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78화 (178/805)

178화

“알릭! 도와줄 이들이 오셨지 않느냐.”

“아……. 두 분 모두 오셨군요.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알릭 님, 어디 아프세요? 어제보다 훨씬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흐흐흐… 괜찮습니다. 밤을 새서 솥을 젓다 보니 조금 피로해서 그런 거겠죠. 이 정도야…… 오늘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할 만합니다. 비록 몸에서 열이 끓고 근육이 좀 터질 것 같지만 말이죠……. 차라도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내가 젊을 때는 일주일씩도 했던 일인데, 엄살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타이스가 붉은 돌 주변에 늘어놓은 검은 보석을 집어들었다.

“이게 바로 고대 용의 심장과 요정의 가루, 그리고 시타니움이라는 소재를 섞어 만든 최고의 소재일세. 현존하는 최고의 힘을 담을 그릇이라 장담할 만하지.”

“시타니움이 뭡니까?”

“아. 모르는가? 서로 지나치게 다른 두 재료를 결합해야 할 때 사용하는 합성 물질일세. 잘 부서지는 약한 마석을 강화시킬 때 쓰는 건데 본래는 저급 마도구를 만들 때나 쓰는 싸구려 물질이지.”

“그런 걸 어쩌다 사용하게 되셨습니까.”

유더의 질문에 늙은 마법사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흐흐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네… 어찌 보면 자네 덕이라 할 수도 있어.”

“예?”

“그날, 자네가 내 제자에게 방어용 마도구 팔찌 하나를 얻어가지 않았나? 알릭이 여분의 팔찌를 짐에서 빼내던 중 시타니움도 함께 꺼내왔었는데, 파티날 아무도 없다 보니 워낙 심심해서 이것저것 하던 도중 그걸 한번 솥에 넣어보면 어떨까 싶었지. 그래서 해 봤네.”

유더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비싼 물질들에 그런 실험을 그냥 하셨단 말입니까.”

“허허.”

마냥 웃으며 눈을 피한 타이스 율만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사실 용의 심장과 요정의 가루, 두 개를 따로따로 쓰면 붉은 돌의 힘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온전히 버티지를 못하는 통에 내가 조금 고민이 심했네. 그런데 시타니움이 뜻밖에도 둘을 딱 붙여 융합시키더니 완성된 이 돌이… 이게 생각 외로 아주 대단했어.”

사실 타이스는 시타니움이 그토록 강력한 두 개의 재료를 온전히 섞을 만한 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타니움을 사이에 두고 완벽히 달라붙은 두 물질은 기이하게 뒤섞이고 녹아들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검은 돌이 되었다.

검은 돌을 붉은 돌이 있는 상자 가까이에 가져다대자, 본디 힘을 담는 성질을 지닌 용의 심장과 요정의 가루가 한꺼번에 부드럽게 반응하며 붉은 돌의 힘 앞에서도 부서지거나 대항하지 않았다. 뜻밖의 성공이었다.

“붉은 돌의 힘이 워낙 강력하니 이런 돌 한두 개로는 어려울 듯하여 그때부터 계속 만들고 또 만들었네. 이제 알릭, 저 녀석이 마지막 분량을 만들어내면 끝이야. 결과가 좋으니 과정은 아무래도 좋지 않나. 본래 이 세상의 모든 대단한 발명은 그렇게 이루어진 거라네!”

무모한 마법사다운 말을 내뱉은 그는 알릭이 젓고 있는 솥 안의 물질이 아직 융합되는 도중이라 금빛을 내고 있으나 마무리되면 검게 졸아붙으며 돌처럼 딱딱해질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을 꺼내면 준비가 끝나는 모양이었다.

“스승님! 이제 검은빛이 돌기 시작합니다.”

“오. 끝이 보이는구나. 마지막까지 절대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예에…….”

알릭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솥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다. 유더는 타이스가 제자를 뒤로 하고 다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마법진을 살피고 재료를 손보는 모습을 보며 칸나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칸나.”

“응?”

“조금 물러서 있어. 네 일은 실험이 제대로 끝난 뒤에야 가능하니까.”

칸나의 임무는 붉은 돌과 그 안의 힘이 완전히 분리되면, 껍데기만 남은 붉은 돌의 정보를 읽는 일이었다.

“알겠어. 그러면 너는?”

유더는 여러 겹 겹쳐진 마법진 속에서 억눌린 힘을 내뿜는 붉은 돌에 시선을 고정했다.

“힘을 옮기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때를 대비해야지.”

그때 뒤쪽에서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관 나단 주커만을 데리고 온 키시아르 라 오르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단장님이 오셨어!”

“오셨습니까. 마침 적절한 때에 와 주셨습니다.”

칸나의 반색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바쁘게 마법진을 뚫고 뛰어나간 타이스가 인사를 하자 키시아르가 주변 풍경을 돌아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곧 마지막 준비가 끝날 것입니다. 진행은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할 테니 혹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을 주십시오.”

