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88화 (188/805)

188화

“마지막의 그 표정. 봤어, 나단?”

유더 아일이 나간 뒤, 물을 단숨에 모두 들이켠 키시아르가 길게 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이 두 개라고 하면 좋아해야 마땅한데 대체 그 표정은 뭔지. 하마터면 눈앞에서 웃어버릴 뻔했다니까. 받고 나서 무슨 얼굴을 할지 직접 못 보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군.”

몹시 즐거워 보이는 주군의 얼굴을 보며 묵묵히 잔에 다시 한 번 물을 채워준 나단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습니다만.”

“그래? 또 어떤 이상한 걸 주려고 이러나 싶어 불안스레 굴리던 그 눈을 못 봤다고?”

대체 유더 아일이 언제 그런 연약한 표정을 지었었단 말인가? 나단 주커만의 눈에 비친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키시아르의 말에 시종일관 무어라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다 물러간 게 전부였다.

나단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가 새로 따른 물의 반 정도를 또다시 두어 모금만에 비운 키시아르가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선물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가장 예민한 부분은 묻지 않고 나갔으니 말이야. 솔직히 나는 거기까지 물어볼 줄 알았거든.”

“…….”

“하지만 뭐,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니 곧 다시 찾아오겠군.”

키시아르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그를 모셔 온 나단은 답을 알고 있었기에 반문하지 않았다. 주군은 황가의 혈통과 관련된 가장 깊고도 어두운 비밀까지 필요하다면 유더 아일에게 전부 알려주어도 상관없다 말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야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짐작할 것은 다 짐작할 상태라 해도 평민들은 아니다. 진실이란 단어는 달콤한 만큼 위험한 법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물었다. 키시아르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반문했다.

“너는 그가 내게 사실을 들었을 때 배반하리라 생각하느냐, 나단?”

“…….”

아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성장환경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강자의 여유로움으로 가득한 사람이나, 그렇다 하여 아무에게나 너그러운 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의 믿음을 얻고, 또 그 믿음에 합당하고도 넘치는 능력과 충성심을 드러낸 이는 유더 아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단은 더더욱 마병단이 만들어진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또한 지나치게 빨리 그에게 익숙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조차도 어젯밤 ‘계속해서 의심해 주어도 좋다’고 흔쾌히 말하던 뜻 모를 얼굴을 본 순간 혼란스레 흔들렸지만.

“나단. 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를 완전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을 느낀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나단을 향해 키시아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내 곁에 두어야겠다는 욕심을 느낀 건 네게 검을 가르쳤던 이후 처음인지도 몰라.”

유더 아일의 능력에는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단은 폭발 직전의 뒤흔들리던 공간 속에서 유더 아일이 보였던 정확한 판단과 불가사의할 만큼 강렬한 힘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까지도 소름이 돋았다. 그런 자가 적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재앙은 없으리라. 하물며 어젯밤 그런 힘을 쓰고도 유더 아일은 이전과 달리 반점이 그리 많이 번지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먼저 치러야 한다. 미래에 내가 둘 판에는 그와 같은 특별패가 필요해.”

느릿한 목소리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듯 느껴졌으나 나단은 주군에게서 문득 낯선 열망을 읽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깊은 미련을 드러내지 않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음을 얻으려 하시는 건 좋습니다만, 지나치게 열중하시면 안 됩니다.”

“너는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솔직히 말해 요즘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어. 누군가와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게 이리 어려운 줄은 몰랐거든. 그런 이가 어쩌면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인지도 모르겠구나.”

“그건 아일 경이 2성 발현을 한 영향이 아직 덜 빠지신 게 아닙니까?”

“뭐, 그런 가능성도 높겠지. 오늘도 참 귀여워 보였으니.”

키시아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장난기 어린 답에 머리가 조금 아파진 나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폐하께서 들으시면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과연 내 일에 그만한 신경을 쓰실까.”

웃으며 대답한 키시아르가 잠시 후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는 그것을 받으신 뒤 답신이 왔나?”

“아뇨.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 마침 도착했군요.”

마치 대화가 이쪽으로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창문 쪽에서 작은 전서조가 부리로 창문을 두드렸다. 나단 주커만은 서둘러 창을 열고 전서조의 다리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작게 말려 봉한 편지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음… 어디 보자.”

