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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92화 (192/805)

192화

“단장님.”

언제 온 것일까.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조금 당혹했으나 키시아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오늘 하루 종일 자네가 뭘 했는지는 잘 듣고 잘 보았네.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더군.”

“쉰 겁니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요.”

“이런. 힘들지 않다와 쉬었다가 언제부터 같은 뜻이 되었지?”

“혹 제가 오늘 발표한 새로운 훈련 계획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찾아오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너무 잘해 주어서 문제였지.”

키시아르가 눈썹을 살짝 누그러뜨린 채 미소와 함께 긴 테이블 위에 살짝 걸터앉았다.

“정말 고민이군. 쉬는 방법도 모르는 내 보좌를 어쩌면 좋을지.”

“어떻게 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장님이야말로 하루 만에 이렇게 나오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걱정되면 어제처럼 침실에서 같이 쉬겠나?”

키시아르야말로 잠조차 거의 자지 않고 일하기가 일쑤인 일 중독자이니 제게 무어라 할 처지가 못 된다는 뜻을 담아 대꾸했으나 돌아온 답은 한술 더 떴다.

“저희가 언제 같이 쉬었습니까?”

“두 사람이 침실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그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보통 휴식이라고 부르는 행위지.”

“병문안이라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나눈 대화는 거의 일 이야기밖에 없지 않았던가. 딱 잘라 대꾸하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졌네.”

졌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유쾌하고 부드러웠다. 유더는 그의 얼굴에 붙잡힐 뻔한 시선을 힘주어 다시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설마 농담만 하시러 여기까지 내려오시지는 않으셨겠죠. 왜 오셨습니까?”

“숙소에 둔 두 번째 선물은 잘 받았는지 궁금해서.”

키시아르가 그제야 본론을 이야기했다. 유더는 지금도 제 품 안에 있는 붉은 매개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인했습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선물이었다. 어제 그것을 보았던 순간의 놀라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희미한 미소와 밝아진 눈빛을 확인한 키시아르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마음에 들던가? 그럴 줄 알았지.”

“네. 정말로 믿음에 감사…….”

“그 신상품을 사려고 수도 내의 펠레타 기사단원 두 명이 돌아가면서 줄을 섰거든. 예약을 받지 않는 제품이라서 말이네.”

“……예?”

감사를 표하다 말고 흘러나온 말에 유더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었다.

“주원료는 과일이라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빛깔과 맛의 비법은 여태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지. 과연 수도의 특산품 중 하나라 일컬을 만해. 자네의 입맛에도 맞았다니 상으로 준비한 보람이 있었어.”

“사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내가 준 상은 그것뿐인데, 혹 뭐 다른 거라도 받았나?”

천연덕스러운 미소에 유더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으로는 매개체를 내게 준 걸 숨기겠다는 뜻이군.’

하기는 아무도 없는 상황이라 해도 언제 누가 엿들을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다. 조심하여 나쁠 것이 없었다.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너무 아껴 먹을 필요는 없지만 하루에 다 먹어버려도 안 되네. 많이 먹으면 이가 썩을 테니까 적당히 하루에 5개까지만 먹도록 허락하지.”

“……예.”

정말로 어린아이라도 대하듯 과장된 말투로 다정한 충고를 건네는 게 참으로 떨떠름했지만 어쩌겠는가. 키시아르는 지금 단장이고, 유더는 그의 보좌였다.

어색한 대꾸를 들은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면 이제 늦은 저녁을 들어볼까.”

“아직 안 드셨습니까?”

“자네도 아직이잖나.”

유더야 단원들의 상담을 해 주느라 저녁을 거른 것뿐이었으나 키시아르는 그럴 이유가 없는데 왜 아직 안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자리를 비웠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을 텐데요.”

“굳이 단 내에서 먹을 필요는 없지. 부지 바깥에 가게가 널려 있는데 뭐 하러.”

태연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보란 듯 팔목에 두른 팔찌를 살짝 매만졌다. 그러자마자 그의 얼굴과 머리칼이 이지러지며 잠시 후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희미한 인상의 이목구비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단복 차림조차 아니었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가 처음부터 이 일을 작정하고 왔음을 깨닫고 조금 허탈해졌다.

“준비를 참 제대로 하고 오셨군요.”

“내가 좀 꼼꼼한 편이지.”

유들유들하게 유더의 말을 받아넘긴 키시아르가 즐거운 눈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쉬지 못했으니 저녁 정도는 느긋하게 보내야 하지 않겠나. 쉰다는 게 뭔지 알려주겠네. 가자고.”

거절의 여지 따위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오늘 단 내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가장 눈에 띄는 검은색 단복 겉옷을 걸치지 않은 게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었다. 유더는 날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키시아르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수확철 축제가 끝난 7벽 내의 밤거리는 이전보다 한산했으나 분위기는 오히려 전보다 밝은 듯도 했다. 황궁기사단 부지 내의 온갖 지름길을 손쉽게 뚫고 나온 키시아르는 자연스럽게 거리 내의 평민들 속에 섞여들어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유더는 그의 뒤를 슬렁슬렁 따르던 중 문득 곁을 스쳐 지나는 주정뱅이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문득 귀를 기울였다.

