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냥 나도 지금 돌아갈래.”
그때, 이논이 돌아와 유더를 보고는 미간을 슬쩍 찡그렸다. 아직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의 앙금이 덜 풀린 상태인 듯했다. 유더는 그가 칸나에게 좀 더 휴식을 취하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심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상태는 괜찮으니까.”
“정말요? 다행이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다시 방문하라는 말을 남긴 이논이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유더는 칸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준비하는 사이 재빨리 이논의 뒤를 따라가 어깨를 붙잡았다.
“뭐야?”
“이따가 내 숙소로 와 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무리 네가 나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 해도 오라 가라 명령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제 지하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된 이야기야.”
그 말을 들은 이논의 성난 눈썹이 잠시 후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을 터였다.
“흠…….”
“레몬도 가져다 둘게.”
“너, 내가 레몬이면 다 되는 줄 아냐? 대체 있던 곳에서 뭘 배우고 온 거야?”
이논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유더는 그에게 제 숙소가 있는 층과 방 위치를 알려준 뒤 칸나와 함께 의료부를 떠났다.
“유더. 의료부의 그 잘생긴 약사 분 말야.”
한산한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따라 올라가던 도중 칸나가 갑자기 이논에 대해 말을 꺼냈다. 유더는 잠시 시간을 두고 느리게 대답했다.
“응.”
“뭔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지 않아?”
“…무슨 의미로?”
순간적으로 이논과 제가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나 싶었으나 그건 아닌 듯했다. 칸나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며 계단을 올랐다.
“그게 말야. 아까 깨어났을 때 그분의 얼굴을 처음 제대로 마주 보았었는데, 그때 좀 이상한 일이 있었거든.”
“이상한 느낌?”
“내가 요즘 수련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감정 같은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저번에 한 적이 있었지? 기억나?”
유더는 그것이 가일과 두일의 심문을 하러 갔을 때 했던 말이었다는 사실을 이내 기억해 냈다.
“아직 내 의지대로 완전히 조절할 수 없는 능력이라 피곤할 때가 있는데, 그분이 나를 보자마자 그런 식으로 조절을 못 하면 몸이 금방 망가질 거라고 그러는 거야. 그 능력에 대해선 너와 단장님 이외엔 말한 적이 없는데 대체 뭘 알아차리고 한 말인 걸까. 아무래도 평범한 약사는 아닌 게 분명해. 조사를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이논에게 이따가 해야 할 말이 하나 더 늘었군.’
아무래도 이논은 다른 사람에게 해도 좋은 말과 안 해도 될 말을 아직 잘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저, 칸나.”
“응?”
“그 약사… 아니, 이논은 사실 나와 아는 사이야.”
“뭐? 정말? 유더의 소개로 들어온 분이었던 거야?”
“그건 아니지만…….”
유더는 말끝을 흐리며 칸나의 표정을 살폈다.
“네가 너무 오래 깨어나지 못해서 걱정되는 마음에 내가 네 능력에 대해 조금 자세히 말하고 상담을 했었어. 미안.”
“아… 그랬구나.”
칸나의 얼굴에 가득했던 의구심과 놀라움이 그제야 사그라들었다.
“난 또 말하지도 않은 능력을 알아차리다니 어디서 잠입한 적일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했지 뭐야. 그랬구나. 유더와 아는 사이였다니……. 혹시 고향에서부터 알던 사람?”
“아니. 이곳에 와서 만난 사람이야. 우연히… 도움을 조금 받게 되어서 인연이 생겼어.”
이번 생에서는 아니지만 저번 생에서는 그랬으니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 네가 도움을?”
칸나는 유더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던 듯 몹시 놀랐다. 그래도 그 한 마디로 인해 이논을 향한 경계는 확연히 거둔 듯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한 분이신가 보구나. 오해해서 죄송해지네.”
사실 그녀가 의심한 쪽이 타당하다는 진실을 알릴 수 없었기에 유더는 그저 애매한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때마침 숙소가 위치한 층에 도달했기에 두 사람은 중앙 계단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짧게 나누었다.
“유더. 아직 쉬는 날이 하루 더 남았지? 괜찮으면 내일 훈련을 봐 줄래?”
“괜찮지만… 너는 좀 더 쉬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꾸준한 훈련은 능력 향상에 물론 도움이 되지만, 몸을 축내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다. 유더의 걱정에 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 일로 내가 아직도 단장님이나 유더에 비하면 한참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자만했던 게 부끄러우니까 더 열심히 할 거야. 그러면 내일 봐!”
몸을 돌려 뛰어가는 칸나의 뒷모습이 곧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유더는 천천히 제 숙소가 있는 반대편 복도로 돌아갔다. 문을 열기 전 키시아르가 ‘상은 하나 더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멈칫했으나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두 번째 상이란 건 뭘까. 미묘한 불안감과 함께 문고리를 돌리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작은 방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선 그가 발견한 것은 침대 위에 가지런히 개켜 놓은 흰 옷가지였다. 눈에 익은 그 옷의 정체를 유더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예복?’
발현이 일어났던 날 입고 있던 예복이 분명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던 상태라 사라진 예복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는데 설마 이것이 여기 되돌아와 있었을 줄이야.