작은 칼로 봉인을 뜯어 건넨 편지를 받은 키시아르가 여전히 늘어진 자세로 앉아 편지를 빠르게 읽었다.

“잘 받으셨다는군. 안에 담긴 붉은 돌의 힘을 몸으로 받아낼 수 있게 최대한 가까이에 두고 지내시라는 충언은 좀 덜 믿으시는 듯하지만, 그래도 지켜주실 듯하니 다행이야.”

“다행입니다.”

나단 또한 키시아르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어젯밤 키시아르의 명에 따라 붉은 돌의 힘을 분리하여 담은 매개체 중 절반을 분리해 태양궁으로 보냈다. 매개체에 담긴 힘은 붉은 돌 속에서 제한 없이 발산되었던 때와 달리 평범한 사람이 만지거나 곁에 두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덕분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은밀히 운반시킬 수 있었다.

“조짐이 좋아. 혹시나 하여 미리 보내두었는데 오늘 아침 마법사가 각성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말이야. 이대로 그 힘이 폐하께도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군.”

키시아르가 나머지 절반이 담긴 바구니를 숨겨 둔 마석난로 근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몸이 이리 나른해서야. 정말로 오늘은 꼼짝없이 계속 쉬어야 할 모양이야.”

“주기가 가까워지셔서 그런 것이 아니실지요.”

“음… 주기가 다가오는 탓이라기에는 조금 지나친데.”

“어제 힘도 갑자기 사용하셨습니다.”

“그래. 그것도 있지만.”

“꿈자리가 좋지 않으셨다고 아침에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아. 그도 그랬지.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정말 불쾌한 꿈이었어.”

키시아르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그의 손 안에서 서로 다른 색을 띤 네 가지 기운이 뒤엉킨 채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타닥타닥 튀기는 소리를 내며 흩어져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보았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힘이었으나 정작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 속에는 불쾌함과 권태로움만이 가득했다.

“…어쩌면 발정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도로 들어갈 테니 너도 네 할 일을 해라, 나단.”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가 침실로 향했다. 나단은 사라지는 주군의 뒷모습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경례한 뒤 몸을 돌렸다.

***

“유더님. 마침 잘 오셨어요. 칸나님이 정신을 차리셨거든요.”

유더는 1층 의료부로 내려오자마자 달려온 루산이 들려준 희소식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언제 깨어났습니까?”

“마법사님들이 지하를 정리하러 나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뜨셨어요. 지금은 묽은 스프 한 그릇을 다 드시고 신성력도 더 부어드렸죠.”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인사를 한 뒤 유더는 침대에 앉아 있던 칸나를 곧 발견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칸나.”

“…아. 유더.”

이름을 부르자 다행히 그녀는 곧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기절했었다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깨어나자마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몸은 어때.”

“괜찮아. 기운이 조금 없기는 하지만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해.”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듯해 정말 다행이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흘리며 침상 곁 의자에 앉았다.

“내가 갑자기 기절해서 다들 많이 어이가 없으셨겠지. 단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어? 많이 실망하셨을까?”

“그럴 리 없잖아.”

단호한 대답에 칸나가 비로소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웃었다.

“…응. 그렇지. 알면서도 걱정이 되어서 그만.”

“기절하기 전 능력을 썼을 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는 기억해?”

유더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웃음을 거둔 칸나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니.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어. 쓰자마자 뭔가에 튕겨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외에는…….”

역시 예상대로 능력을 쓰기는 했어도 읽은 정보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튕겨져 나왔다는 표현은 조금 특이했기에 유더는 그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튕겨져 나오는 느낌?”

“응. 뭐라고 해야 하나. 작은 돌이지만 그 안에 엄청나게 큰 산이 들어있어서 나 따위는… 아니, 인간에게는 감히 허락되지 않은 걸 들여다보려 했던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면 알겠어?”

“…아니.”

솔직히 말해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유더가 조용히 고개를 젓자 칸나가 작게 웃었다.

“사실 나도 말하면서도 잘 모르겠어. 깨어나서 생각해 봐도 정말 이상한 경험이야.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

아직 칸나가 그 돌을 읽기에는 능력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정말로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인가.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유더는 그녀가 다친 곳 없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다친 곳이 없다면 하루 정도 더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단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응? 아냐. 이렇게 멀쩡한데 뭐 하러. 그냥 나도 지금 돌아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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