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이번 생에 그가 각성한 이유에 대해 짚이는 점은 하나뿐이었다. 알릭이 그동안 내내 지하에서 붉은 돌과 가장 가까운 곳을 돌아다니며 일했다는 사실이었다.
유더는 이전에 붉은 돌이 떨어진 산을 지키던 병사들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은 비율로 각성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번 경우가 그때와 거의 비슷한 인과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찾아들었다.
“신기하네요. 그렇게 속성마법을 배우고 싶었어도 타고난 마력이 부족해 불가능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그 기분을 체험해 볼 줄이야……. 하하. 콧대 높던 진주탑 동료 놈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네요!”
유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알릭은 계속해서 물방울을 불러냈다. 그간 한번도 속성마법을 써본 적은 없었다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바가 있어서인지 적응이 빨랐다. 제법 다양하게 능력을 시험하는 모습을 보며 유더는 알릭이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느낄 수 있었다.
‘불러낼 수 있는 물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마법사이니 그 정도로도 충분히 잘 써먹을 방법을 찾아내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마법사들 중에서 대우받는 이는 화려한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들이다. 이제는 전설이 된 대마법사들이 하나같이 그랬으니까.
유더는 시선을 돌려 알릭의 옆 침대에 앉아 있는 그의 스승을 보았다. 흥분한 제자와 달리 타이스 율만은 약간 미묘한 표정이었다.
“각성이라니…….”
그는 이후 한 시간 정도 말이 없었다. 혹 의기소침했나 생각했던 유더는 알릭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뜬 틈을 타 제 곁으로 달려온 타이스를 보며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가득한 감정은 이전과 다른 무언가를 깨달은 자의 놀라움이었다.
“유더. 뭔가 이전에 놓쳤던 부분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의견 좀 내줄 수 있는가?”
어제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묻지 않겠네. 빠르게 속삭이는 얼굴에서 어제 실험을 진행 중이던 때와 비슷한 광기가 살짝 맴돌았다. 유더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내 제자 녀석이 각성한 걸 보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
커튼을 둘러 주변의 시선을 차단한 노마법사가 혹시나 유더가 생각을 바꿀까 싶었는지 엉덩이를 옆 의자에 단단히 붙이고는 아주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그간 너무 당연하다고만 여겨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네들이 각성한 건 붉은 돌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후이지 않나? 그러니까… 붉은 돌이 내뿜은 힘이 전 대륙으로 퍼졌기 때문이었지.”
“예.”
“유더. 자네는 현재 각 나라에 있는 각성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
“그걸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확실한 건 각성자는 붉은 돌이 떨어진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라네. 내 친구 중 한 녀석이 저 멀리 떨어진 북쪽 끄트머리의 캄에서 살고 있는데, 거기엔 각성자가 여태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하더군. 캄이 아무리 작은 섬나라라지만 그래도 한 왕국을 이룰 만큼 사람이 많은 곳인데 말이네. 캄 이외에도 그쪽 부근의 나라들에는 각성자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지.”
그렇게 말한 뒤 타이스 율만은 목이 타는 듯 침을 삼켰다.
“나와 내 제자는 며칠 내내 실험을 준비하느라 붉은 돌과 같은 장소에 있었네. 그렇다면 혹 그 돌의 힘에 가깝게 노출될수록 각성자로 변화할 확률이 높다 보아도 그리 이상한 추측은 아니지 않겠나?”
말은 질문 형식이었으나 타이스의 안에서는 이미 확신이 든 듯했다. 유더는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돌을 가져올 때 듣고 본 바가 있어 저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생각 중이었습니다.”
“듣고 본 바? 그게 뭔가.”
붉은 돌이 떨어진 곳 근처를 지키던 병사들 사이에서 유난히 많은 각성자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이는 현재 유더를 제외하면 키시아르뿐이었다. 타이스 율만에게 알려 준다면 무언가 생각지 못한 지점을 꿰뚫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저 혼자만의 판단으로 그를 믿고 알려주어도 괜찮을지 조금 의문스러웠다.
고민하는 유더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노마법사가 재빨리 유더의 소매를 붙잡고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미 여기서 일어난 일을 다른 곳에 언급하지 않기로 서약까지 한 몸이네. 알지 않나? 절대로 비밀을 지킬 테니 말해주게. 이 연구에 남은 평생을 바치라 해도 바칠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결국 유더는 그에게 간략히 그때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말해 주었다.
