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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77화 (177/805)

177화

거대한 악마처럼 변한 제 모습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았으나 칸나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일과 두일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한 뒤에 곧장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실은 이쪽이 본론인데 말하다 보니 그만 이야기가 길어졌네. 유더, 어제 그러는데 율만 님께서 이제 준비를 모두 끝내셨대. 축제 기간이 끝나던 날 혼자 남아서 재료들을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그게 생각 외로 굉장히 잘 되었다나 봐.”

진주탑의 대마법사 타이스 율만은 붉은 돌의 힘을 마도구처럼 다른 매개체에 옮긴 뒤, 남은 껍데기가 된 돌과 힘을 양분하여 조사하겠다는 계획을 지니고 준비 중이었다. 그 준비를 위하여 돌 주변에 몇 겹이나 되는 방어진을 치고 값비싼 재료들을 키시아르에게 요청해 수급했으니 슬슬 결과가 나올 때라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

“응. 사전준비만 잘 해 두면 옮기는 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오늘 밤에 일을 진행할 거라고 하셨어. 단장님도 참석하시고 나도 갈 거야. 유더도… 올 수 있겠지?”

“당연히 갈 거야.”

어차피 몸은 모두 회복된 상태였으니 굳이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계속 병문안을 하러 찾아오는 단원들만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에 나가서 뭐라도 했을 터였다.

“다행이다.”

기쁜 얼굴로 미소를 지은 칸나는 그간 그녀가 진행해 온 특별수련의 성과가 점차 나타나면서 다른 동료들과도 함께 수련방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진 힘을 더욱 발전시키는 방법에 목이 마른 단원들은 가케인과 칸나 외에도 아주 많았다. 그런 이들이 자의로 몰려들어 수련을 하고 있는 통에 요즘은 밤늦게까지도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각자 가진 힘이 다르니까 어떤 식으로 수련해야 힘이 더 강해질지 다같이 고민해 주는 것만으로도 뭔가 도움이 되는 기분이야. 잘 하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유더는 반짝반짝 빛나는 칸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제 마음 속에서도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전 생에서는 동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전에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무언가 더 달라졌을까. 조금 아쉬워졌다.

“앗. 너무 나 혼자만 많이 말했나? 유더는 발현에 일까지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미안.”

“괜찮아.”

습관적으로 짤막하게 대꾸한 뒤 유더는 혹시 제 답이 차갑게 들렸을까 싶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즐겁게 수련하는 것만큼 좋은 발전방법은 없어. 네가 파티 때 도와준 덕분에 일도 훨씬 쉽게 끝낼 수 있었고.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칸나의 입이 슬그머니 귀에 걸렸다.

“힘이 막 나네. 정말 고마워, 유더.”

몇 달 전 입단시험을 신청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지금의 칸나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간 정과 부단장 일을 하며 늘어난 책임감 때문인지 한층 무게감이 생긴 눈동자 속에서 유더를 향한 신뢰와 다정한 우정의 감정이 선명히 읽혔다.

“아, 맞아. 시간이 되면 우리랑 같이 수련하지 않을래? 유더가 나랑 가케인을 도와줬던 만큼은 아니라도, 조금씩이라도 봐 주면 다들 정말 좋아할 것 같아서.”

“할게.”

“진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유더의 태도에 놀랐는지 칸나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렇지 않아도 단장님께 전체 단원들의 훈련 계획에 손댈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알려주고 싶은 것들도 있었어.”

“훈련 계획이라니, 세상에! 정말 기대된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 줘야지!”

지옥 같은 훈련으로 바뀐 뒤에도 과연 정말 기대한다고 해 줄지 조금 의문이 들었으나, 그래도 칸나의 의지 정도면 잘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유더는 잔뜩 신이 난 칸나가 밤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의 일정란에 오늘 밤 있을 실험 참석을 더해 두었다.

“약 먹을 시간이다. 먹어.”

칸나가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커튼을 열고 머리를 내민 이논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릇을 건네주었다. 유더는 구정물처럼 불길하게 출렁이는 액체를 내려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쭉 마셨다.

“기력 보충에 효과가 좋은 약초만 모아 넣기는 했지만 맛은 정말 최악인데, 어떻게 설명 한 마디 안 듣고도 그리 잘 드세요? 전 처음에 이논님이 독약이라도 제조하시는 줄 알았어요. 역시 두 분이 원래 아시는 사이라 그런가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산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웃었다. 루산은 의료부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란 유더와 이논이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 그들이 본래 아주 친한 사이였던 모양이라 지레짐작했다. 오기 전에 안면이 생긴 사이가 맞기는 했으니 이논은 딱히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꼬마야. 여길 볼 시간이 있으면 가서 정리나 더 해. 아까 하던 일은 다 마무리하고 온 거야?”

