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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87화 (187/805)

187화

유더는 의자를 조금 뒤로 물려 앉으며 냉정히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무언가 더 알게 되거나 변화가 생길 경우 즉각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작게 웃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유더는 키시아르의 몸이 아직 좋지 않은 상태임을 열심히 되뇌며 침착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타이스 율만이 왜 아침부터 저리 앞에서 나를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혹 들었나? 붉은 돌의 힘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기에 일단 나중에 들어볼 생각이었는데.”

“아, 네. 그건…….”

무심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타이스 율만이 흥분하여 뛰쳐나갔던 원인이 그제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아. 알릭이 각성했다는 말부터 보고했어야 했는데.’

키시아르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탓에 그만 잊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는 것이 늦었습니다만, 오늘 아침 알릭이 각성했습니다. 율만 님께서 단장님을 찾아온 건 그 때문입니다.”

“어제 기절했던 그 젊은 마법사 말인가? 각성을 했다고?”

과연 이 소식은 키시아르도 놀라게 만든 듯했다. 쿠션에서 등을 뗀 키시아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확실한가? 어떤 능력이지?”

“제가 보기에는 확실합니다. 물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고, 이전에는 속성 마법을 쓰지 못했다니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보았다면 확실하겠지.”

유더의 답을 받아들인 키시아르는 다시 큰 쿠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마법사가 각성이라. 그런 사례가 존재하리라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군.”

“율만 님께서는 그간 붉은 돌의 힘에 가까이 노출되어 있었던 환경 때문에 알릭이 각성했다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일리 있군. 붉은 돌 회수 작전 때 제국군 병사들 사이에 일어난 각성자 비율 상승 건도 있었으니.”

“저 또한 같은 생각을 하여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키시아르가 턱 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군.”

“이야기를 들으신 율만 님께서 그 일과 이번 일을 연관지어 새로운 가설을 몇 가지 생각하셨다니 몸이 나아지시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는 쪽이 좋으실 듯합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지금 곧바로 만나는 쪽이 낫겠어.”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지만 저쪽에 가져다 둔 옷을 좀 가지고 와 주겠나.”

“단장님. 무리하시면서까지 지금 당장 그분을 만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아.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즐거워서인지 거의 나았거든. 기력을 돋운다는 향초 열 개보다 나은 대화였지.”

“무슨 말씀을…….”

“안 가져다 주어도 어차피 스스로 갈아입으면 그만이네. 아니면 거기 서서 그대로 내 몸을 감상하는 쪽이 더 좋은가?”

황족의 몸을 이유 없이 살피는 건 불경죄로 처벌될 수 있지만 자네라면 허락하지. 키시아르가 허리에 묶었던 끈을 거침없이 잡아 풀며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순식간에 드러난 가슴에서 고개를 돌리고 가져오라 명했던 옷이 있는 쪽을 향해 묵묵히 움직였다.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언제든 갈아입을 상황을 대비한 듯 한 벌의 상하의가 단복 겉옷과 함께 눈에 잘 띄는 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과연 정말 제 몸 귀한 줄 안다던 말이 사실이기는 한가 의심이 들었다.

“상하의를 먼저 가져오게. 겉옷은 그다음.”

유더는 그의 말에 따라 겉옷은 팔에 걸고 상하의를 든 채 침대 쪽으로 돌아갔다.

“도와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조용히 묻자 웃음기 어린 답이 되돌아왔다.

“괜찮아. 전에도 말했지만 나만큼 혼자 옷을 잘 입는 황족은 없다네. 그런데… 괜찮다는데도 그렇게 시선을 피할 텐가?”

유더는 대답 대신 곧장 몸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키시아르는 그에게 말을 더 걸지 않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다 됐으니 이제 겉옷을 주게.”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가 막 마지막 남은 셔츠 단추를 잠그는 중이었다. 유더는 팔에 걸고 있던 단복 겉옷을 들고 그의 뒤쪽으로 다가가 팔을 곧바로 꿸 수 있도록 펼쳤다. 주인의 체격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탓인지 옷도 새삼 생경할 만큼 컸다. 뒤를 돌아본 키시아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괜찮다는데도 그러는군. 고맙네.”

겉옷까지 모두 입고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자 그는 평소보다 조금 혈색이 없어 보이는 것만 제외하고는 상태가 좋지 않은 기색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면 이제 나가지.”

단장실 출입구 쪽에 시립해 있던 나단 주커만은 갑작스레 옷을 입고 나온 주군을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한숨만 한 번 내쉬고는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타이스 율만을 불러들였다.

