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흥분을 억누르려 노력하고 있기는 했으나 선즈의 눈빛에서는 감출 수 없는 고양감이 느껴졌다.
“저와 에몬 외에도 그때 산맥에서 2년간 임무를 함께 했던 각성자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이번에 뽑혀 올라왔더군요. 저희를 뽑은 남부군 담당자가 능력을 보고 결정했다고 확실히 말한 건 아니지만 그게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겠죠. 그러니까… 유더, 당신의 말이 옳았단 말입니다!”
유더는 이전에 그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곧 더 높은 곳에서, 혹은 제국이 그들의 힘을 필요로 할 테니 발전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 결과가 이리 빨리 나타날 줄이야. 말한 유더조차 놀라울 따름이었다.
“위에서 여러분의 능력을 알고 뽑았다는 뜻입니까?”
“당신들이 돌아간 후 우리들도 임무를 끝내고 본래 머물던 지방으로 모두 흩어졌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노 장군님께서 갑자기 남부군 일반 병사들 모두의 신체검사를 예년보다 빠르게 시행하라 명하시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제 능력이 무엇인지 상부에 밝혔는데 그분들이 굉장히 놀라 하셨습니다. 에몬. 너도 봤지?”
선즈의 말에 뒤이어 에몬 또한 입을 열었다.
“맞아. 그 이후 각성한 병사들의 월급이 좀 더 오르고, 다른 병사들과 달리 능력만을 따로 훈련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졌죠. 그때부터 당신 말대로 뭔가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이전에 보이던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태도가 한결 누그러진 것도 바로 그래서였던 모양이었다.
“저희가 듣기로는 지노 장군님께서 갑자기 각성자 병사들에 대한 처우를 바꾸신 이유에 펠레타 공작님과 마병단의 영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수도에 와서도 마병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는지 몰라요.”
“그러셨습니까?”
“그럼요. 이번에 저희를 수도로 부른 상부에서도 여러분에 대해 언급하시며 저희의 능력도 마병단에 못지않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번 내비치시더군요. 그게 다 마병단을 통해 각성자의 힘이 증명된 덕 아니겠습니까.”
유더를 보는 선즈의 눈이 동경과 호의로 반짝였다.
“이번 임무를 잘 끝내고 돌아가면 큰 보상이 주어질 거라 하셨는데, 어쩌면… 드디어 저희에게도 진급 기회가 온 걸지도 모르죠.”
“정말입니까?”
보상이라는 말에 유더는 내심 놀랐다. 그들의 말대로 진급 기회가 주어졌다 해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전 생처럼 군에서 특수부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었다.
‘이전 생과 달리 지노 보델리 장군이 있는 상황에서 각성자 병사들의 처우가 개선되고 있으니 특수부가 또 생긴다 해도 그때처럼 되지는 않겠지만…….’
“뭐. 진급이 보상일 거란 추측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선즈와 저는 그렇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에몬이 히죽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자랑 같기는 하지만… 당신을 만난 이후 선즈도 나도 꽤 노력했거든요. 임무를 하면서 상부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결과도 여러 번 냈죠. 그래서 보상에 대한 기대도 큽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마치 거짓 같았다. 유더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잘된 일이군요. 그러면… 마병단에 오신 김에 얼굴만 보고 가시기는 아쉬우실 테니 훈련하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시고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저희야 감사하지만 훈련 내용은 극비사항이 아닌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선즈와 에몬이 조심스레 반문했다.
“어차피 단체로 하는 기본 훈련만 하고 있을 시간이니 딱히 극비라 할 것도 없습니다. 단장님께서도 이 정도는 허락해 주실 겁니다.”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선즈와 에몬은 이후에도 군에서 각성자로서 큰 역할을 해 줄 가능성이 컸다. 이미 유더에게 충분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경험을 제공해 주어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마침 오늘이 새로 바꾼 훈련을 시행하는 첫날입니다. 가시죠.”
두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유더를 따라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들은 방을 나서 숙소 뒤쪽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젠장! 불이 또 꺼졌어!”
“악! 너 대체 언제쯤 되어야 강약 조절을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못 피했으면 죽었다고!”
“30초? 그것도 유지라고 하는 거냐? 너, 대체 마병단엔 어떻게 들어왔어?”