“알겠소. 기대되는군.”

진을 뚫고 들어온 키시아르는 유더를 보자마자 눈을 슬며시 가늘게 떴다.

“먼저 와 있었나.”

“제가 하기로 했던 일이니까요.”

유더는 여차하면 언제든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붉은 돌 주변에 맴도는 기운의 흐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혹시나 붉은 돌에서 힘이 조금이라도 잘못 새어 나왔다가는 누군가 그처럼 자줏빛 반점이 생길지도 몰랐다. 타이스와 알릭에게 붉은 돌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칸나와 그가 이전에 전해두기는 했다지만, 사고란 안다고 해서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단장님께서도 칸나와 함께 물러나 계십시오.”

“내가 위험하다면 자네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그렇다 해도 이런 때에 앞에 나서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군림패가 전투를 앞두고 맨 앞에 나서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유더는 전술 게임에서 왕 역할을 하는 군림패를 예로 들어 짧게 설명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찔러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 그런데 전술 게임을 배운 적이 있나?”

“…….”

생각해 보니 전술 게임은 반드시 게임 보드와 말이 필요한 탓에 하루를 먹고 살기도 바쁜 평민들은 즐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청년이라면 더더욱 그런 놀이보다는 다른 데 관심을 두는 쪽이 자연스럽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뻔뻔하게 대꾸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의 없을 뿐,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예전에 잠깐 배운 적이 있습니다.”

조부와 함께 산골에서 살다 이후 홀로 몇 년을 살아온 이가 그런 고급 게임을 안다고 하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키시아르의 뒤에 서 있던 나단 주커만이 심히 묘한 눈빛을 보냈으나 유더는 그의 눈을 무표정하게 받아 넘겼다.

“몰랐군. 잘 아는 모양이니 다음에 나와도 함께 해 보지.”

“감히 단장님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겠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것도 똑똑한 학생이 상대라면 더욱 그렇지. 중얼거리며 짧게 웃은 키시아르는 제 부관처럼 의심을 품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 표정을 보며 유더는 문득 이전 생의 그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몰랐던 유더에게 전술 게임을 처음 가르친 이도 키시아르였다. 단장 일을 하는 데 왜 전술 게임을 알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귀족들이 전술 게임에 빗대어 하는 비유들을 적당히 알아듣고 받아쳐 주려면 무조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전술 게임 말고도 은퇴하기 전까지 그가 유더에게 가르친 귀족들의 기본 소양은 더 있었지만, 얼마 전 그가 전술 게임 이야기를 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인지 이 순간이 몹시 묘하게 느껴졌다.

“…….”

“끝났습니다!”

그때 알릭이 큰 소리로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유더는 그가 솥 안에서 딱딱하게 굳은 검은 덩어리를 손바닥만하게 부숴 꺼내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붉은 돌 옆에 놓아주세요. 아무래도 이만큼 진을 쳐 두긴 했어도 저는 저 돌 가까이 다가가는 게 좀 겁이 나긴 하거든요. 하하.”

알릭이 작게 속삭이며 검은 덩어리를 유더에게 건넸다.

“여기 두게, 여기.”

잔뜩 흥분한 타이스 율만이 유더가 가져온 검은 돌들을 그동안 만든 돌과 함께 커다란 바구니 안에 쏟아넣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군! 하. 피가 끓는 듯해. 유더, 자네는 마도구를 만드는 걸 본 적이 있나?”

“완성된 도구만 보았을 뿐, 만드는 건 처음 봅니다.”

“그래. 누구나 그렇겠지.”

크게 너털웃음을 터트린 타이스가 마법진에서 조금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이제부터 나와 내 제자, 그리고 각성자 한 사람이 협업을 해야 하네. 각성자가 저 상자를 벗기고 드러난 붉은 돌의 힘을 밖으로 새지 않도록 살피는 사이 우리는 그 힘을 마법으로 움직여 돌에 차례차례 넣을 거야.”

“마법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려고 이 많은 진들을 새로 더 그리지 않았겠나. 주변에 둔 도구들이 괜히 둔 게 아니라네. 공식에 따르면 불 하나를 불러낼 만한 마력 단위에서…….”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뒤, 타이스는 아무튼 아주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걱정되는 건 돌에서 힘이 빠져나갔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

“그러면 상자를 벗기는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셈이었네. 칸나가 자네야말로 마병단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각성자일 거라고 몇 번이나 칭찬을 했는데 그런 이를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나.”

유더는 슬그머니 칸나 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다 유더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껄껄. 내 소심한 제자 녀석보다 훨씬 포부가 있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스승님?”

“아무것도 아니다. 내 옆에, 아니. 그거보다 한 발짝 앞. 그래. 거기 서거라, 알릭.”

유더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붉은 돌이 들어 있는 상자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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