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82화 (182/805)

182화

“…제가 나가서 돕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을 자려다 놀라서 빠져나온 이들이 몇몇 있었을 뿐이니까요. 그보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그가 손에 들고 온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유더는 그 위에 쓰인 내용을 반사적으로 훑었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건…….”

종이에는 알파 각성자와 오메가 각성자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누군가의 관찰 기록이 가득했다. 키시아르가 황궁에서 돌아오던 날 보내주겠다고 말했던 벨트레일의 연구기록이었다.

“공작님께서 이것을 아일 경께 드리기로 약속했다고 하시더군요. 사실은 오늘 일이 끝나는 대로 드릴 계획으로 가져오셨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어 제게 전달하고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느릿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남처럼 낯설게 들렸다. 유더는 손에 쥔 종이를 내려다보다 옆에 대충 내려놓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산더미처럼 많이 있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주커만 경.”

“마침 저도 아일 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 좋습니다.”

허락을 받은 뒤 유더는 곧장 입을 열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빠르게 질문했다.

“아까 단장님께서 쓰셨던 힘은… 진짜입니까?”

누가 들어도 완전히 내용을 추론할 수 없게끔 뭉뚱그려 말했으나 그 ‘힘’이 키시아르가 마법진을 제어하던 모습과 관련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네. 보신 대로입니다.”

역시. 유더는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키시아르가 마법진을 알릭보다도 능숙하게 제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각성자의 힘. 신력. 검기. 거기다 이제는 마법인가.’

그래도 인간인데 설마 마법까지는 쓰지 못할 줄 알았다. 수많은 마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지만 그게 곧 그가 마법사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미 나머지 세 개의 힘을 한 사람이 사용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랄 만한 일이 하나만 존재하면 몰라도, 몇 번이 중첩되다 보면 서서히 감정이 둔해지는 법이다. 때문에 유더는 키시아르가 마법진을 밟고 제어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다른 이들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이논이 보여주었던 키시아르와 관련된 정보 중에 ‘어린 시절 궁중마법사들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소문이 존재한다’는 부분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의료부로 돌아와 침상에 다시 누웠을 때였다.

“알겠습니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하신 건 그것뿐이셨습니까?”

“네.”

어차피 나머지는 키시아르 본인에게 물으면 될 터다. 그가 당장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한 발짝 물러서면 그만이었다.

유더의 답을 들은 나단은 남국인 특유의 붉은 얼굴 위로 드문 표정을 일순 드러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질문드리겠습니다. 아일 경이야말로 그때 했던 일은 대체 어떻게 일으키신 겁니까.”

그의 시선이 유더의 오른손에 와 닿았다. 유더가 붉은 돌에서 흘러나온 기운의 끝을 붙잡아 그대로 멈추게 만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는지 몹시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제가 각성자는 아니지만, 그때 그건…….”

“…….”

“저도 검기를 쓸 수 있고, 모시는 분께서도 다소 특출하신 분이다 보니 보통 사람을 초월한 능력에 대해도 보다 아는 바가 많다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처음으로 봤습니다. 만약 그런 기적을 일으킨 분께서 저의 적이라면 어떻게 될지 잠시 상상해 보았을 뿐인데도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상상력이 좋으시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나단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일전에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죠. 그때는 몰라도 시일이 지나면 저를 이길 자신이 있으시다고 말입니다.”

“네.”

“혹 그 힘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셨습니까?”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유더를 향한 의혹과 경계가 희미하게 읽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혹 키시아르의 적이 되지는 않을지, 지금은 적이 아니더라도 정말 완전히 믿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감정이 유더는 상당히 기꺼웠다. 그의 의혹은 오직 키시아르만을 따르는 충직한 기사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그가 유더가 내보인 힘에 쉽게 압도되었거나 의심을 풀었다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여겼으리라.

유더는 이전 생의 나단 주커만을 떠올렸다. 저토록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강인한 소드마스터가 키시아르가 죽던 날에는 펠레타 성에 없었다. 카치안 황제는 나단 주커만이 펠레타 공작의 명을 받고 자리를 비웠으니, 그때야말로 임무를 해낼 최적의 날이라 말했다.

