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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75화 (175/805)

175화

어째서일까. 벌써 몇 번이나 해 본 일인데도 뭔가 다른 듯 느껴지는 이유는.

이전에 끼던 것보다 훨씬 두꺼운 장갑을 손끝으로 천천히 밀어내는 동안 유더는 마치 제가 키시아르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산책과 장례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차 안에 오갔던 부드러운 분위기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똑바로 고정된 시선 속에서 오른손 장갑이 무릎 위로 툭 떨어지자 그 팽팽히 당겨진 분위기는 완전히 절정에 달했다.

키시아르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우아하게 내밀었다. 상황만 이렇지 않았다면 마치 춤이라도 권하는 듯 착각했을 법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다른 한 손에는 휘감은 성표와 흰 정화석이 쥐어져 있었다. 유더는 그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제 오른손을 위에 얹었다.

그 순간이었다. 두 손이 겹쳐져 닿았을 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저릿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쭉 퍼졌다. 유더의 손이 움츠러들며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하자 긴 손가락이 덫처럼 다물리며 움직임을 막았다.

“…….”

유더는 사로잡힌 오른손을 반사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객관적으로는 서늘할 체온인데도 이상하게도 살을 지지는 불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발현은 분명 모두 끝났는데 어째서인가.

마주친 눈동자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일렁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끓어오르는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가 천천히 모양 좋은 입술을 열었다.

“두려운가?”

“…예?”

“두려워서 벗어나려 한 것이냐고 물었어.”

이번에도, 또.

생략된 말을 어쩐지 곧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왜 피하려 했을까. 내 보좌는.”

유더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뻣뻣한 오른손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덫처럼 물고 있던 키시아르의 손도 스르르 문을 열어주었다.

“이상한 자극이 조금 느껴지는 바람에…….”

“이상한 자극?”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의 표정을 고요하게 살폈다. 유더는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어 작게 말을 보탰다.

“맨손으로 접촉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랬을 겁니다. 그냥… 정말 그뿐입니다.”

머릿속을 꿰뚫을 듯 바라보던 시선이 그제야 느슨하게 변했다.

“자극… 자극이라.”

그 말에 또다시 슬쩍 움츠러들었다 풀린 손끝을 보며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도 느끼나? 그 감각.”

유더는 제 손을 잡고 있는 키시아르의 큰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율 같은 감각은 이제 사라졌으나,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온기와 울렁거리는 뱃속만은 여전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저은 유더는 이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역시 2성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건가.”

키시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겹쳐진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는, 성표를 쥐고 있던 반대쪽 손을 움직여 위에 새로 얹었다. 조개처럼 두 손 사이에 완전히 감싸인 오른손에서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지금은?”

“별 차이는 없습니다.”

그제야 키시아르는 신성력을 끌어내었다. 흰빛이 터져 나오며 오른손등에서 따끔거리는 미약한 자극이 느껴졌다. 발현하기 전에는 조금만 힘을 써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었는데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역시 뭔가 관련이 있던 건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빛이 사그라지고 키시아르가 위에 얹었던 손을 떼었다. 아주 작은 보랏빛 점 이외에는 도로 깨끗해진 손을 보며 키시아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프진 않았나?”

“네.”

“아까 느껴졌다는 자극은?”

“이젠…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키시아르가 손을 한 번 가볍게 꾹 쥐었다가는 완전히 놓아주었다. 안도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찾아든 허전함을 닮은 서늘함에 어깨가 순간 살짝 움츠러들었다.

“유더.”

“네.”

“스스로 말하기도 조금 그런가 싶지만, 나는 자네를 나름대로 꽤 아끼고 있다네. 알고 있나?”

“…네.”

그 아끼는 방식이 조금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키시아르는 그간 아무 말 없이 유더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믿어준 데다 몸소 치료까지 해 주고, 신뢰 없이는 할 수 없는 보좌 자리까지 만들어 곁에 두었다. 그리 말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키시아르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가는 도로 사라졌다.

