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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90화 (190/805)

190화

이논이 오래 살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노인인 타이스 율만을 상대로도 얼마든지 어린애 취급을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네가 말해 준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기는 해. 곳곳이 빈 데다 내 눈으로 직접 못 본 게 더 많으니 듣기만 한 상태에서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뭐. 어딘가에 소속된 이상 입을 마음대로 다 털 순 없다는 건 나도 알아. 너한테 여러 가지 금제가 걸려 있는 건 대충 봐도 느껴지니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최대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이전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말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어떤 부분들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손등에 생긴 반점의 변화와 어젯밤 실험이었으므로 이논 또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듯했다.

“네 기대에 부응할 답을 못 줘서 미안하지만, 들으면서 생각난 건 하나 있어. 그거라도 말할까.”

“뭐든 좋아.”

“그 늙은 마법사가 말한 대로 붉은 돌의 힘이 아주 조금 노출되기만 해도 사람의 몸을 변화시켜 각성자로 만든다고 치자. 말이 좋아 변화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독이나 마찬가지야. 조금만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많이 사용하면 독이 되는 재료는 이 세상에 질리도록 많으니까.”

비유를 왜 굳이 독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은 와닿았기에 유더는 잠자코 그의 말을 계속해서 듣기로 했다.

“네 손등의 반점이 생긴 원인이 내 짐작대로 붉은 돌의 힘 때문이라면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특정 독에 면역을 지닌 이가 당한 독살 시도와 비슷하게 이해하는 쪽이 나을지도 몰라. 면역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일단 치사량의 독이 주입되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 위험한 독일수록 더 그렇지.”

“…독살 시도라.”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려 보았다. 자연에서 난 독에는 피해를 입지 않는 육신을 지닌 탓에 참으로 낯설게만 느껴지는 말이었다.

“신성력을 써도 잘 회복되지 않는 것도 똑같아. 독에 면역을 지닌 몸이란 건 결국 정도만 다를 뿐 살아있는 독과 다를 바 없어서 완전히 없앨 수가 없거든. 그러니 해독이란 건 결국 몸속에서 독을 아주 없애는 게 아니라 약화시킨 다음 흡수를 도와 더 강한 독성을 지닌 몸이 되도록 만드는 거야. 그게 바로 독에서 ‘회복된다’는 뜻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어느 정도는.”

“이미 붉은 돌의 힘을 소화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본 적이 있는 몸이 그간 계속해서 그 강력한 독 원액 같은 힘과 싸워 동화시키려 노력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면 어떻게 될까.”

유더는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내 몸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야?”

“모르지. 그냥 내 생각이야.”

이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약방깨나 해온 내가 네놈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 보기로 그렇다고. 2성 발현이란 것도 각성만큼이나 몸이 크게 변하는 일이던데, 넌 몸에 독을 담은 상태로 그 변화를 겪고도 잘 살아남았잖아. 심지어 어제 이후로는 기운도 더 안정되었고.”

“독이 아니라 힘이겠지.”

“그거든, 그거든.”

무심히 내뱉은 이논이 손에 쥔 레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몸이 그 힘을 어느 정도 흡수하거나 동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넌 살아있는 매개체… 아니. 붉은 돌 그 자체와 다름없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혹은 본래 지녔던 힘에 원액을 더해서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지도 모르고.”

“…….”

엄청난 억측 같지만 묘하게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돌의 힘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게 내 힘과 다를 바 없이 느꼈기 때문이라면…….’

그간 몸에서 고통을 주며 번져나가던 반점의 정체가 갑자기 곪아가는 상처 같은 게 아니라 몸에 들어와 점차 영역을 넓혀나가던 붉은 돌의 힘 원본 그 자체라면.

생각에 잠긴 채 장갑에 감싸인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이논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네 기운이 그렇게 흔들대고 있는 것도 나름대로 추측할 만한 이유가 생기기는 해.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갑자기 받아들여 싸우고 있으니 토대가 남아나겠어?”

“그렇게까지 위험하게 말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건 네놈 재질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지. 여기 있는 다른 놈들 같았으면 이미 못 버티고 죽었어.”

“…재질이 좋다고?”

기이한 칭찬에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하자 이논이 얼굴을 푹 찡그렸다.

“됐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자꾸 칭찬 같은 말 시키지 마.”

그런 적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논은 이미 팔뚝을 문지르며 벌떡 일어난 뒤였다.

“대충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으니까 간다.”

“이논. 잠깐만.”

“또 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돌아보는 이논을 보니 아무래도 더 붙잡아서는 안될 듯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가 아직 먹지 않은 테이블 위의 레몬 한 알을 집어 건네주었다.

