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조금 심술이 나 보이는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자 키시아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당혹하여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눈빛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동안 키시아르 쪽에서는 별다른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돌아오셨는데 왜 올라오지 않으시고 거기에 계십니까.”
“오. 나단.”
남겨진 키시아르는 반대편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부관의 이름을 부르며 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
“정말 난감해. 이런 식으로 허를 찔리기는 오랜만이라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시던 길에 적이라도 만나셨습니까?”
“적이라면 적인지도 모르겠군.”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주군을 보며 나단 주커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일 경과 함께 돌아오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는 먼저 보내셨습니까.”
“그래. 예정대로 의료부 쪽으로 보내 두었네. 3일간은 강제 휴가야.”
키시아르에게서 겨우 정상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내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는 모양은 아니었기에 나단은 주군에 대한 걱정을 거두고 그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
파티 이후 며칠간 키시아르가 내린 비밀 임무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것으로 알려진 유더 아일이 갑작스레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전과 무언가 큰 부분이 바뀐 상태였다.
유더의 귀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료들은 그가 갑작스레 1층 동쪽에 생겨난 ‘의료부’ 안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고, 그다음에는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에 두 번 놀라 뒤집어졌다.
“아니, 파티를 끝내고 와서 갑자기 1층 동쪽 구역에 뭔가 벽이 막혀 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그런데 의료부라니?”
유더의 병문안을 온 데브란이 고개를 저으며 깨끗하게 꾸며진 주변 병상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말해 병문안은 핑계이고 그저 새로 생겨난 구역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티가 역력한 모습이었다.
“유더 형. 이틀 만에 발현이 모두 끝났다는 게 정말이에요?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어요?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저는 일주일을 누워 있었는데도 솔직히 몸이 지금도 좀 찌뿌둥할 때가 있는데…….”
그의 곁에 선 지미는 반대로 울 듯한 얼굴로 유더를 걱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바로 얼마 전 알파로 발현한 소년은 그 일주일 사이 제가 겪었던 발현의 아픔이 어땠었는지 이야기하며 유더가 갑작스레 겪었을 고통에 몹시 이입하였다.
“괜찮아. 지금은 그냥 혹시 몰라 3일 정도 더 상태를 보기로 해서 와 있을 뿐이고, 네가 바로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그래, 지미. 나도 알파이고 여기 있지만 유더는 괜찮잖아.”
얌전히 옆에 앉아 있던 가케인이 한 마디를 보탰다. 유더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가장 놀랐던 그였으나, 병문안을 온 이들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한 축이기도 했다. 그의 뒤에서는 검은 그림자 분신이 유더를 위해 가져온 과일 껍질을 부지런히 깎고 있는 중이었는데 정작 유더가 한 입도 먹지 않은 탓에 신이 난 건 엘더 남매였다.
“가케인! 나는 사과가 좋아!”
“가케인! 나는 토끼 모양으로 깎아 줘!”
“으음… 아직 그 정도로 섬세한 작업은 안 해 봤는데. 연습을 좀 더 해 볼게. 미안.”
“가케인, 수련 좀 더 해!”
“저번 대련에서도 우리한테 졌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가케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엘더 남매를 보며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떠들썩한 광경이 이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돌아온 이래 제대로 혼자 쉬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끊임없이 단원들이 들이닥쳤다.
지금 함께 온 이들을 제외하고도 워낙 많은 이들이 병문안이라는 이름의 구경을 온 탓에, 이러다가는 330명 모두 한 번 이상은 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이미 그런 듯도 했다.
“앗. 이제 다시 훈련 시간이야. 가야 해.”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깎은 과일을 모조리 먹어치운 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외치자 다른 단원들도 모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너무 빠르네.”
“유더 형! 이따 다시 올게요.”
“유더. 이따가 봐.”
모든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자리에 의자 몇 개와 과일 껍질이 수북이 담긴 접시만이 어지럽게 남겨졌다. 유더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자 침대 옆에 쳐 둔 흰 커튼이 죽 옆으로 밀리며 누군가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저 시끄러운 녀석들, 역시 출입 금지를 시키든가 설사약을 먹이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
“마음은 동의하지만 안 돼요, 이논님.”
그의 뒤쪽에서 목소리를 낸 젊은 사제가 이름을 부르자, 루마의 가디언 이논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쯧 찼다.
“병자를 찾아올 때 기본 예절은 조용히 있다 가는 거라고. 의료부 구경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환자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안 된다니까요…….”