“자네의 발현 때, 나 또한 처음 겪는 어떤 감각들을 느낀 적이 있었네. 상당히 낯설고 당혹스러웠지. 다른 이의 곁에 일부러 다가가지 않는 쪽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건 처음이었어.”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인가 싶어 유더의 기이하게 변한 표정을 보며 키시아르의 눈이 휘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서로 다른 성으로 발현했으니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건 당연하고, 거기에 낯섦과 경계심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해. 그 안에 내포되어 있을 제어하기 힘든 충동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전과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네. 자네가 여태까지와 같기를 바란다면.”

“…….”

“나는 여전히 자네를 내가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보좌로서 대할 거야.”

유더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키시아르는 답을 요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알겠나? 내 말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유더는 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2성 발현을 했다 해도 갑자기 반대편 성을 가진 이들에게 눈이 돌아가며 세상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그냥, 다만.”

그는 아직 키시아르의 체온이 남은 듯 저릿한 손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중얼거렸다.

“말씀대로 단장님과 제가 서로 다른 성으로 발현했으니… 한동안은 적응에 시간이 걸리겠지요. 정말로 그저 그것뿐입니다.”

“그래.”

키시아르의 눈빛 속에 비로소 따뜻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나를 피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해도 그리 기분이 좋지가 않더군.”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키시아르 치고는 드문 표현이었다. 유더는 조금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는 이내 조심스레 반문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래. 이것도 어쩌면 자네의 2성 발현에 영향을 받은 여파일지도 모르지만.”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침묵을 지켰다.

“벨트레일의 연구기록 중 알파와 오메가 각성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기록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런 부분도 있었습니까?”

“보고 싶다면 돌아가서 따로 추려 보내줄까?”

“부탁드립니다.”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자네의 그런 면이 참 좋단 말이지.”

“칭찬이십니까?”

“물론 칭찬이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 있나.”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비로소 장난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자네를 이렇게 열심히 칭찬했는데 한 마디 정도 돌려줄 생각 없나? 원래 이런 건 주고받는 법인데.”

“제가 바란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렇게 요구하셔도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울 정도로 칭찬할 게 없는 상관이었단 뜻인가. 조금 충격이야.”

그런 뜻이 아님을 알면서 너스레를 떠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유더는 깨끗이 나은 손에 도로 장갑을 꼈다. 창밖 풍경을 보니 어느새 마병단이 있는 황궁기사단 부지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딱히 진심으로 답을 바라서 했던 말은 아니었을 키시아르도 유더를 따라 시선을 돌린 뒤 빛을 잃은 정화석과 성표를 도로 단복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침묵 속에서 마차가 달리는 희미한 소리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잘 생기셨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쯤, 유더는 문득 느릿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키시아르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뺨을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으나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나?”

“굉장히 잘 생기셨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아니. 설마 아까 칭찬할 게 없느냐고 물었던 데 대한 답이 그건가?”

정말로? 정말 그것뿐인가? 키시아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다른 칭찬거리가 없는지 물었으나 유더는 마차가 숙소 앞에 멈출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늘 키시아르의 말에 저만 당황하곤 했었는데, 그가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복수와도 같은 쾌감이 느껴진 건 비밀로 할 셈이었다.

“도착하셨습니다.”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재촉하기 전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정중히 문을 열어주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탓인지 마병단 앞에는 지나다니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 동쪽 복도를 따라가면 의료부가 나오네. 팻말을 달아 두었으니 알아보기는 쉽겠지.”

언제 칭찬 얘기를 했느냐는 듯 도로 단장다운 표정을 지은 키시아르가 동쪽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지나쳐 가기 전, 걸음을 멈추고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뭔가 더 궁금한 거라도 있나? 혹 따라가 주기를 바라는 거라면 말하게. 잘생긴 것밖에 좋은 점이 없는 단장이지만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다른 장점도 있으십니다.”

“그래? 뭔가.”

이전 생에서부터 줄곧 대단하다 생각하며 뒤를 따랐던 사내다. 장점을 대라면 솔직히 말해 밤이 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많은 말을 당사자의 앞에서 할 수 없을 뿐이었다.

유더는 말하지 못할 속내를 삼키며 키시아르의 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단장님만이 제게 명을 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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