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누구도 내게 여태까지 지닌 힘을 사용해 보라 권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힘을 사용하라 권한 이가 없었던 건 그의 몸 때문일까.
유더는 이전에 들었던 그릇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린 뒤 잠시 너무 무모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가 조금 자책했다.
“몸을 다치시면서까지 하시기를 바란 건 아닙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사실은 꽤 기분이 좋아.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어서.”
정말 오랜만이거든. 중얼거리며 내뻗은 키시아르의 긴 손가락이 제왕의 검흔 위쪽에 남겨진 이름 없는 기사들의 무수한 검흔을 쓸었다. 팻말이 붙어 있는 유명한 소드마스터들의 검흔과 달리,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의 흔적은 이름 없이 긁힌 자국 정도로 취급받으며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럴 줄 알면서도 그들이 거기에 검흔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 예전에… 어린 시절에는 꽤 분했던 때도 있었지. 나도 인간인데 지닌 힘이 있음에도 무조건 물러서서 감추고 살아야 한다는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아무에게도 기대받지 못하는 삶이 된다는 건, 나조차 나에게 생존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야. 납득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네.”
기대받지 못하는 삶. 그것이 그저 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키시아르 라 오르가 펠레타 공작이 되어 살아와야 했던 삶의 궤적 전반을 꿰뚫는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고 싶다는 당연한 본능을 누르고, 짓누르고, 또 내리누르면서 살아오느라 지독한 억제와 인내심에 익숙해진 맹수의 새빨간 눈동자가 희미하게 풍화된 검흔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자네를 볼 때면 아직까지 나도 내 주변도 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돼.”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사그라진 뒤 그의 시선이 유더의 얼굴로 향했다.
“그렇기에 자네가 필요해. 유더 아일.”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게 더 많은 걸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자네는 분명 알고 있겠지.”
“…….”
“이전에는 그저 궁금했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 이상을 보고 싶군. 어떻게 하면 될까.”
“저는…….”
그저 멍청한 짓들을 저지르다 죽어 다시 돌아온 죄인일 뿐, 그의 눈빛 안에 깃든 저 강렬한 감정을 받을 만큼 대단한 자가 아니다. 유더는 먹먹하게 짓눌러 오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미 단장님의 보좌입니다. 제게 명령을 내리시면 그만인데, 그 이상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명령만으로는 안 되는 것.”
키시아르가 조용히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창백한 뺨 위를 가볍게 쓸어넘긴 손끝이 고개를 숙인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시선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이 마주친 시선이 영문을 알 수 없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마법으로 가렸던 평범한 갈색 눈동자 위로 문득 매혹적인 붉은색이 배어 나왔다.
닿은 피부가 기이하게도 점점 뜨거워졌다. 열기에 이끌리듯 전율을 느끼며 숨을 가늘게 내쉬자, 문득 턱을 붙잡은 손끝에 약간 아플 정도로 힘이 꾹 들어갔다.
‘아…….’
통증에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손이 도로 떨어진 뒤였다.
‘방금. 뭐였지.’
그 기이하게 이끌리는 듯한 감각은 대체.
“그래. 원하던 것은 보여주겠네.”
그때, 제왕의 검흔 쪽을 향해 몸을 돌린 키시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대를 받으면 부응해 주어야 하는 법이니. 한번 해 보지.”
“예?”
“검흔 말이네.”
“정말이십니까?”
참으로 뒤늦게 돌아온 답에 놀라 반문한 유더는 이내 방금 전 느꼈던 기묘한 감각을 잊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고.”
검흔을 남기는 데 쓸 만한 목검이 없거든. 중얼거리며 키시아르가 비어 있는 허리춤을 가볍게 쳐 보여주었다.
“아페토 가와의 재판을 마무리 짓는 대로 어차피 신검에 대해 발표할 생각이었으니, 그때 분명히 보여주겠네.”
신검 오르. 오랫동안 키시아르의 집무실에 보관만 되어 있었던 그 검을 떠올리며 유더는 순간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신검에 대해서라면…….”
“주인이 누구인지 밝힐 때가 왔다는 뜻이지. 슬슬 때가 되었으니.”
“괜찮으시겠습니까?”
신검의 주인이 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는 그가 신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노리는지 느낄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일은 여태까지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했던 키시아르가 단숨에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고한 방법이 될 것임에 확실했다.
