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96화 (196/805)

196화

“단장님.”

어딘가 외출했다 돌아온 듯 그들의 뒤편으로 막 사라지는 마차 한 대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유더의 옆에 있던 선즈와 에몬도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손을 뻗어 제국군식 경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을 뵙습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으나 선즈와 에몬은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키시아르만큼 높은 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건 처음일 테니 당연했다. 다른 귀족들의 앞이었다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역정을 낼 만한 상황이었으나 키시아르도, 그의 곁을 지키는 나단도 인내심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이들이었다.

결국 이어지는 침묵에 더욱 겁을 먹은 두 사내가 쭈뼛대며 고개를 완전히 들고 나서야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군인가 본데… 어디 소속이지?”

“나… 남부군 굴칸 지방 소속 선즈라고 합니다!”

“남부군 굴칸 지방 소속 에몬입니다!”

남부군이라는 말에 그들이 유더와 함께 있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키시아르가 시선을 살짝 돌렸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두 사내의 앞으로 나섰다.

“이전에 친분이 생겼던 분들입니다. 이번에 축제 때문에 치안병으로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바쁘셨을 텐데도 굴칸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만나고 싶다 찾아와 주신 좋은 분들이시죠.”

“오. 역시 그랬군. 그렇다면 자네들도 각성자인가.”

“네, 넵. 그렇습니다!”

선즈가 여태까지 중 가장 군기가 바짝 들어간 어투로 대답했다.

“무슨 능력을 지녔지?”

“미흡하지만 투시 능력을 지녔습니다. 옆의 에몬은 불꽃을 아주 빠르게 많이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순간 키시아르의 눈이 다시 한 번 흥미롭게 반짝였다.

“둘 모두 귀한 능력을 지녔군. 장차 제국군의 큰 기둥들이 되겠어.”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키시아르의 칭찬에 발을 맞춘 유더의 태연한 맞장구를 들은 선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목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상대가 키시아르가 아니었다면 반했다고 보아도 될 법한 모습이었다. 에몬 또한 침착했던 모습은 간 곳 없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지노 장군과 제국군 내의 각성자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 대륙 정체가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자네들과 같은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장군 또한 동의하더군.”

“아, 자, 장군님께서 말씀이십니까!”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말이라 잔뜩 얼어붙은 선즈와 에몬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듯했으나 유더는 아니었다.

‘역시.’

키시아르가 지노 장군에게 각성자 병사들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 상황을 바꾼 게 틀림없는 듯했다.

“그래… 그러면 훌륭한 능력을 지닌 용감한 병사들을 언젠가 또 좋은 일로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 돌아갈 모양이었던 듯한데 부지 바깥까지 안내받지 않아도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힘껏 대답한 선즈가 숨을 헐떡이며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 오늘 정말… 감사했고, 다, 다음에…….”

“네. 다음에 또 뵙죠. 아까 드렸던 제 말은 언제든 유효하니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담담한 대답을 돌려준 유더를 대단하다는 듯 쳐다본 두 사내가 이내 그러마고 대꾸하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꽁지가 빠지도록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자들이군. 저들과는 회수 작전 때 만났나?”

“네. 남부군 내에서 각성자 병사들의 처우가 갑자기 달라졌다고 하던데, 혹 단장님께서 손을 쓰셨습니까?”

“나야 자네 말을 듣고 나서 지노 장군에게 몇 마디 의논한 것밖에 없지. 내가 군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나.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잘 되었군.”

의뭉스레 대꾸한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슬쩍 미래의 계획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지노 장군이 남부군 내에도 마병단처럼 각성자를 모은 부대를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던데 말이지. 어쩌면 장차 마병단과 남부군 각성자 병사들이 협업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기왕 만들어둔 연은 잘 이어두게.”

“예.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역시 키시아르 역시 유더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움직였던 것이다. 마주친 시선 속에 서로를 향한 흡족함과 감탄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유더를 향해 눈을 휘어 웃은 키시아르가 자연스럽게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왔다.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이리 손발이 잘 맞으니 내가 정말 보좌를 잘 두었어.”

“감사한 말씀이지만 세 번은 안 당합니다.”

유더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기 전 슬쩍 뒤로 한 발짝 물러나 피했다.

“이런. 아쉽군.”

