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84화 (184/805)

184화

루산이 중얼거리며 경전의 한 부분 같은 말을 외웠다.

“-인간을 엮던 모든 굴레가 사라지고, 그때까지 이루었던 모든 것이 가라앉았으나 신의 영광만은 살아남았음이라……. 모든 게 사라졌으니 기록도 없겠죠. 대신전에도 그래서 경전 이외에 천 년 전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어요.”

“으음. 맞아요. 사제님의 말씀대로 그것도 연관이 있겠죠. 지금의 저희들은 알기 어렵지만요.”

알릭이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이후 모두는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연 이는 약초를 다 다듬어 정돈한 루산이었다.

“마력 혁명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듣고 나니 어느 시대든 다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대멸망보다도 훨씬 전을 담은 경전의 1장 부분에 방금 그 이야기와 비슷한 전설이 나오거든요.”

“경전의 1장……. 어릴 때 신전에서 들은 듯도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제가 일곱 살 때 진주탑에 들어간 이후로는 신전에 거의 방문할 일이 없어서 말입니다. 하하.”

“그러실 수 있죠. 역사 이야기만 줄줄이 나오는 부분이라 보통 사제님들은 설교 시간에 그 부분을 이야기하진 않으니까요. 저도 대신전에서 지낸 게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공부할 일은 없었을 걸요.”

“그래서 그건 또 무슨 이야기죠?”

알릭의 질문에 루산이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신께서 세상에 처음 힘을 내려보내셨을 때, 우매한 사람들은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해요. 혼란과 재앙으로 가득한 세상이라 모두 검은 달의 힘을 믿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신의 현신이자 사자인 ‘오르헤’가 검은 달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쳐 사람들 앞에서 신의 힘이 진짜 존재한단 사실을 증명했다는 이야기예요.”

유더는 오래 전 한 번 읽어 본 태양신 경전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듣고 나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듯도 했다.

‘사자 오르헤 이야기… 아마 사지를 열 번 찢겼는데도 열 번 모두 신성력으로 치유했다던 기적에 관한 이야기였나.’

지금이야 찢긴 사지를 열 번 붙이는 정도는 신성력이 강한 사제 몇 명만 대동하고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신성력을 몰랐을 아주 옛날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화제가 지나간 뒤에도 루산과 알릭은 대화가 잘 맞는 친구처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더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칸나를 지켜보았으나 그녀의 감긴 눈은 아직 떠질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때 조금 더 살펴보고 나서 읽어 보라고 할 걸 그랬어.’

여태 칸나가 읽어낸 정보는 대부분 생각과 의지를 지닌 인간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때문에 붉은 돌에 힘을 쓴다 해도 아무것도 읽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판단했으나, 키시아르와 유더는 그렇다 하더라도 안 해 보는 것보다는 시도해 보는 쪽이 나으리라 생각했었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논.”

약초를 모두 정리한 뒤 무료하게 앉아 있던 이논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왜 그랬는지 물어도 될까.”

“뭘?”

그는 오히려 유더 쪽이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유더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가 짓이기듯 엉망으로 손질하던 약초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이논이 루마의 가디언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오래 산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 이전 생의 그가 알려주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정확히 대마법사 루마와 어떤 관계이며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랐다.

‘심지어는 이논이 루마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걸 들어본 일도… 한 번뿐이었나.’

유더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이논은 루마조차 성공한 적이 없는 마법이라며 화를 냈었다.

“혹시 네가…….”

“다른 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밥이라도 먹고 오든가, 산책이라도 해. 어제까지 누워 있던 놈한테 그런 눈빛을 받는 것만큼 별로인 일도 없거든?”

루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게 불편했을까 봐 물어보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 이논이 곧장 말허리를 잘랐다. 가까이 다가온 이논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네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는 그 ‘내’가 진짜 있었다고 해도,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너랑 그렇게까지 친밀한 대화는 안 나누고 싶다고. 우린 아직 그런 사이 아니야. 알겠어?”

기분이 안 좋은 상태다. 그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논은 이논이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사과했다.

“미안. 주제넘었어.”

“…….”

