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유더는 저를 보던 노마법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전보다 더한 놀라움으로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기절한 알릭 대신 마법진을 밟고 선 사내의 발밑에서 사납게 날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얌전해진 흰 빛이 반짝이며 빛을 냈다.
“큰일 날 뻔했군.”
타이스 율만의 시선을 무시한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붉은 돌의 힘을 붙잡은 건 확실해 보이는데. 맞나?”
유더는 아직도 제 오른손 안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펴자,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사라지며 얼음처럼 멈추어 있던 붉은 기운이 아주 천천히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런… 듯합니다. 단장님께서는 진을 제어하신 겁니까.”
“그래.”
운 좋게도 하나씩 맡아 처리한 덕에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숨을 돌리며 타이스 율만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노마법사가 엉망이 된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체…….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는 각성자의 힘만 지니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이 진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절대 홀로 제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런……. 게다가 저건.”
마지막에 ‘저것’이라 지칭할 때 그는 무어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유더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표정이었다.
“타이스 율만.”
키시아르가 침착하게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연구를 빨리 진행하려는 다급함에 욕심이 앞서 제자의 상태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당신에게 할 말은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지금 있지 않소. 나라고 쉽게 버티고 있는 건 아니니 최대한 빨리 일어나 일을 마무리했으면 좋겠군.”
“아…….”
“아니면, 이대로 포기할 텐가.”
타이스 율만의 더러워진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며 숨을 헐떡였다.
“…아, 닙니다.”
키시아르 한 사람이 진을 제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일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한번 유더의 손에 잡혔던 붉은 기운이 기이할 만큼 얌전해진 것 또한 한 이유였다.
유더는 타이스 율만이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묵묵히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아직도 손안에 저 붉은 기운을 손에 쥐고 움직였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아스라이 남은 상태였다.
대체 그건 무엇이었을까.
***
드디어 타이스 율만이 마지막 남은 검은 돌에 붉은 돌의 힘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키시아르가 진을 밟고 있던 발을 거두어 뒤로 몇 발짝 물러나자, 완벽하게 제어되던 흰 빛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공간을 메운 마법진들이 내뿜던 빛 또한 함께 사그라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느른해 보였으나, 뺨에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쉽게 버틴 게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유더는 그때야 확신했다.
모든 빛이 사그라진 뒤 남은 건 깊은 물속에 있는 것 같은 침묵뿐이었다.
“유더. 아직 벽은 거두지 말게.”
키시아르가 주변을 둘러보며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나단. 기절한 이를 뒤쪽으로 옮기고 저 매개체가 든 바구니를 지켜라. 그리고 칸나.”
“네.”
이제 네 차례라는 명 없이도 칸나가 굳은 얼굴로 앞에 나섰다. 유더는 제 앞에 얌전히 놓여 있는 붉은 돌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 돌에서는 정말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단장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칸나가 만지기 전에 제가 우선 접촉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직접 접촉 대신 힘으로 가볍게 해 보겠습니다.”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오면 손으로라도 먼저 만져볼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키시아르는 미간만 한 번 찌푸렸을 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유더는 모두의 앞에 친 방어벽에 더욱 힘을 불어넣은 뒤 가느다란 바람을 불러내어 붉은 돌 쪽으로 날려 보냈다.
“…….”
이전에는 각성자의 힘이 닿자마자 강렬한 힘을 발산했던 붉은 돌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던 탓인지 칸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나 붉은 돌은 정말로 평범한 돌이 된 듯 잠잠히 그 바람을 받아냈다. 물을 떨어트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속으로 숫자를 열까지 천천히 세고 나서 정말로 아무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 뒤 비로소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확인했습니다. 힘과 돌이 완전히 분리된 게 맞는 듯합니다.”
“후우.”
칸나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제 내 차례네. 내 앞의 이 벽 좀 거두어 줄 수 있을까?”