빈 손을 내려다 본 키시아르가 이내 몸을 돌려 숙소 건물 입구 안쪽으로 들어섰다. 나단 주커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유더는 그가 여태 손에 들고 있던 상자 두 개를 그제야 발견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 다녀오신 겁니까?”

“펠레타 기사들을 만나신 뒤 궁정마법사 청사에 다녀왔습니다.”

키시아르 대신 나단이 담담히 답해 주었다.

“그래. 받아올 게 좀 있어서 말이야.”

키시아르가 말을 보탰으나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다. 펠레타 기사단의 기사들을 마병단으로 부르지 않고 키시아르가 직접 나가 받아온 물건이라면 뭔지는 몰라도 몹시 기밀을 요하는 물건일 터다. 거기에 궁정마법사 청사라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짐작되지 않았다.

“뭔지 궁금한가?”

“예.”

“아니라고 한번 사양조차 안 하는 점이 자네답군.”

무엇이 우스운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린 키시아르가 손짓을 하여 유더를 가까이 불렀다.

“따라오게. 어차피 불러서 말하려 했으니.”

키시아르는 단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망토를 벗어 나단 주커만에게 건넸다.

“나단. 정리한 뒤 나가서 아까 시킨 일부터 처리해.”

“알겠습니다.”

나단이 들고 온 상자들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놓고 나간 뒤 키시아르가 깊이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가볍게 움직여 근육을 푸는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는 내비치지 않았던 미약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일찍부터 나갔다 왔더니 이제 좀 편해지는군. 오늘부터 시작한다던 훈련 진행은 어떤가. 잘 되고 있나?”

“네. 아직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자네가 단체 훈련에 참여하는 건 언제부터 할 생각이지?”

“규칙대로라면… 2주 뒤입니다.”

2성 발현은 모두 끝났고 몸도 다 나았으나 유더가 오늘 단체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키시아르가 미리 만들어 발표했던 단내 규칙 때문이었다. 규칙에 따르면 발현한 단원은 이후 2주간은 격렬한 훈련 및 임무에 참여할 수 없다는 부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한동안은 훈련이 계획대로 잘 돌아가는지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며 수정할 부분은 수정할 생각이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조금 아쉽기는 했다. 유더의 아쉬운 기색을 읽었는지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규칙을 만들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함께 노력해 준 법학자들에게 감사해야겠어.”

“…….”

“아무튼 잘 돌아가고 있다니 다행이군. 앞으로 나는 아페토 가의 재판과, 거기서 파생된 일들로 단 내에 한동안 신경을 쓰기 어려울 테니 자네가 부단장들과 열심히 해 주게.”

“예.”

그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오늘 아침만 해도 단원들이 아페토 가의 파행된 재판이 3일 뒤 다시 열리게 되었다는 말을 얼마나 열심히 떠들었던가. 그들 덕분에 유더는 키시아르가 아페토 2공자 레노어를 죽였다는 소문이 이제 황태자에 대한 소문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문에 대해 떠들던 단원들은 키시아르의 결백을 믿고 있었기에 황태자에게 분개하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아직 바깥 의견이 모두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면 그 상자들 안에 든 것도 그 일과 관련하여 받아오신 겁니까?”

“그래. 음… 하나는 그렇지.”

묘한 대답을 한 키시아르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작고 단단한 나무 상자들로 향했다. 그가 손을 뻗어 오른쪽에 있는 흰 상자의 뚜껑을 열자 텁텁한 먼지 냄새가 순식간에 코 끝에 훅 끼쳤다.

“이건……?”

“이게 바로 자네가 레노어 샨 아페토의 시체와 그의 편지에서 찾아냈던 그 독의 원료야.”

첫 번째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은 다름아닌 말린 하얀 버섯 뭉치였다.

“확인해 보니 이 버섯은 수도와 그 근처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는다더군. 자네 말대로 평민들이 가끔 독약 아닌 약으로나 알음알음 쓰다 보니 제대로 채취해 정제된 형태로 반입해 온 경우가 거의 없었어.”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열린 상자 겉을 만지작거렸다.

“황태자가 어디서 그 독을 얻었는지 추적하기 위해 그간 펠레타 기사들과 정보원들이 꽤 애를 썼다네. 이게 바로 그 결과지.”

유더는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버섯을 자세히 살폈다.

“추적에 성공하신 겁니까.”

“꽤 교묘했지만… 그래. 꼬리를 찾아냈네.”

키시아르의 붉은 눈이 서늘한 빛을 띠고 가늘어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