“별건 아닙니다만 그 돌을 가져올 때 만났던 병사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붉은 돌이 떨어진 산맥을 수색하던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놀라운 비율로 계속해서 각성자가 나왔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정작 제국군 상부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고 병사들 본인마저도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아 2년 내내 누구에게도 보고가 올라간 적이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유더 자신이 그 일을 직접 듣고 조사했다는 사실은 빼고, 키시아르가 그 일을 알게 된 뒤 심상치 않게 여겼다는 말만 대충 돌려 해 주고 나자 한참 조용하던 타이스 율만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군.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
“변화. 그 돌은 인간을 변하게 하는 힘을 지닌 거야.”
유더의 대답이 없이도 그는 계속해서 빠르게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을 토해냈다.
“무슨 기준으로 변화가 결정되는 걸까. 가장 큰 원인은 힘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또 많이 받아들이느냐겠지. 마력을 타고난 아이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성자가 대부분 젊은이인 이유도 변화와 성장에 익숙한 육신이어서일지도 몰라. 대체 어떤 식으로 몸을 바꾸어 어떻게 변하게 만드는 걸까! 정말 알고 싶어 살 수가 없군. 공기 중에 이미 퍼져나간 힘들도 마력처럼 따로 분리하여 몸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노마법사의 번쩍이는 눈에 비친 열망은 어제 실험을 하던 때보다도 더해 보였다.
“잘만 된다면 우리가 분리해 낸 힘을 통해 원하는 사람을 각성자로 바꾸거나 이미 각성자인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마치 마법이란 게 처음으로 등장했던 천 년 전, 대마법사 루마의 마력 혁명과 같은 기적을 진짜로 내가! 아니, 우리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네.”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흥분한 숨을 감추지 못한 그가 기어이 커튼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자리를 비운 이논 대신 약초를 다듬고 있던 루산과 알릭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스, 스승님? 어딜 가세요?”
“단장님을 뵈어야겠다! 당장!”
대답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알릭이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이 왜 저러시는 거죠? 직전에 루마의 마력 혁명 이야기가 어쩌구 하는 말씀을 하셨던 듯한데……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뇨. 맞습니다.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시다 갑자기 뛰쳐나가셨습니다.”
“또 뭔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마구 말을 건너뛰셨나 보네요.”
알릭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더는 도로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은 알릭을 향해 ‘그런데…….’ 하고 입을 열었다.
“마력 혁명이 뭡니까.”
“아. 그거요.”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인지 알릭이 심드렁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스승님과 제가 연구하던 초창기 마법과 마력 분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에요. 루마에 대한 전설이 워낙 많아 사실 정말 있었던 일인지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요. 저도 그렇고요.”
그때, 이논이 자리로 돌아왔다가는 알릭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유더는 그가 루마라는 이름에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논이 돌아오든 말든 말을 멈출 이유가 없는 알릭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루마가 활동했던 천 년 전에는 마법이 악마의 사술처럼 취급받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 시대의 마법사들은 거대한 힘을 다루는 만큼 수가 적고 체계도 없어 후계자를 만들기 어려웠다고 전해지죠. 루마는 열 개의 시험을 이겨내고 마법과 마력을 인간의 힘으로 다룰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마법을 온 세상에 지금처럼 퍼트렸다고 합니다.”
“사실이라면… 대단하군요.”
유더는 대답을 하며 이논의 표정을 살폈다. 루산의 곁에 조용히 앉아 약초 잎을 다듬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죠. 하지만 이 이야기가 성립되려면 천 년 전에는 마법이 아주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생각해야 말이 되니 좀 믿기 힘든 일이긴 해요. 그래서 스승님과 저는 그 이전에도 세상에 마력과 마법이 존재했으나 기록이 소실되었다고 보고 마력의 밝혀지지 않은 고유한 성질을 연구하고 있었죠.”
“앗, 이논님! 약초를 그렇게 막 찢으시면 안 되죠.”
그때, 조용히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산이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유더는 이논의 손 안에 있던 약초 잎이 이전까지와는 달리 몹시 거칠게 뜯긴 상태가 된 광경을 보았다.
“……그렇군요.”
“실제로 오르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의 고대 기록을 살피면… 아 물론 진위 여부를 확신하기는 좀 힘든 것들이긴 하죠. 아무튼 그때는 마법사와 마법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루마의 마력혁명을 믿는 사람들도 많아요.”
“설마 하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진짜로 여태까지 발견된 것 중엔 하나도 없어요.”
“그건 천 년 전의 대멸망 때문이 아닐까요?”
이논이 마음대로 찢은 약초 잎을 다시 가져가 다듬던 루산이 불쑥 끼어들었다.
“태양신 경전에 나와 있거든요. 그 대멸망과 관련된 부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