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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79화 (179/805)

179화

유더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붉은 돌이 들어 있는 상자를 살폈다. 바로 앞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자 사슬에 묶인 짐승처럼 억눌려 울렁이는 힘이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마법진으로 억눌러 두었는데도… 만만치가 않군.’

장갑을 낀 양손을 꽉 쥐었다 펴며 투명한 상자의 양옆에 대었다. 거대한 지하실 내부가 온통 끓어오르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상자를 벗기기 전 유더는 키시아르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그는 칸나와 나단을 보호하듯 앞에 선 채 유더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면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인다 여길 만하였으나 팽팽히 당겨진 기운을 보면 사실은 조금도 방심하고 있지 않음이 느껴졌다.

그거면 되었다 생각한 순간 그와 유더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유더 아일.”

“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판단되면 즉시 물러나도록.”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유더는 곧장 힘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투명한 상자의 윗부분을 천천히 벗겨냈다.

“……으음. 어떤가?”

“괜찮습니다.”

신중하게 질문한 타이스 율만이 유더의 답에 기쁜 기색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좋아, 좋아. 진을 만드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당연한 일이지! 이제 차례차례 넣는 일만 남았구나, 알릭!”

“네, 스승님.”

“다음 진을 발동시킨다. 준비하거라.”

힘을 외부와 차단해 주던 가장 강한 보호막이 사라졌으나 붉은 돌에서 흘러나오는 압박감은 확실히 이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유더는 드러난 붉은 돌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타이스 율만이 돌 가까이로 조금 더 다가와 신중히 무어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주 낮게 웅얼대는 목소리라 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뒤이어 제자 알릭도 주문에 동참하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지닌 기이한 울림이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울림이 점점 더 커짐과 동시에, 어느 순간 마법사들의 발밑에서부터 흘러나온 푸른 빛이 그저 하얗게 그려져 있던 마법진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지하실 전체를 메운 수십 개의 진을 이룬 굵은 선들이 서로 옮겨붙는 불꽃처럼 하나하나 덧그려지며 빛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와……!”

멀리서 칸나가 작게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 또한 이런 대규모 진을 움직이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기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진을 이룬 선이 하나의 빛으로 이어지며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백, 수천의 유성처럼 아름답게 반짝이자 붉은 돌이 놓인 탁자 바로 밑에 있던 중앙 진에서 선명한 흰 빛이 피어올라 돌을 감쌌다.

쿠우우우.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강렬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유더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흰 빛 안에 갇힌 붉은 돌의 변화를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흰 빛과 붉은 돌에서 흘러나온 거친 기운이 서로 맹렬히 부딪치고 휘감기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으르렁대는 중이었다. 그토록 많은 진에 억눌린 상태로도 쉽사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붉은 돌의 강한 기운 때문인지 타이스 율만과 알릭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알릭!”

“네!”

스승의 부름에 응답한 알릭이 손을 휘젓자 몇몇 진 위에 놓여 있던 영문 모를 도구들이 서로 다른 색으로 빛을 냈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흰 빛이 도와주는 힘을 받은 듯 더욱 강렬해지며 간신히 붉은 돌의 기운을 붙잡아 엉긴 채 위로 죽 끌어당겼다.

“성공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흰 빛에 비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붉은 돌의 기운이 새빨갛게 변화하는 모습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매개체를 준비해라, 어서!”

타이스 율만이 땀을 줄줄 흘리며 손을 내밀자 알릭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던 검은 돌 하나를 집어 스승에게 건넸다.

“자, 어서 들어와라!”

검은 돌을 쥔 노마법사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부름에 반응하듯 붉은 기운을 옭아맨 흰 빛이 울부짖는 듯한 진동과 함께 아주 작은 빛의 갈래로 갈라져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타이스 율만은 적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그 빛의 갈래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아주 작은 마력이 빛을 붙잡아 멈추게 한 뒤 서서히 끌어당기자 이내 검은 돌이 다가오는 힘에 반응을 시작했다. 마침내 돌의 표면에 닿은 붉은 기운은 순식간에 구멍 사이로 빨려드는 물처럼 몸부림치며 빙빙 돌다가는, 슥 하고 사라져 버렸다.

“크…….”

이를 악물고 있던 타이스 율만이 붉은빛을 빨아들여 붉게 변한 검은 돌을 내려다보며 일순 감동에 찬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빠르게 갈무리되었고, 냉철한 판단만이 빈자리에 가득 찼다.

“좋아. 예상대로 될 듯하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돼. 알릭, 버틸 만 하느냐?”

“예.”

알릭이 잔뜩 지친 얼굴로 힘겹게 대답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거라. 방금과 같은 일을 이제부터 수십 번은 해야 할 테니.”