“단장님!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제가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뛰쳐 들어오자마자 곧장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친 노마법사는 키시아르의 뒤에 서 있던 유더를 보고는 짧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어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놀랍게도 오늘 아침 제 제자 알릭이……!”

“각성했다지. 들었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라……!”

키시아르는 흥분한 마법사를 요령 좋게 소파까지 데려가 앉힌 뒤, 느긋해 보이는 태도로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솔직히 말해 유더는 그가 숨가쁘게 인용해 대는 온갖 문구와 설명도 없이 내뱉는 용어, 마구 건너뛰기 일쑤인 말들을 전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키시아르는 그 모든 것을 다 알아듣는 듯 보였다.

“…래서, 이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방법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 말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그렇겠군.”

“단장님께서도 역시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앞으로의 연구도……!”

“그 전에, 해 두어야 할 말이 있소.”

미소와 함께 말허리를 자른 키시아르에게서 느껴지는 단호한 기운에 타이스 율만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연구에 미쳐 흥분했던 머리가 겨우 식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연구자이며 마법사인지는 이제 충분히 믿을 수 있으나, 이 일의 진행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로 간의 믿음과 신중함이지. 과연 어제처럼 욕심과 흥분이 이성을 앞질러 모두의 위험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 내가 계속해서 일을 맡겨야 할까……. 어젯밤 계속해서 그러한 생각이 들더군.”

“전하. 그것은…….”

다급한 마음에 호칭을 바꾼 타이스 율만을 향해 키시아르가 한 손을 가볍게 들었다. 노마법사는 그보다 훨씬 어린 공작의 앞에서 마치 맹수 앞의 먹잇감이 된 양 짓눌리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뵙자마자 먼저 용서를 구하고 재발은 없으리라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늙은이가 흥분이 앞서 그만 우선순위를 착각했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나서야 그는 머리를 짓누르는 듯하던 압박에서 겨우 벗어났다.

“두 번 다시는 어제와 같은 일이 없길 바라겠소. 더불어 앞으로 연구할 장소도 바꾸기로 하지. 서약서 또한 새로 써야 할 테고, 연구를 위한 인력이 앞으로 더 충원될 수 있는데 괜찮겠소?”

“물론 괜찮습니다. 그쪽이… 저희에게도 마음이 편합니다.”

“잘 되었군.”

부드러우나 그 어떤 무기보다도 위험하게 느껴지는 미소가 붉은 눈 위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자세한 건 추후 다시 이야기하지. 나가 보시오.”

타이스 율만은 곧장 일어서서 인사를 한 뒤 허둥지둥 단장실을 떠났다. 유더는 기가 질린 게 분명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은 그가 전처럼 앞뒤 없이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라 여겼다.

“단장님. 그러면 저도 이만…….”

“아. 자네는 잠깐만 남아 있게.”

타이스 율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그시 문 쪽을 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그제야 한숨을 깊이 내쉬며 소파 뒤로 고개를 젖혔다.

“나단. 물과 함께 그것을 가져와.”

‘……그것?’

의아해진 기색을 알아챈 듯 키시아르가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까지 타이스 율만을 대하던 빈틈없는 태도가 완전히 사라진 눈빛이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자네 거니까.”

“가져왔습니다.”

돌아온 나단 주커만이 키시아르의 앞에는 얼음이 든 물잔을, 그리고 유더에게는 끈으로 묶어 봉해 둔 종이를 건넸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끈을 풀고 곧바로 안에 쓰인 내용을 읽었다.

- 나,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는 보좌 유더 아일에게 휘하 5인의 직속 부하 및 조력자를 상시 선임할 수 있는 임명권을 부여한다. 선임기준은 오로지 마병단원에 한하며, 부단장급 직위를 지닌 이는 제외한다. 그 이외는 유더 아일의 자유에 맡긴다.

몇 번을 보아도 내용은 같았다. 키시아르가 그의 아래에 일을 도울 동료 및 부하를 둘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명령서였다.

“단장님. 이건…….”

“3일간 얌전히 잘 쉬면 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어제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칭찬을 겸해 지금 주기로 했네.”

상을 준다더니, 설마 이런 걸 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키시아르가 낮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네는 명령받은 것 이상의 일을 늘 혼자 해내려고만 하지 않나. 그간 고심해본 결과 차라리 일을 도울 손발을 추가해 주는 편이 낫겠더군.”

“저는 이런 권한을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항의는 단숨에 묵살당했다.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되니 일단 받아는 두게. 그리고 상은 사실 하나 더 있어.”

“예?”

“의료부에서 나가 숙소로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자네는 그걸 더 좋아할 것 같군. 중얼거리는 키시아르의 묘한 미소를 보자 기이한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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