“재판이 우리의 뜻대로 마무리된다면 디아카 공작과 카치안 황태자가 본격적으로 나서게 될 테니 지금까지처럼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는 맞서기 힘들어. 이건 미리 계획된 일이었네.”
방심하지 않게 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한 카드로 여태까지 신검의 주인임을 밝히는 일을 미뤄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든 돕겠습니다.”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 위로 또다시 언제 심각했느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일단 산책을 마무리하지 않겠나? 우린 아직 절반도 걷지 않았는데.”
“……정말로 이 긴 벽을 다 돌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여기까지 와서 행운을 거머쥘 기회를 놓치고 싶나?”
“미신이라고 말씀하신 건 단장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항의는 이번에도 가볍게 묵살되었다. 유더는 즐거워 보이는 키시아르와 나란히 벽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휴식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마치고 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 휴식은 즐거웠나?”
“……다음에는 저 혼자 알아서 잘 쉴 테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마음에 안 들었다니 다음엔 더 노력해야겠군.”
뭘 노력한다는 말인가. 묻기조차 겁이 났다. 눈을 가늘게 내리뜨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더욱 기분이 가라앉을 따름이었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잘 자고, 내일 보지.”
유더의 앞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린 키시아르가 단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사라졌다.
‘…방심하지 말라는 게 이런 뜻인가?’
아무래도 그는 저번 이후로 이 장난에 재미가 들린 게 분명했다. 유더는 잠시 가만히 서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상한 하루였다. 이전 생의 유더 아일에게 그 자신이 키시아르와 함께 허름한 술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다니며 온갖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처음에 여기에 올 때만 해도 키시아르 라 오르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는데.’
분명히 처음에는 그랬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거리감이 바뀐 걸까. 이제는 대놓고 아이 취급을 하듯 저리 장난을 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스스로가 조금 멍청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때 그 시선은… 정말 뭐였는지 모르겠군.’
제왕의 검흔이 새겨진 돌벽 앞에서 마주쳤던 시선이 점차 진하게 물들어가던 때 느꼈던 기이한 그 감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너무나 짧게 사라져 제대로 느낀 게 맞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그때 느꼈던 뜨거운 전율만은 희미하게 아직 뇌리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것도 벨트레일의 연구에 나왔던 2성 발현자들간의 이끌림이었을까. 유더는 제 턱 아래를 스스로 문질러 보았다. 물론 이전과 같은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놀라운 방문객이 마병단을 찾았다.
“여기에 마병단 분들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유더라는 이름을 가진 단원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큰 소리를 내며 찾아온 제국군 병사 차림의 사내들을 보고 놀란 이들이 유더를 찾아와 방문객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병단 숙소 입구로 나간 유더는 몇 달 전 붉은 돌 회수 작전 때 만났었던 제국군 병사, 선즈와 에몬을 보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선즈.”
“유더. 오랜만입니다!”
투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선즈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서글서글한 웃음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에몬 씨도 오셨군요.”
“에몬이라고 불러요. 씨는 무슨. 닭살 돋는군요. 아무튼 잘 지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에몬이 코끝을 찡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유더는 그들을 데리고 제 방으로 향했다. 야외나 휴게실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렇지 않아도 몰려든 호기심 어린 눈들을 피하기가 어려울 듯해서였다.
“마실 거라도 드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군요. 죄송합니다.”
“뭘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건 저희들인데요, 뭐.”
선즈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오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 저희도 축제 기간 동안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인력이었거든요. 돌아가기 전에 꼭 유더를 다시 보고 싶어서 물어물어 찾아왔죠.”
선즈의 말에 유더는 상당히 놀랐다. 그들이 축제 내내 수도에 와 있었던 제국군 병력 중 하나였을 줄이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상상조차 못 했었다.
“몰랐습니다. 오신 줄 알았더라면 한번 찾아뵈었을 텐데요.”
“상호 바쁘지 않았습니까. 에몬이랑 저도 따로 다른 곳에 소속되어 있었거든요. 저는 5벽 쪽, 에몬은 6벽 쪽. 혹시 모를 명소 파괴 사태를 방지하려고 파견된 거라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셨군요.”
유더의 대답을 들은 선즈가 문득 씩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말이죠. 이거 자체가 대단한 거거든요. 아시겠어요? 지방군이었던 저희가 수도를 지키는 임시 치안병으로 뽑혔다는 것 자체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