유더는 물을 거두고 바람은 남겼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바람을 느꼈는지 희미하게 안심한 표정을 지은 칸나가 제 손바닥만 한 돌 앞에 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유더는 그녀가 아지랑이처럼 기운이 피어오르는 손끝을 천천히 돌 위에 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부가 완전히 돌에 접촉함과 동시에 눈을 감고 있던 칸나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떨렸다.
“칸나?”
“…….”
“칸나 완드.”
키시아르가 신중히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칸나의 몸이 돌연 나무토막처럼 굳어 뒤로 넘어갔다.
“칸나!”
유더는 그녀의 머리가 땅에 닿기 전 바람을 이용하여 간신히 부딪치지 않게 보호했으나, 기절한 칸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유더는 황급히 모든 방어벽을 거두고 칸나에게 다가가 몸을 살폈다.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뒤이어 그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다가온 키시아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칸나의 손안에서 붉은 돌을 비틀어 빼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유더는 미처 그를 막지 못했다.
“단장님!”
“괜찮네.”
뒤늦게 깜짝 놀라 불렀으나 칸나와 달리 키시아르는 기절하지 않았다. 맨손 위에 쥔 돌을 신중히 몇 번 매만지며 굴려 본 그의 얼굴 위로 서늘한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기절한 이유는 능력을 쓴 일과 관련이 있다 생각하는 쪽이 좋겠군.”
“…….”
“일단 기절한 두 사람을 의료부로 모두 옮기고 나머지도 함께 따라가 몸을 살피도록 하게. 매개체를 담은 바구니는 단장실에 가져다 두어 내일 다시 보지.”
유더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타이스 율만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돕겠습니다.”
“도울 필요는 없네.”
그러나 키시아르의 답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의료부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까지 시킬 수는 없지. 일단 가기 전에 상태를 잠깐 살펴도 되겠나?”
“예?”
답을 하기도 전 가까이 다가온 키시아르가 유더의 단복 상의자락을 열고 드러난 셔츠 자락을 어깨 바깥쪽으로 휙 밀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밀어낼 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더가 내심 당혹한 사이, 그의 얼굴 위로 낯선 표정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예상했던 정도로 심하진 않은 모양이군.”
서슴없이 드러난 어깨는 깨끗한 본래의 살색을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이전에 동부에 다녀왔을 때 어깨까지 번졌던 반점을 기억하고 확인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당장 확인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 그 광경을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짧은 답에 말을 잇지 못하자 키시아르가 잠시 후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고통은?”
“없습니다.”
“정확하게 대답하게.”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붉은 돌의 힘을 만질 수 있을 듯하다고 생각했던 때 이후로, 힘을 계속 쓰는 동안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사람에게 계속 방어벽을 둘러주고 있었는데도 반점이 생기기 이전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매끄럽게 힘을 썼던 듯도 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유더는 제 스스로 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감각을 떠올리며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키시아르 또한 눈을 내리깔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자네가 붉은 돌의 힘을 누를 수 있었는지는 이따가 듣도록 하지.”
그는 아무래도 유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일단 올라가서 의료부에 가 있게. 루산 사제에게 곧장 치료를 부탁하고.”
“알겠습니다.”
“나단. 이들을 의료부로 데려가는 건 네게 맡긴다. 이곳은 내가 살필 테니 곧장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충실한 부관은 이번에도 키시아르의 말에 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유더는 진이 빠져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타이스 율만을 부축하고 기절한 두 사람을 양팔에 짊어진 나단 주커만과 함께 지하실을 나섰다. 지하실을 나서기 전 바라본 키시아르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윽고 문 뒤로 사라졌다.
***
“이게 대체 다 뭐냐.”
실려 온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이논은 기가 막힌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건물이 흔들린다 싶더니, 처음 보는 환자에 원래 여기 있다 나간 놈까지 단체로 들어오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유더는 그가 다른 이들을 피해 귓가에 속삭이는 추궁을 한 귀로 흘리며 옆 병상에 누운 칸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잠을 자고 있는 듯 새하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듣고 있는 거냐? 대체 뭔 짓을 한 거냐니까!”
“붉은 돌.”
작게 대답하자 이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