번에도…….’
키시아르가 에이셰스를 어떻게 사냥하려 생각 중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유더는 에이셰스가 1년 내로 병사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그토록 철저히 암살 여부를 조사했음에도 그가 병사했다는 결과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이번에는 레노어가 더 일찍 죽었다지만 에이셰스는 아마 승자의 여유를 오래 만끽하기 어려우리라.
어쩌면 에이셰스 샨 아페토가 이미 확고부동한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아버지를 무너뜨리고 더 빨리 가문을 차지하려 발버둥 치는 이유 중 하나에는 그의 몸 상태도 포함돼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장님께서는 아페토 1공자가 언제쯤 찾아오리라 생각하십니까?”
“곧 오겠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키시아르의 확신 어린 얼굴 위로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 같은 여유가 어른거렸다.
“이 버섯은 그때 그에게 줄 좋은 선물이 될 테고.”
키시아르가 버섯이 담긴 상자 뚜껑을 도로 닫았다. 마른 먼지처럼 코끝을 간질이던 버섯 냄새도 곧 사라졌다.
“그가 온다면 이번에는 유더 자네도 내 뒤에 있어야 할 테니 기대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키시아르가 뒤이어 천천히 두 번째 상자 뚜껑 위에 손을 얹었다. 첫 번째 때와는 달리 약간 망설이는 듯한 기색에 유더는 의아함을 느꼈다.
‘펠레타 기사들에게 받아온 게 첫 번째로 열었던 상자 안의 버섯이라면 두 번째는 궁정마법사 청사에서 받아온 것일 텐데.’
“이거라네.”
드디어 뚜껑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마음을 정한 듯 꽉 잡고 비틀어 열었다. 드러난 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유리병 안에서 찰랑이는 붉은색 물약이었다.
‘……약?’
“보시다시피, 약이지.”
유더의 의문 어린 눈빛에 답하듯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어디에 사용하실 약이십니까?”
“내가 마셔야 할 약이야.”
“예?”
“이전에 했던 그릇 이야기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지.”
키시아르의 손가락 끝이 약병을 건드렸다. 무심히 가라앉은 눈 위로 일순 지독한 권태와 혐오감이 번갈아 어렸다.
“한 몸을 차지한 상반된 기운들을 아무리 평소에 조금씩 빼 주며 잘 관리한다 해도, 인간의 육신이란 살아있는 한 변화를 멈출 수 없는 법.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그릇 안에 담긴 기운이 넘쳐흐를 것처럼 팽창하게 된다네. 아무리 단단히 준비해도 겨울이 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는 것과 매한가지야.”
“팽창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전에 말했듯 내버려 두면 육신을 지탱하는 그릇이 깨져. 한번에 소모하려 해도 마찬가지로 깨지지만.”
죽는다는 말을 돌려서 짧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완전히 넘쳐흐르기 전에 강제로 힘을 발산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이 약을 주기를 정해 마신다네.”
내 경우 각성 전에는 3달에 한 번꼴이었지.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약병을 손 위에 올렸다. 안에서 출렁이는 물색은 피보다 옅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길해 보였다.
“각성 이후로는 힘이 뒤엉켜 넘친다 해도 내가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제대로 빼 주지 않으면 위험해. 나보다는 주변이 다칠 수 있겠더군.”
무엇이 위험한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유더는 어떤지 그가 생략한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폭주 비슷한 상태에 빠지는 건가?’
키시아르처럼 여러 개의 힘을 지닌 이는 아니라도, 각성자들 중에도 간혹 몸이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과도하게 쓰다가 폭주해 죽는 경우가 있었다. 살아나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능력의 발전을 얻었으나 버티지 못하면 결과는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상태가 되는 것뿐이었다.
이번에 칸나가 깨어나지 못할까 계속 걱정했던 이유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유더의 짐작에 확신을 주는 얼굴로 키시아르가 무표정하게 제 손 안의 물약을 내려다보았다.
“각성 이후로 이걸 가져온 건 두 번째야. 어찌 될지 모르니 한동안은 자네도 조심하게. 나단을 제외하고 내 곁에 가장 자주 있어야 할 위치니까.”
오늘 그가 유더를 불러 말하려 했던 진짜 본론이 아무래도 이것이었던 듯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복잡한 생각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모실 때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주커만 경에게 여쭈겠습니다.”
“그러게. 자네가 물으면 뭐든 답해 두라 일렀으니까.”
그의 답에서 유더에게 얕은 벽조차 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느껴졌다. 아랫사람을 곁에 두기 위해 제 쪽에서 먼저 신뢰를 주겠다 나서는 이가 대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이러니 나단 주커만이 나를 경계할 수밖에 없겠지.’
유더는 울렁대는 감각을 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단장님께서는 그러면… 그 약만 잘 드시면 앞으로도 계속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은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군.”
‘지금은’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과거에는 약을 마셔도 그리 소용이 없었다는 뜻인가. 묘한 불안감의 씨앗을 내포한 말에 고개를 기울이자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튼 골치 아픈 몸이야. 뭐든 지나쳐도 독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나? 힘이 너무 넘쳐흘러 버티지 못하는 게 문제라니.”
“…….”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괜찮네. 때를 맞추어 계속 힘을 발산하고, 부담이 될지 안 될지 계산해가며 억누르는 데에는 이미 지겨울 만큼 익숙해졌으니까. 사실 나는 줄곧 운이 좋았던 편이었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그러고 보니 키시아르가 황제는 이미 그릇에 금이 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키시아르도 이전에는 그릇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생각했으나 각성자가 된 이후 괜찮아졌다고 말했었다.
‘그가 각성자가 되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유더는 문득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멈칫 입술을 다물었다. 그간 제가 제대로 연결지어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일시에 죽 이어지는 기이한 감각에 머릿속에 싸늘해졌다.
황제와 키시아르가 겪은 동일한 증상. 같은 문제. 그릇. 황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궁정마법사청. 그의 손에 쥔 약.
그리고 이논이 이전에 찾아내 보여주었던 황실의 묘한 정보들.
유더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키시아르의 손에 쥔 약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키시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뭔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
“…죄송합니다. 혹 황실에 대한 다소 불경한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해 보게.”
가벼운 허락이 떨어졌다. 유더를 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는 마치 그가 무슨 질문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평온해 보였다.
“혹 이런 문제를 겪으신 분이… 단장님과 폐하뿐이십니까?”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니.”
“…….”
“유더 아일. 아페토 가에 물려 내려온다던 ‘축복받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나?”
이전에 아페토 가에 갔을 때 레블린 샨 아페토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대대로 병약한 아이들이 태어나며, 그런 아이들을 오히려 축복받았다 일컫는다던 다소 기묘했던 이야기를 꺼낸 키시아르의 입가에 더욱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내겐 익숙한 이야기였어. 그 비슷한 것을 황실에서는 ‘라 오르’의 성을 남긴 채 공작 작위를 내리는 황자들로 표현하지.”
일순 라 오르의 성을 지닌 공작들에 대한 정보가 유더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펼쳐져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