그들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본 모습은 평소의 몇 배는 되는 단원들이 모여 훈련장 바닥을 어지럽게 나뒹굴며 온갖 죽는소리와 욕설을 내뱉는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건물과 땅이 무너지지 않는 게 용하다 싶을 만한 난리법석과 큰 소리가 난무하는 훈련장을 본 선즈와 에몬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 이게 훈련……? 패싸움이 아니라……?”
“안 말리셔도 됩니까……?”
“싸우는 게 아니라 대련 훈련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약점을 지닌 이들끼리 묶어 실전처럼 훈련시키는 게 목적이죠.”
유더는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설명해 주었다.
“한쪽은 강약 조절은 잘 하나 오랫동안 유지를 못 하는 이들이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능력 유지는 잘 하지만 강약 조절을 못 하는 이들입니다. 대련을 해서 이긴 쪽이…… 아.”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눈먼 불꽃이 날아들었기에 유더는 곧장 손을 뻗어 물의 장막을 폈다.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물의 벽에 부딪힌 불꽃은 이내 부서져 사라졌다.
“음.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긴 쪽이 오늘 저녁 식사 때 특식을 먹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냥 그뿐인가요?”
불꽃에 맞는 줄 알고 얼굴을 가렸던 선즈가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많은 분들이 지금… 밥을 좀 더 잘 먹겠다는 이유로 이렇게 위험하고 격렬한 훈련을……?”
“별것 아닌 보상 같겠지만 그런 식으로 달성하기 쉬워 보이면서도 확실한 목적이 주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하다 보면 어느새 진심으로 열중하게 되니까요.”
어차피 해야 하는 훈련이다. 유더의 경험상 능력을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전처럼 진심으로 몸이 위협을 느낄 만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했다.
처음에는 그저 특식 정도야 안 먹어도 그만이라 생각하던 이들도 한번 분위기가 정착되면 거기에 목숨이라도 걸 듯 열중하게 된다. 거기에 패배해도 혼자 책임을 지면 그만인 개인 훈련이 아니라 팀 전체가 승패를 함께하는 팀전이 되고 나면 집중도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훈련도 하고, 이후의 임무에 필요한 동료애도 올릴 수 있을 테니 좋지.’
첫날이라 설렁설렁 움직이는 이들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다들 진심으로 대련하고 있어 보이니 다행이었다.
“대… 대단하네요.”
선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 다른 곳도 가 보시죠.”
이후에도 그들은 주변에 배치된 다른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는 단원들을 짧게 살펴보았다.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가 진심을 다해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모습은 한결같았다. 내심 흡족한 유더와 달리 선즈와 에몬의 눈빛에서는 점차 혼이 빠져나갔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이 되어 다시 숙소 앞으로 돌아왔을 때 두 사내는 각각 골똘히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말이 없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말들이 없으시군요.”
“아… 아뇨. 아닙니다. 생각보다 훨씬 무섭… 아니, 체계적이라 놀랐을 뿐이었어요.”
유더의 질문에 선즈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후 그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희도 나름대로 동료 녀석들과 함께 훈련방법을 고안한답시고 했었는데, 그래 봤자 몬스터 처리 임무 한 번을 다녀오는 게 더 얻는 게 많은 듯하다는 의견이 대세였죠. 그런데 오늘 마병단의 훈련을 보니 굳이 그렇게 위험을 자초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기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아 보였지만요…….”
선즈의 말에 에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정말 쉽지 않아 보였지.”
“쉬운 훈련을 어떻게 훈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더는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잘랐다.
“현재 자리를 잡고 있는 다른 기사단이나 마법사들의 몇 배는 더 훈련해야죠.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각성자들이 설 자리를 만들려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테니…….”
생각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던 선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유더. 정말 큰 경험을 얻었습니다.”
“아닙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다시 연락 주십시오.”
유더는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느냐는 의문을 담은 듯한 두 남자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속한 곳은 달라도 같은 각성자 아닙니까. 제국 내에서 각성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서만 잘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장님께서도 마병단의 입단식 날 자신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라 말씀하셨죠.”
키시아르가 들으면 무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그랬군요. 자유를 위해…….”
선즈와 에몬이 멍하니 마병단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병단에 그런 큰 뜻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감동적이군요…….”
“음? 못 보던 이들이군. 누구인가?”
그러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좋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유더는 선즈와 에몬의 놀란 표정을 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단복 위에 망토를 걸친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과 함께 막 걸어오고 있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