“글쎄, 아페토 가에서 그 일 때문에 공자의 시체를 도로 회수해 왔다지 않겠어…….”

“장례식도 취소되었다지. 이대로 영영 못 하는 건가?”

“우리 같은 이들이야 높으신 분들 속을 어찌 알겠냐마는 그 3공자도 참 대단해…….”

‘아.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식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군.’

유더야 장례식을 파행시킨 장본인인 키시아르에게 직접 말을 들었다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을 텐데도 벌써 이렇게 이야기가 다 퍼져나갔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더가 사라져 가는 주정뱅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얼굴을 변용한 키시아르였다.

“길을 가다 돌아보았는데 없어서 깜짝 놀랐어.”

“아, 죄송합니다.”

“뭘 보느라 한눈을 다 팔았는지 모르겠군.”

“잠깐 생각을 조금 하다 보니…….”

아페토 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느라 잠시 한눈을 팔았다고는 답할 수 없어 슬쩍 시선을 피하자 키시아르가 흠 하고 짧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막 골목을 돌아 사라져 가는 3명의 주정뱅이에게 붙박였다.

“저녁식사가 아니라 술이 마시고 싶었던 거라면 말하지 그랬나.”

“아닙니다.”

“어차피 내가 살 테니 자네가 먹고 싶은 걸 먹도록 하지.”

아니라고 말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키시아르는 유더의 손목을 끌며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어느 낡은 술집 앞이었다. 거의 다 부서져 나갈 듯한 나무 간판 아래 달린 문을 열고 들어선 키시아르는 주변을 몇 번 돌아보고는 이내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내 앉았다.

“앉아.”

“…….”

술을 잔뜩 쌓아 둔 테이블 주변과 등불을 매단 기둥 말고는 일부러 빛을 두지 않은 탓에 내부는 몹시 어둑했다. 냄새만 맡아도 취할 듯 술 냄새가 가득했으나 의외로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유더가 주변에 앉은 이들 중 위험해 보이는 이가 없는지를 본능적으로 살피는 동안 앞치마를 두른 산적 같은 인상의 사내가 다가와 커다란 술잔 두 개를 쿵쿵 내려놓았다.

“맥주 둘. 더 필요하신 건?”

“요깃거리가 필요하니 남부식 돼지고기 뒷다리 구이. 그리고 재료가 있다면 튀긴 콩도.”

키시아르가 자연스럽게 눈짓을 하며 대꾸하자 산적 같은 사내가 씩 웃었다.

“좋은 조합이지. 곧 가져다 드리겠소.”

“술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앉자마자 맥주부터 주는군요.”

“파는 게 그것뿐이니까.”

사내가 사라진 뒤 중얼거린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느긋이 답했다.

“자주 와 보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내가 누군가. 놀기라면 어디서든 빠지지 않았다고. 수도 내에 있는 가게라면 거의 다 알고 있어.”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맥주를 들이켜며 웃었다.

“이곳 주인은 상단에서 호위 일을 하다 퇴직한 용병이라네. 인맥을 살려 차린 곳이라 요리 가짓수가 꽤 다양한 편이지. 술맛도 괜찮아.”

“…그렇군요.”

키시아르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죽었는데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애초에 이전 생에서는 그와 함께 이런 곳에 온 적도 없기는 했다.

“밤놀이를 나가시면 주로 이런 곳에 오십니까? 혼자 오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물론 혼자 오지는 않지.”

키시아르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만날 사람들이 있으니까.”

“만날 사람이라면… 아니, 아닙니다.”

“밤의 연인 말고.”

유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는 듯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렸다.

“친구. 혹은 부하. 혹은 정보원. 혹은 관찰이 필요한 자. 만날 사람이야 늘 많지.”

“…….”

친구, 부하, 정보원, 관찰대상. 그 중 예상했던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유더는 새삼 놀랐다.

이전 생에서도 키시아르는 얼굴을 변용하고 자주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 한 번 목적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묻지 말라는 답이 돌아온 이후에는 그저 밤놀이라 판단하고 완전히 신경을 껐다.

지금의 유더가 그때의 유더와 다르듯, 그때의 그 또한 지금의 키시아르와는 확실히 달랐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키시아르는 확실히 유더에게 벽을 두르고 밀어내려 했던 편이었다.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았던 과거의 그와 뭐든 물어보면 답을 해 주는 지금의 모습을 보니 그때는 몰랐던 차이가 분명히 느껴져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놀랐나?”

“…아닙니다.”

유더는 애써 이전 생의 기억을 밀쳐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접시 가득 담긴 요리가 나왔다. 남부식으로 향신료를 잔뜩 뿌려 구운 돼지고기 뒷다리는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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