이후 두 마법사는 수없이 연습해 본 양 일사불란하게 검은 돌 안에 붉은빛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빈 바구니 안에 도로 넣기를 반복했다. 마냥 거대하게 느껴지던 붉은 기운이 야금야금 뜯어먹힌 나뭇잎처럼 점차 줄어들어 가자 지하실 내부를 가득 채운 압박감이 서서히 변화했다.

머리를 짓누르던 어지러움이 사그라지기 시작했지만 붉은 기운이 사라질수록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흰 빛이 강해진 통에 공기의 흐름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스 율만이 붉은 돌 안에 차 있던 힘이 사라지고 나서가 더욱 위험할 것 같다고 말하더니, 이걸 예견했기 때문인가.’

유더는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직까지는 붉은 돌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흰 빛에 꽉 잡힌 채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있다지만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알릭! 눈을 뜨거라. 하마터면 돌을 떨어트릴 뻔했어!”

“죄…송합니다, 스승님.”

마법진 안에 들어가 흰 빛을 스승과 함께 제어하랴, 검은 돌을 전달하랴 정신이 없던 알릭 펠긴의 속도는 검은 돌이 절반쯤 떨어질 때부터 확연히 느려졌다. 타이스가 다급한 얼굴로 독촉을 했으나 그는 점점 깜박깜박 감기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알릭.”

“크윽… 스승님. 인력이 예상보다 더욱 강해져서……. 차라리 시간을 더 끌더라도 제어하는 진의 경로를 잠시 우회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대로는…… 정말 실수할 듯합니다.”

“우회를 하자니. 시간을 끌어봤자 어차피 견뎌야 하는 양은 같다! 몸에 좋을 게 없어!”

“하지만……. 정말 못 참겠습니다. 점점 더 너무 힘들어서…….”

“이 녀석이. 그러게 어제 잠을 좀 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평소의 너라면 이 정도까지는 아직 버틸 수 있는 정도야!”

“그렇지만…….”

말을 잇던 알릭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손을 떨었다.

“크, 으으윽!”

붉은 기운이 흰 빛에서 벗어날 듯 몸부림침과 동시에 알릭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으아악.”

사고는 순식간에 발생했다. 알릭이 넘어지며 부딪친 검은 돌이 든 바구니 안에서 아직 남아 있는 많은 돌들이 일제히 여러 개의 진 위로 쏟아졌다.

“이런!”

아슬아슬하게 겨우 균형을 지키고 있던 두 기운이 순식간에 일변하며 사납게 깨지고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반 정도 남아 있던 붉은 빛이 마침내 사슬에서 풀려난 듯 포효하면서 지하실 내부 전체로 퍼져나갈 듯 몸부림치자 타이스 율만이 욕설을 내뱉으며 손을 휘저었다.

“빌어먹을!”

그는 필사적으로 진을 제어하려 애썼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유더는 알릭이 정신을 완전히 잃고 눈동자를 뒤집으며 쓰러지기 직전, 곧장 양손을 들어 힘을 사용했다.

‘방어벽.’

볼을 긁는 날카로운 바람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며 공중에서 쏟아진 물과 함께 합쳐져 모든 이를 보호하기 위해 흩어져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드넓은 공간이 좁게 느껴질 만큼 잔뜩 팽창된 기운들이 일시에 훅 강해지며 눈이 멀 듯한 빛을 냈다.

‘…이건…….’

단순히 두 개의 기운이 엉키고 깨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곧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 위험성을 피부가 떨리도록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도 저 폭발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였다. 다급한 의지에 반응한 듯 오른쪽 손등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불에 손을 담근 듯 지글지글 끓는 열기 속에서, 공중을 가득 메우고 있는 힘과 똑같은 붉은빛이 장갑을 뚫고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유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공중을 메운 붉은 돌의 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지금 힘을 사용하면 저 붉은 기운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더는 그 기이한 확신의 정체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 그대로 꽉 붙잡으며 손을 휘둘렀다.

아주 무겁고 단단한 벽을 내리치는 듯한 고통과 함께 붉은 빛이 울부짖듯 소용돌이쳤다. 보이지 않는 힘에 휩싸인 손끝이, 손바닥이, 팔이, 어깨가, 그리고는 마침내 전신이 터질 듯 떨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지하실에 서 있는 중이었다.

아찔한 감각을 삼키며 고개를 든 유더는 폭발하려던 두 개의 힘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정지한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았다. 유더가 불러낸 물과 바람의 벽을 두른 이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움츠린 칸나의 얼굴에는 순수한 경탄이, 그녀를 지키려는 듯 검을 뽑고 앞을 막아선 나단 주커만의 눈빛에서는 드문 놀라움이 확연히 읽혔다. 진 위에 쓰러져 기절한 알릭 펠긴은 답이 없었으나 그 곁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타이스 율만의 경악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생생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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