“이것도 가져가라고. 난 안 먹으니까.”

“아, 그래.”

“오늘은 나만 계속 이야기를 들은 것 같으니 다음에는 너도 뭐든 물어봐도 좋아.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전부 해줄 테니까.”

이전 생에 대해서도.

내포된 뜻을 눈치챘는지 이논이 눈을 살짝 가늘게 내리깔았다가는 몸을 돌렸다.

“그래. 알겠어.”

그는 레몬 두 알을 주머니에 넣고는 유더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날 지켜볼 목적으로 마병단에 온 거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군.’

유더는 긴 한숨을 내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면 이논은 마병단원은 아니나 단 소속이기는 하니 그를 제 조력자로 삼을 수는 없을까. 굳이 지정하지 않아도 도움을 청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면 뻔뻔히 찾아갈 계획이었으나 그래도 기왕이면 가까이 지내는 쪽이 좋지 않겠는가.

‘곧바로 제안하면 싫어할 테니까… 좀 더 친해진 다음 기회를 봐야겠어.’

***

다음날, 유더는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끝내고 숙소 뒤쪽 훈련장으로 나갔다. 오전인데도 벌써부터 의욕 넘치는 단원들이 모여 개인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유더!”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검은 그림자 분신을 데리고 훈련장을 뛰고 있던 가케인이 유더를 발견하자마자 밝은 얼굴로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이제 의료부에서 완전히 나와도 되는 거야?”

“응.”

“다행이다. 그간 고생해서 그런지 살이 좀 빠진 것 같아. 아침은 먹었지?”

먹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가케인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온통 땀투성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만큼 상쾌한 얼굴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던 기운이 살짝 풀어지는 감각을 느낀 유더는 새삼스럽게 제가 2성 발현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고 보니… 가케인도 알파였지.’

2성 발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저 기운이 아마 가케인이 지닌 알파로서의 존재감일 터였다. 키시아르의 기운을 대할 때처럼 거대한 압도감을 느끼거나 긴장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저와는 다른 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자각되니 기이했다.

이전 생에 향이 없는 오메가로 발현했던 때는 스스로를 비롯해 다른 2성 발현자들의 향이나 기운에도 한없이 둔했었기에 이런 기운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확실히 향이 있는 채로 발현한 게 뭔가 다르긴 한가 보군.’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았는지 가케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이마와 뺨을 닦았다. 물론 땀 이외에 묻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발현을 하고 나니 확실히 네가 나와 다르다는 게 느껴져서.”

솔직하게 대답하자 가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걸 지금 처음 느낀 거야? 유더도 서투른 부분이 있다니, 왠지 신기한데?”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앞으로 그런 감각을 꽤 자주 느끼게 될 것이니 진한 향을 뿌리는 발정기 직전의 알파 단원들은 멀리 피해가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나도 겪어보아서 알지만 알파 각성자의 발정기 때는 감정이 많이 격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해. 어차피 단장님이 발표한 규칙에 따르면 발정기가 오자마자 강제 격리 및 휴가니까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쌍방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뭐.”

“가케인, 너는 발정기 때 오메가 각성자를 만난 적이 있어?”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자 가케인이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 같은 알파 각성자조차 입단하고 나서야 처음 봤는걸. 하지만 발정기가 온다 해도 딱히 단 내에서 누군가를 만날 마음은 없으니까 휴가 받고 그냥 쉴래.”

실로 모범적인 대답이었다. 유더는 제가 단장이었던 시절, 걸핏하면 발정기를 핑계로 단내 풍기문란 사건을 일으키던 놈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발정기를 잘 보내기 위해 준비된 수면향이나 진정약이 있음에도 꼭 그런 식으로 단 내에서 기강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놈들 때문에 주기적으로 힘을 쓰는 게 일이었다.

‘개중에는 향이 없는 오메가 단장의 기를 눌러주겠다는 이유로 침실까지 숨어들던 놈도 있었지…….’

그놈의 사지와 자지가 전부 부러지도록 두들겨 팬 뒤 숙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나서는 그런 간 큰 녀석은 사라졌으나 발정기를 겪지도 않는 반쪽짜리가 뭘 알고 억압하려 드느냐는 반발은 잊을 만하면 계속되었다.

씁쓸한 기억을 몰아낸 유더는 미리 숙소에서 준비해 온 종이 두 장을 꺼내 바로 옆 벽에 붙였다.

“유더. 뭐야, 이건? 계획표?”

“앞으로 바뀔 마병단 훈련계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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