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남부식치고는 그리 기름지지 않지?”
키시아르가 유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걸었다.
“네. 맛있군요.”
“잘 먹으니 보기 좋군. 모자라면 더 시킬 테니 많이 먹게.”
그렇게 말한 키시아르가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껍질째 튀긴 콩을 집어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주변의 평민들과 비교해도 어색함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후 한동안 말없이 고기와 튀김을 먹고 술을 마셨다. 뱃속이 어느 정도 차고 나서 고개를 든 유더는 맞은편에 앉은 키시아르가 턱을 괸 채 옆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세 명의 사내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년은 북부에서 물건을 좀 떼올까 하는데…….”
“은퇴자금을 다 모으면 나도 이런 가게나 낼까 싶어. 아내와 상의를 해 보아야겠지만 말이야…….”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이 그나마…….”
서로 일관된 주제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화는 계속 이어지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나도 재미있을 게 없어 보이는 이야기였으나 키시아르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계속해서 술을 삼켰다.
그는 대체 무엇이 그리 재미있을까.
단순히 평소 대할 일이 없는 평민들을 구경하는 일 자체가 흥미로울 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취하게 만들지 못하는 맥주를 절반 정도 마시고 있었을 때 사내들이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값을 치르고 술집을 나갔다. 키시아르의 시선도 도로 유더를 향해 돌아왔다.
“아무래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인데.”
“…아닙니다.”
“뭐. 이상하게 여겨도 어쩔 수 없지. 나는 저런 대화를 듣는 걸 상당히 좋아하거든.”
“좋아하신다고요?”
아니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반문하고 말았다. 키시아르는 매너 있게도 그러한 모순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모르는 이들이 평화롭게 대화 나누는 모습만큼 흥미로운 게 없다네.”
모르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 그게 재미있을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저는… 죄송하지만 단장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심스레 대꾸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술을 먹고 나누는 이야기만큼 민심의 이면을 파악하기 좋은 건 없지 않겠나. 아까와 같이 평화로운 말들을 듣다 보면 아무리 위에서 골치 아픈 짓거리들을 해도 누군가는 아직 황제 폐하가 다스리는 이 나라를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확인받는 기분이 든다네.”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키시아르가 물방울이 맺힌 잔 위로 손가락 끝을 슥 문질렀다.
“뭐, 스스로 원하여 시작한 일이면서도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매번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격이니 유치한 일이기는 하지.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으로 듣고 있다는 건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이야.”
다른 이들은 내가 단순히 평민들에게 흥미가 넘쳐 그러는 줄 알거든. 그렇게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이내 웃음을 거두고 마지막 남은 맥주를 모두 마셔 없앴다. 유더는 뼈 몇 조각만을 남겨두고 거의 사라진 뒷다리 구이를 내려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게는… 비밀이 아니시고 말입니까?”
“자네가 이 말을 듣는다고 나를 위선자라 욕할 텐가? 아니면 유치하다 싫어할 텐가.”
당연히 둘 다 아니었다. 유더의 침묵을 본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바로 그래서다’라고 답하는 듯한 부드러운 만족감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더 드실 거요?”
그때, 다른 테이블을 모두 치우고 다가온 산적 같은 인상의 사내가 음식이 거의 사라진 둘의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키시아르가 어떻게 선택하든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유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 마실 텐가?”
“아뇨.”
“그래. 그러면 일어나지.”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품에 들어 있던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식사는 끝냈으니 이대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그가 걷기 시작한 방향은 본래 왔던 곳과는 정반대쪽이었다.
“단……. …어디로 가십니까?”
단장님이라 부르려던 호칭을 삼키고 말을 걸자 키시아르가 드물게 평소보다 고양된 티가 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밤바람이 기분 좋고 배불리 먹었으니 산책을 해야지. 그런 게 휴식이니까.”
아무래도 그는 아직도 유더에게 진짜 휴식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꿈을 접지 않은 듯했다. 유더는 돌아가자는 말이 목 끝까지 나오는 것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주변에 산책할 곳이 있습니까.”
“왜 없겠나. 걷다 보면 수도의 아름다운 명소들이 얼마든지 나올 텐데.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그래. 제왕의 검흔이 있는 쪽이겠군.”
마도구를 쓴 탓에 한 번 보면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희미한 얼굴이 되었음에도 거리에 내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키시아르의 목소리만은 변함없이 낮고 아름다웠다.
“가까이 오게. 뒤를 따를 필요도 없는데 자꾸 뒤쪽으로 가는군.”