이논이 앞머리를 헝클며 돌아섰다. 유더는 그에게 나중에 레몬을 몇 알 가져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칸나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터라 나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유더는 어젯밤 미처 읽지 못하고 잠들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들었다. 키시아르가 보내 준 벨트레일의 연구기록이었다. 혹여 마법사인 알릭이 관심을 보일까 싶어 커튼을 단단히 치고 종이를 펴자 정갈하게 옮겨 적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대충 보느라 몰랐으나 눈에 익은 우아한 글씨체의 주인공은 금세 짐작이 갔다.

‘키시아르…….’

눈코뜰 새 없이 바빴을 사이에 대체 언제 시간을 내어 이것을 다 적었을까. 번짐 하나 없이 줄을 맞추어 쓴 글씨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어제 희게 질린 얼굴로 단복 상의를 밀어 벗겼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더는 몇 장의 종이에 정리된 글을 금세 모두 읽었다. 키시아르는 읽는 이가 파악하기 쉽도록, 벨트레일의 연구기록 원본에 적힌 문장을 옮겨적고 나서 밑에 따로 짧은 요약을 덧붙여 두었다.

비록 벨트레일이 했던 연구가 일관성도,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범죄 행위였다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난 몇 가지 현상이 존재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요약해 둔 부분들 중 눈에 띄는 몇 문구를 반복하여 읽었다.

- 발정기에 이른 알파와 오메가 각성자 사이에서는 성적 이끌림이 반드시 발생한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른 듯하다. 한 알파는 어떤 오메가와는 며칠을 성교했음에도 상대를 바꾸고 나서는 하루도 성교하지 않았다. 한쪽이 발정기가 아닐 경우에도 성적 이끌림은 발생하나, 한쪽이 정상 상태인 만큼 성교에 이르는 확률이 지극히 낮아지는 듯.

- 발정기에 이른 알파와 오메가 각성자 사이에서 일어난 성교에 의한 임신이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메가 각성자는 각성자가 아닌 이와의 성교에 의해서도 임신할 수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된다.

- 2성 발현을 끝낸 각성자 사이에서는 발정기가 아닐 때에도 특정 신체적 반응이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향’이라 불리는, 그들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존재하며 그 외에도 고양감, 성적 흥분, 지나친 보호의식, 동료의식을 넘어선 일체감 등의 반응을 확인했다. 1성이 동성인 관계라도 마치 이성을 대하듯 상대를 인식하게 되는 듯.

- 각성 후 2성 발현을 거치며 한번 더 변화한 신체가 각성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질병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확실히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성 발현을 한 각성자는 발정기에 확실히 연약해지므로, 발현하지 않은 각성자에 비해 약점이 존재한다 보아도 될 듯하다.

마지막까지 반복하여 모두 읽고 나니 맨 마지막 장의 뒷면에 키시아르가 덧붙여 둔 글이 하나 더 있었다.

- 사실 이 불쾌한 글들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다. 곧 새롭고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될 테니까.

아주 작고 희미한 글씨였다. 그러나 유더는 그 글을 본 순간 갑자기 심각했던 기분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복 겉옷을 걸치고, 종이를 몇 번 작게 접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밖으로 나가려 걸음을 옮기자 이논이 심드렁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게?”

“단장실.”

의료부를 떠나 위로 올라가는 동안 마주친 마병단원 몇 명이 이제 다 나았느냐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스쳐지나 5층에 도착하니 세상이 무너진 듯 울적한 얼굴로 단장실 앞을 서성이는 타이스 율만이 있었다.

“율만 님. 왜 거기 계십니까?”

“자네도 왔는가?”

“대화는 끝내셨습니까.”

잠시 반색했던 그의 얼굴이 유더의 질문에 이내 도로 어두워졌다.

“허어. 아니야. 실은 아직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네.”

“예? 단장님께서 안에 안 계십니까?”

“아니. 그런데 부관이란 자가 단장님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며 나중에 오라고 하더군. 아니, 해가 중천에 뜬 지가 언젠데 이렇게 급한 때에 말이야……!”

초조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노려보던 타이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한 번 두드려 보지 그러나. 내가 계속 몇 번 두드렸더니, 그자가 이제는 나와 보지도 않아. 자네는 보좌이니 그분이 잠들어 계시다 해도 미리 들여보내 주겠지.”

“아뇨, 저는…….”

유더는 키시아르가 정말 잠들어 있다면 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일 경. 들어오십시오.”

마치 그가 여기 오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자연스러운 모습에 노마법사가 거 보라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거보게. 들어가서 나도 좀 안으로 들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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