‘설마 이게 두 번째 상인가?’
키시아르는 두 번째 상 쪽을 더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었지만 이건 돌려받아도 그리 크게 기쁘지 않았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집어든 유더는 순간 옷자락 안쪽에서 침대 위로 툭 굴러떨어진 물건들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나는 곱게 칠한 색종이에 싸서 포장된 둥근 덩어리라 정체가 짐작가지 않았으나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검붉은 빛을 내며 반들대는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돌 한 조각은 착각의 여지없이 어젯밤 타이스 율만이 만들어냈던 붉은 돌의 힘 매개체가 틀림없었다.
‘이건…….’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주먹보다 작은 돌을 쥐었다. 붉은 돌의 힘을 가둔 매개체는 아무렇게나 부서진 상태임에도 최고의 원석 같은 기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붉은 돌이었을 때와는 달리 손에 쥐어도 그저 얌전하기만 한 그것을 다시 내려둔 유더는 색종이에 싼 두 번째 덩어리를 펴 보았다.
과연 붉은 돌의 힘 매개체와 나란히 넣을 만한 물건은 뭘까.
- 수도 5벽 중앙에서 5대째 장사 중. 뉴벨라이안의 사탕가게.
- 사랑보다 달콤한 그 맛. 이젠 선물로 함께하세요.
“…….”
색종이 안에 곱게 싸여 있던 물건은 다름 아닌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사탕들이었다. 보석처럼 색색깔로 빛나는 사탕 덩어리들을 침묵과 함께 내려다보던 유더는 이내 천천히 그중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루비처럼 붉은 사탕에서는 혀가 녹는 게 아닌가 의심될 만큼 진득한 단맛이 났다.
‘아무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유더는 사탕 포장지를 도로 덮고 매개체를 다시 한 번 들어 올려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이쪽이 확실히 첫 번째 상보다 마음에 든다는 걸.’
키시아르가 그것을 유더에게 준 이유는 매개체 하나어치의 힘만큼은 그가 어떻게 살피고 사용하든 상관없다는 뜻일 터다. 그 위험한 힘의 일부를 아무런 조건 없이 내줌으로써 키시아르는 유더를 향한 그의 신뢰가 변하지 않았다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전언을 보낸 셈이었다. 실로 과감한 배포였다.
매개체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 위로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유더는 흡족한 기분으로 매개체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논이 오기 전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식당으로 내려가 그가 먹을 빵과 이논에게 줄 레몬 몇 알을 가져왔다. 청소를 담당하는 이들이 빨아다 주었을 단복을 정돈하고 방 상태를 점검하고 나자 기다렸던 손님이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비로소 문을 두드렸다.
“여긴 방 위치들이 하나같이 너무 헷갈려. 문 앞에 이름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색도 전부 똑같으면 주인이라 해도 방을 찾기 힘들 거라고.”
“쉽게 만들면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막아내기 힘드니까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야. 들어와.”
이전 생의 기억을 살려 대답해준 뒤 안으로 먼저 들어서자 이논이 무어라 낮게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어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말하자면 조금 길어.”
크지 않은 방이라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작은 테이블 위에 씻어서 올려 둔 레몬을 보자 이논의 표정이 순식간에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좋아. 들어줄 테니까 일단 말해.”
어젯밤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붉은 돌의 힘을 연구하기 위해 우선 힘과 돌을 따로 분리하기로 한 실험 도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사고가 났을 때 붉은 돌의 힘과 저 사이에 일어난 의문의 상황을 설명하는 일은 제법 어려웠다. 그때 빛을 냈던 제 손 이야기를 하려면 반점이 생긴 경위도 밝혀야 하는데, 비밀 임무 도중 일어난 일이라 서약에 걸리지 않도록 설명하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서약에 걸리지 않을 임무 전후 이야기를 이용하여 그 사이의 빈 부분을 추측할 수 있도록 신중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논이라면 분명 비어 있는 사이를 추측할 수 있으리라 믿고 말했지만 당사자는 단단한 레몬 껍질을 마치 푸딩이라도 되는 양 쉽게 베어물며 간간이 ‘으음.’ 하는 성의 없는 추임새만 넣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된 거야.”
겨우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간만에 많은 이야기를 한 탓인지 입 안이 말랐다.
“흐흠. 그래. 이제야 뭔가 좀 이해가 되네.”
레몬 두 알을 깨끗이 먹어치운 이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그래서 너는 나한테 무슨 의견이 듣고 싶은 건데?”
“어제 실험 도중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너도 모르겠다면서 나라고 답을 알겠어?”
“오래 살았잖아.”
“오래 살았어도 붉은 돌이 떨어진 게 2년 전이라는 사실이 변한 건 아니지. 난 애초에 너희 각성자들에게는 거의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논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3번째 레몬을 손 안에 쥐고 규칙적으로 굴리기를 반복했다.
“붉은 돌의 힘은 변화라…….”
“…….”
타이스 율만이 했던 말이 무언가 걸린 듯 입 안으로 중얼거리던 이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 안쪽을 흐흠 하고 울렸다.
“그 맥락에서 마력 혁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했던 거군. 그 마법사 자식. 건방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