“아… 아뇨. 그러고보니 깜박 잊고 있었네요.”

루산이 황급히 의료부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 이논은 가만히 유더를 내려다보았다. 그릇을 달라는 뜻인가 싶어 건네주자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오기 전엔 각성자란 놈들이 다 너 같은 놈들일 줄 알았는데, 여기서 보니까 그건 아니더란 말이야. 너만한 놈은 하나도 없고 너처럼 흔들대는 놈도 없어.”

흔들댄다니? 무엇이? 유더는 의문을 삼키며 대꾸했다.

“뭐가 흔들린다는 거야.”

“기운.”

이논의 눈이 무언가를 꿰뚫어보듯 무겁게 빛났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는 안정되었지만, 그래도 뭔가… 좀 달라. 너, 뭔가 숨기는 게 있지?”

미래를 살다 다시 돌아왔다는 말까지 그에게는 처음부터 모두 알렸는데 뭘 더 숨긴단 말인가? 의아해하던 유더는 문득 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다 아 하고 작은 숨을 삼켰다.

‘혹시 반점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건가? 반점이 몸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 그걸 그런 식으로 느낀 걸지도 모르겠군.’

이논이라면 반점을 보고 무언가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유더는 그에게 그 사실을 굳이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으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기 전 루산이 다시 돌아왔기에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이논님! 잠깐 이쪽으로 좀 와주세요. 이건 혼자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나중에 말할게, 이논. 약은 고마워.”

“그게 내 일이거든? 아무튼 허튼 짓 하지 마. 아까 그 여자랑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따 저녁에 뭘 할 셈이라며.”

칸나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나. 유더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붉은 돌이라는 말은 일단 숨기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나는 별것 안 해. 그냥 지하에서 뭘 좀… 살필 일이 있어서.”

“거기 엄청난 힘이 집중되어 있는 거랑 관련이 있는 거냐?”

역시 이논은 범인과 달랐다. 유더는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법사도 몇 명 돌아다니는 것 같더라니. 대체 얼굴 한번 못 본 네놈들의 대장은 여기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세계 정복이라도 할 셈이야?”

이논은 아직 키시아르와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한 번도 키시아르를 본 적이 없을 그가 과연 보고 나서 무슨 평을 내릴지 궁금해져 유더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가 아닐까 싶은데…….”

“뭐?”

“이논님! 빨리요!”

“부르는데. 안 가?”

다급한 루산의 부름을 들으며 눈짓을 하자 이논이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에서 또다시 문이 벌컥 열리며 몇 명의 단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여기 대단하다!”

“유더! 유더 아일이 여기 있다며? 어디 있어?”

또다시 병문안 아닌 병문안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유더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

“유더. 빨리 왔네.”

저녁이 되어 더 이상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게 된 뒤, 유더는 평상복 위에 단복 겉옷을 걸치고 의료부 밖으로 나갔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중앙 계단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칸나가 반색을 하며 작게 웃었다.

“가자. 율만님도, 알릭님도 모두 기다리고 계셔.”

파티 이전에 방문하고 나서 처음 온 지하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마법진과, 붉은 돌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기기묘묘한 물건들로 인해 마치 전설 속 마법사의 동굴처럼 보였다.

“율만님! 저희 왔어요.”

“오! 반가운 얼굴들이 왔군.”

그 안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던 타이스 율만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유더는 평소 깨끗하게 빗어 관리하던 그의 수염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데다 알 수 없는 금빛 물질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모습을 보았다. 대망의 실험을 앞둔 덕인지 눈빛 또한 광기에 가까운 열기로 빛나는 상태였다.

“몸이 좋지 않았다던데 이제 다 나았나 보군 유더.”

“네. 이제는 괜찮습니다.”

“다행이야. 이런 역사적인 실험을 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비극이 아니겠나.”

그는 칸나와 유더를 붉은 돌 가까이로 데려갔다. 마법진을 몇 번 통과하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부 풍경이 점차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은 투명한 마석을 깎아 만든 상자 안에 곱게 놓인 붉은 돌과 그 옆의 검은 보석 덩어리들을 보았다. 뒤쪽에서는 녹인 금처럼 출렁이는 액체가 가득 든 솥을 젓고 있는 타이스의 제자, 알릭 펠긴이 퀭한 얼굴로 무언가 중얼대는 중이었다. 나이 든 스승처럼 비등한 광기로 빛나는 눈과 검은 그림자가 턱까지 내려온 얼굴이 마치 유령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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