눈치 빠르게 그의 뒤쪽으로 슬쩍 물러나려던 움직임까지 봉쇄하니 도리가 없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바로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를 텐데도 이상한 긴장감이 손바닥 사이로 배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유더가 침착을 가장하는 동안 키시아르가 별안간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제왕의 검흔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이전 생에 지나가다가 잠깐 본 게 전부이니 지금은 없다고 대답하는 쪽이 맞을 터였다.
“초대 황제께서 돌로 쌓은 단단한 벽에 남긴 거대한 검기의 흔적이지. 본래는 그곳에 성벽을 만들 예정이었다는데, 그것이 남겨진 이후에는 그 벽 한 조각만 남기고 전부 무너뜨렸다네.”
“그렇군요.”
“아직까지도 역사에 남은 소드마스터의 검흔 중 가장 큰 흔적이라더군. 이후 소드마스터가 된 이들은 한 번쯤은 다들 그곳에 가서 목검으로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비교해 보게 되었는데, 단 한 명도 그보다 큰 흔적을 남기지 못했네.”
그렇게 말하며 걷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돌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벽은 풀숲을 따라 담장처럼 남겨져 있었는데, 가슴 정도 되는 높이에 가로로 끝도 없이 길게 남겨진 깊은 검상이 멀리서도 선명했다.
“보이나? 저 검흔.”
“네. 보입니다.”
키시아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제왕의 검흔 가까이 다가갔다. 유더는 검흔 주변에 남겨진 비슷하면서도 다른 흔적들을 보았다. 제왕의 검흔 위아래로 남겨진 다른 검흔들에는 누가 도전하여 남긴 자국인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정말로 역사서에서나 이름을 보던 이들이 많이도 와서 도전했군.’
그러나 키시아르의 말대로 제왕의 검흔보다 더 깊고 선명하며 길게 남겨진 자국은 없었다.
“이 검흔의 끝에서 끝을 따라 한 바퀴 돌아 걷고 오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이 있다네.”
“정말입니까?”
“그럴 리 있나. 외교 및 관광용으로 만들어진 미신에 불과해. 다른 나라 사절들 중에 검을 배우는 이들은 거의 이곳에 오고 싶어 하거든. 온 김에 행운까지 얻어 가면 기분이 좋을 테니 만든 소리지.”
그 사절들이 듣는다면 다소 실망할 만한 말을 아낌없이 쏟아낸 키시아르가 천천히 검흔 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의 곁을 따르다 문득 저 수많은 검흔 중 키시아르의 것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도, 그의 부관인 나단 주커만도 모두 검기를 쓸 수 있는 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언젠가 몰래 와서 한 번쯤은 저 마스터들의 벽에 도전을 해 보지는 않았을까. 한 번 궁금증이 자라나자 참을 수 없이 답이 듣고 싶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단장님께서도 검기를 쓰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음?”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쓸 수 있다 뿐이겠는가. 그는 신검의 주인이기도 했다. 비록 신검을 제대로 들고 다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건 왜 묻지?”
유더는 제왕의 검흔 위에 남겨진 다른 이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 저 검흔 중에 단장님의 것도 있습니까?”
“내가 말인가? 아니…….”
뜻밖이라는 듯 대꾸한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세월이 남긴 깊은 흔적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건 없네.”
“왜입니까? 자격은 충분하실 텐데요.”
“글쎄. 왜냐…라.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일이라서 말이야.”
키시아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개적으로 드러낼 힘이 아니니 당연히 이런 데 와서 도전할 생각도 한 적이 없었지. 실망시켜 미안하군.”
“그렇습니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워졌을 뿐이었다. 유더는 계속해서 거칠게 이어지는 검흔이 남겨진 벽을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군요. 단장님께서 남기신 흔적이라면 제왕의 검흔보다 길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설마.”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늘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단 말이지.”
네 개의 힘을 한 몸에 지닌 이를 상대로 과대평가라니. 오히려 힘의 끝을 알 수 없어 과소평가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 자네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생각이 나는군.”
키시아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제왕의 검흔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어렸을 때에는 나중에 이곳에 와서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듯도 해. 검술을 가르쳤던 이가 나라면 가능할 거라며 괜스레 바람을 불어넣었던 탓이었을 거야.”
손목까지 들어갈 만큼 깊은 검흔 내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눈빛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는 유더가 알 수 없는 과거의 한 점을 떠올리고 있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군. 그래서 더 여기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고.”
“지금이라면 하실 수 있습니다.”
“자네는 내가 여기에 도전하길 바라나?”
그 말은 이상하게도 단순히 진짜 도전을 일컫는 뜻이 아닌 듯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