유더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의료부에 막 들어선 순간 느꼈던 충격을 다시 떠올렸다. 이전에 성화 나눔 행사에서 도움을 받았던 녹색 머리 사제 루산과 이논이 다름 아닌 의료부 소속으로 마병단에 들어왔을 줄이야. 루산은 그렇다 쳐도 이논이 여기에 오리라고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기에 드물게 말을 잃을 만큼 놀랐었다.
왜 여기에 있느냐는 유더의 물음에 이논은 네놈을 지켜보기 위해 왔다고 순순히 답했다. 무슨 수를 써서 들어왔나 했더니 그저 순수하게 펠레타 기사단원들과 나단 주커만의 면접 및 시험을 거쳐서 뽑힌 것뿐이란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그와 반대로 루산은 이전에 축제에서 레블린과 유더를 도왔던 일로 키시아르의 눈에 들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정식 사제로 올라가고 발령 요청이 내려왔다고 했다.
루산과 이논은 초면임에도 꽤나 죽이 잘 맞았다. 뛰어난 신성력을 지녔음에도 고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거침없는 태도 때문에 대신전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루산은 말투가 거칠지만 의외로 어른스럽고 실력 있는 이논을 금세 따르게 되었다.
이논이 수도 내에 있는 그의 약방을 접고 이곳으로 왔다고 말하자 루산의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유더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모두 어디 가서 마병단 이야기를 발설할 이들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유더. 나 왔어.”
그때, 칸나가 밝게 웃으며 의료부로 들어왔다. 유더는 이논이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길이야?”
“아니. 에버 언니와 함께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왔어.”
지하는 붉은 돌을 연구하는 타이스 율만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나한의 동료들인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 형제 가일과 두일을 뜻하는 것이었다.
유더가 발현 때문에 심문을 이어 하지 못하게 되자 키시아르와 칸나는 대신 에버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시골 출신에 강단 있는 성격인 에버는 그들과 금세 공감대를 형성하여 순식간에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고 들었다.
“옷가지와 무기,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었어. 좀이 쑤신다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기에 단장님께 여쭈어서 우리 부지 내에 한해 걸어다닐 수 있게 해 주기로 했더니 좋아하더라.”
“그래?”
“응. 조금 불쌍하기도 해. 먹고 살기가 힘들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흘러들어 가진 않았을 사람들 같아서.”
유더는 나한과 나그란의 별이 그들을 되찾기 위해 모두가 자리를 비운 파티 때 몰래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그란의 별은 가일과 두일을 서슴없이 버리려는 걸까. 그들 정도면 지미만큼은 아니어도 훌륭한 검기 능력을 지닌 각성자인데, 이토록 쉽게 버리다니 동료애가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칸나는 가일과 두일을 내버려 두어도 크게 사고를 치지는 않을 듯하다는 평을 내린 뒤, 그간 읽어낸 추가 정보를 정리하여 알려주었다.
“나그란의 별이라는 집단의 본거지는 현재 두세 곳 정도에 나뉘어 있는 것 같아. 제국 내에만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정확한 위치는 워낙 거부가 심해서 아직 못 읽겠어. 그리고 ‘그분’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남국 사람이 아니고 제국 사람임에 확실해. 나이가 꽤 든 사람이고 가일과 두일 같은 온건파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해서 현자라고 불리나 봐.”
“정신적 지주라…….”
“목적이 뭔지는 가일과 두일도 잘 모르는 모양이더라. 다만 각성자들을 계속 모아서 큰 집단을 만들고 싶어 하니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특히 그, 나한이라는 사람.”
칸나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정보를 엿보기만 했지만 너무 위험해. 유더 널 몇 번이나 서슴없이 공격했던 것도 그렇고… 그 사람과 현자가 지금은 함께 있다지만 반목이 계속된다면 오래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렇겠지.”
“단장님께서는 가일과 두일이 원한다면 아페토 가에서 데려온 알파 각성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용하실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었어. 아직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잘 되면 좋겠다.”
칸나는 가일과 두일이 내심 싸우는 것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몹시 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들에게 전투 능력을 가졌으니 당연히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검을 들려 준 이는 나한과 그를 따르는 나그란의 별 동료들이었다.
“아하하.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유더? 가일과 두일은 널 딱 두 번 봤는데도 그렇게나 느낌이 강렬했나 봐. 네 이름만 나오면 머릿속에 악마처럼 무섭고 거대하게 변한 네 모습이 선명하게 읽히는 것 있지.”
“……내가?”
“응. 덕분에 이야기하기는 편했어. 에버 언니한테도 말해 주니 재미있어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