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91화 (191/805)

191화

“앞으로 바뀔 마병단 훈련계획표.”

“설마 네가 만든 거야……?”

가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종이에 쓰인 글을 읽었다. 여태까지 마병단원들이 해 온 훈련은 기초 체력훈련과 각 과별 통합훈련뿐이었다. 개인별로 각기 다른 능력을 지녔어도 자신만을 위한 훈련을 하기 어려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조차 모르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제는 훈련보다 시간을 더 많이 투자했던 교양 및 작문수업을 수료한 이들이 늘어난 데다 마병단의 위상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으니 훈련계획을 바꾸기에 가장 적기였다.

때문에 유더는 어젯밤을 거의 새워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훈련계획표를 작성했다. 이전 생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가장 기본적인 개인 훈련 시간표를 먼저 적은 뒤 그간 보아 온 단원들의 능력에 따라 소속된 과에 상관없이 10명 정도씩 골고루 묶어 그룹을 만들었다. 최대한 서로 비슷하거나 보완 가능한 능력을 지닌 이들끼리 모아둔 이유는 당연히도 각자 개인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이전 생의 유더가 했던 것과 같은 개인 훈련을 하며 일과를 보내되, 정기적으로 동료들끼리 모여 서로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관찰하고 돕는 시간을 만드는 게 이 계획표의 중점이었다.

“단장님께 허락은 미리 구했어.”

“이 많은 걸 대체 언제 다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내 돌아다닌다고 바빴으면서……. 심지어 시험도 있어?”

입을 벌리고 계획표를 읽던 가케인이 한쪽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한 달에 한번 능력 발전과 성실도를 파악하기 위해 부단장 입회하에 간단한 능력 시험을 본다고 써 있는 부분이었다.

“이건 꼭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시험은 반드시 필요해. 목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리고 반복적으로 쌓인 시험 결과 자료는 이후 마병단에 필요한 인재들을 뽑고 승진시킬 때 좋은 기준이 되어줄 터다. 그러니 꼭 필요했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가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있는 동안 주변에서 체력 훈련을 하던 다른 단원들도 서서히 그들의 뒤로 몰려들었다.

“이게 뭐야? 새로운 훈련계획표?”

“유더가 만들었다고? 이대로만 하면 나도 그 녀석처럼 강해질 수 있어?”

“와. 이전하고 비슷한 듯 완전히 다른걸. 체계적이긴 한데 내가 잘 따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일어나자마자 명상 20분? 이게 힘을 쌓고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정말이야?”

걱정이 반, 신기해하는 반응이 반이었으나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유더는 웅성대는 단원들을 뒤로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 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전 마병단원이 새로운 계획표를 읽었다. 축제 기간 동안 수도를 지키며 자신감을 얻은 단원들은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에 한창 시달리던 중이었기에 새롭고 체계적인 훈련계획 앞에 환영을 표했다.

“유더. 새 계획표 봤어! 정말 대단해. 나와 같이 훈련하는 사람들은 점심 이후의 작문수업이 끝난 이후 2층 휴게실에 모여 있을 테니 그쪽으로 와 줘! 거기서 봐.”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가 마주친 칸나 또한 흥분 가득한 얼굴로 속삭이고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쓰러졌었던 게 언제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라 다행이었다.

유더는 칸나가 말했던 시간에 맞추어 휴게실로 향했다. 모여 있던 이들은 칸나와 가케인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없는 단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강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 앞에 조금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유더 아일이 왔다!”

유더가 도착하자마자 크게 외친 단원들이 일제히 그의 곁에 몰려들어 마구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 댔다.

“유더! 네가 그렇게 훈련시키는 재능이 대단하다며? 나는 어떻게 수련해야 좋을지 좀 말해 줘!”

“나도 내 훈련법이 괜찮은지 모르겠어. 한번만 보고 조언해줄 수 있을까?”

“나, 나도……!”

그들 중에는 이전 생에서 그다지 단원 생활에 열의를 보이지 않던 이들도 있었다. 일은 하되 제 안위만 챙기기 급급했던 삭막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기에 열의 넘치는 젊은 동료들의 모습이 아쉽고 기껍게 느껴졌다.

유더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한 명 한 명에게 능력을 발전시키기 좋을 만한 수련법을 추천해 주었다. 사실 한 명 정도는 같은 단원인 유더에게 조언을 받는 일에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처음에는 20명이 채 되지 않았던 모임은 이후 유더 아일이 훈련법 조언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나중에는 저녁까지 거르고 줄을 서서 물어보러 오는 이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휴일 아닌 휴일의 마지막 날이 그렇게 쏜살같이 사라져 갔다.

“유더. 이제 더 올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그만 일어나자.”

어느새 해가 진 창밖을 바라보며 가케인이 조금 지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내내 유더의 곁에서 그림자 분신과 함께 단원들을 줄 세우는 일을 돕느라 녹초가 된 상태였다.

“미안. 내가 괜히 오늘 도와 달라고 했나 봐. 다들 이렇게 몰려올 줄이야…….”