만약 유더가 그날 그와 마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리 쉽게 임무를 완수할 수는 없었으리라…….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주커만 경.”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주커만 경에게 그 말을 했던 건 손에 부상을 입기 전입니다. 오늘과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아마도 손에 부상을 입은 일과 관련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

“걱정하시는 바와 같이 제가 단장님을 배반하거나, 적이 될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 달라는 말을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의심이 된다면 되는 만큼 저를 지켜보아 주십시오.”

그의 의심과 경계가 강해질수록 키시아르 라 오르를 이전 생에서처럼 허망하게 죽지 않도록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더는 기꺼운 마음으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일 경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유더를 낯설게 바라보던 나단 주커만의 입에서 결국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처럼만 해 주십시오.”

“…….”

나단 주커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더를 내려다보다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도 오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그 은혜는 언젠가 갚겠습니다. 쉬십시오.”

그가 사라진 뒤 유더는 자꾸 찾아드는 과거의 생각을 떨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오늘의 일은 어차피 오늘로 끝이다. 앞으로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과거를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

다음날, 탈진 상태에서 벗어난 마법사들이 비로소 눈을 떴다. 타이스 율만은 몹시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유더의 주변을 맴돌았으나 유더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릭 펠긴은 그가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을 조금 잃은 상태였다. 실험이 실패했을까 봐 몹시 겁에 질렸던 그는 성공했다는 말에 기뻐했지만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듣고 나서는 입을 다물었다.

펠레타 공작이 그 대신에 타이스를 도와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했을 터였다.

그러나 알릭에게 일어난 불운하고 놀라운 일은 비단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력이 이상하게 변하셨다구요? 고갈과 탈진에서는 이제 회복되셨는데… 왜 그럴까요.”

루산이 알릭의 침대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묻자 알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와는 뭔가 달라요. 다시 깨어난 뒤부터 제 몸 안에 뭔가가… 남의 마력 같은 게 새로 들어온 듯한 이상한 느낌이 있다구요. 사제님. 전 정말 괜찮은 걸까요?”

“알릭. 기초 마력 운용을 다시 한 번 돌려 보면 뭐라도 가닥이 잡히지 않겠느냐.”

옆 침대에 누워 있던 노마법사가 충고를 건넸음에도 알릭의 찌푸린 얼굴은 여전했다.

“그건 이미 해 봤습니다, 스승님. 하지만 그 낯선 기운과 본래의 마력이 마치 따로따로 제 몸을 차지한 것처럼 느껴져서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누운 채 듣고 있던 유더는 문득 어떤 기시감을 느끼고 일어나 앉았다.

“…그 힘. 따로 움직이실 수도 있겠습니까?”

갑작스레 끼어든 그 때문에 놀란 알릭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그는 이내 눈치를 보며 눈을 살짝 내리깔고 ‘음…….’ 하는 침음을 흘렸다.

“어어… 가능할 듯도 한데 말입니다…….”

“마력처럼 움직이려 하지 마시고,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사용해 보십시오.”

“자연스럽게라니. 어떻게……. 엇?”

그 순간, 알릭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제 앞에 스르르 나타난 물방울들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무, 물 속성 마법?”

“아니, 너는 속성마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알릭.”

“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딱히 마법을 사용하려 한 적도 없었는데…….”

“각성입니다.”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두 마법사에게 유더는 조용히 사태의 원인을 알려주었다.

“물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하신 모양이군요.”

“제… 제가 각성을 했다고요?”

알릭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앞을 떠다니는 물방울과 유더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악한 건 노마법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각성이라니. 확신하는가? 내 제자가… 각성자가 되었다고?”

“지금 쓰신 그 힘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까.”

마법처럼 정해진 공식과 마력 운용을 위한 수련이 없이도, 기사처럼 매일같이 굳은살이 박이도록 검을 수련하며 기운을 모으지 않아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양 사용할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각성자의 능력이 여태까지의 모든 능력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이 아니었던가.

유더의 담담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알릭에게 쏠렸다. 알릭은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물을 불러냈다가 사라지게 하는 일을 반복한 뒤 떨리는 눈으로 입을 벌렸다.

“저, 정말인가 보네요. 이럴 수가……. 저는 마법사인데 어떻게 각성자가 될 수 있죠?”

“마법사라 하여 각성할 수 없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알릭.”

아마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 아마 어딘가에는 알릭 외에도 마법사 각성자가 있기는 할 터다. 그리고 앞으로도 드물기는 해도 계속 생겨나겠지.

‘비록 이전 생에서 마법사이며 각성자라고 밝혀진 유명인사 중 알릭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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