그의 곁에서 마찬가지로 지쳐 늘어진 칸나가 사과를 했다.

“나는 괜찮아.”

그러나 그들이 막 일어서자마자 또다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기에 숙소로 돌아가는 일은 또다시 요원해지고 말았다.

“미안한데 혹시 아직 조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에버 언니?”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나타난 이는 신과 부단장인 에버였다.

“언니도 올 줄은 몰랐어요.”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말을 들었지 뭐야. 끝난 거라면 그냥 갈게.”

“괜찮으니 앉으세요.”

유더는 선선히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전 생에서도 알아서 제 능력을 잘 발전시켰던 우수단원 에버 벡이 조언을 구하러 오다니. 새삼스럽지만 지금이 11년 전이라는 사실이 몹시 선명히 느껴졌다.

“다행이다. 시간을 오래 빼앗지는 않을게요.”

에버가 유더의 앞에 앉아 호흡을 천천히 골랐다. 급히 뛰어왔는지 뺨이 아직 붉은 상태였다.

“다들 그렇겠지만 저도 요즘 개인 훈련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었거든요. 그동안은 이미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훈련을 해 왔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걱정이 되어서요.”

“이미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어떤 부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으음. 그러니까… 지금의 제 능력은 너무 힘을 작게 나누어서만 쓰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편이거든요. 다들 알죠? 제 능력.”

에버가 손가락을 드러낸 장갑을 낀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힘은 근력 및 피부 강화라 힘을 나누어 쓴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만도 했으나 기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유더에게는 달랐다. 에버의 손가락 끝에 순식간에 모여드는 미세한 기운이 바로 그녀가 낼 수 있는 힘의 핵심이었다.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정확히 계산된 힘이 잠시 손가락 끝을 머물다가는 도로 흩어졌다.

“물론 이 힘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들어 다른 사람들을 보면 가끔은 크게 지르는 능력도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훈련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서…… 설명이 조금 이상하죠? 미안해요. 이런 걸 설명하는 데 익숙지 못해서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에버의 말은 남들처럼 눈에 잘 띄면서 화려하게 힘을 쓰는 방법도 하나쯤은 개발해 두는 쪽이 나을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흔히들 빠지는 함정이지. 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 더 좋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유더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에버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한다 하여 그 생각이 옳다 지지해 주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좋은 능력을 지니고 굳이 단점을 키울 필요가 없으니까.’

유더는 이전 생의 에버가 단신으로 몬스터 100여 마리가 모인 무리 안에 뛰어들어 단숨에 처리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더가 만나본 각성자들 중 능력을 섬세하게 사용할 줄 알기로는 제일이던 이가 한때는 정반대로 나아가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었다니. 조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에버.”

유더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조언을 건넸다.

“당신이 가진 능력은 기운을 낭비하기 일쑤인 이들보다 훨씬 대단해요. 저라면 하던 대로 하면서 근접전을 위한 담력과 임기응변을 늘릴 겁니다.”

에버의 능력은 위력이 강하지만 대신 멀리서 사용하면 대상에게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드시 근접전과 함께 펼쳐야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능력이었다.

“그, 그래요? 역시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요?”

에버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자 칸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언니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니까 그런 거죠. 오늘 찾아온 사람들 중 유더가 이렇게 좋은 말만 해준 건 언니가 처음이에요!”

“정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뻐하는 에버는 아직 그녀가 지닌 힘의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차피 그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테니 남의 조언은 필요 없을 터였다. 그녀를 보며 유더는 문득 오히려 조언을 얻어야 할 건 제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에버와 같은 능력이지.’

붉은 돌의 힘 때문에 생긴 반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전처럼 가진 힘을 펑펑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본래도 보다 섬세하게 나눠 쓰는 방법을 새로 고안해 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눈앞에 그런 능력의 달인이 있지 않은가.

아주 작고 정확하게 나눈 힘을 적재적소에만 사용하기로는 타고난 사람이.

“에버.”

“네?”

“제게 힘을 쓰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농담이죠?”

에버는 물론이고 가케인과 칸나도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유더는 진심이었다.

“어… 제가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 유더는 이미 그렇게 강한데 대체 뭘 가르쳐줄 수 있겠어요?”

“괜찮습니다.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거면 되었다. 유더는 그녀와 아침 자유훈련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을 받아낸 뒤 배부른 맹수처럼 흡족해졌다. 이 일이야말로 이번 휴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만했다.

이후 에버는 얼떨떨한 얼굴로 칸나와 함께 돌아갔다. 가케인은 유더와 함께 뒷정리를 끝내겠다고 말했으나 유더는 그의 피로한 얼굴이 영 신경 쓰였기에 억지로 먼저 올려 보냈다.

모두가 떠난 휴게실에는 낮의 떠들썩함을 드러내듯 어지럽게 널린 의자들과 쓰레기 몇 개만이 남은 상태였다. 유더는 쓰레기를 버리고 의자를 본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마지막 남은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밀어 넣고 몸을 돌린 순간, 기척도 없이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라고 말했던 건 이렇게 바삐 보내길 바라서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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