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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74화 (174/805)

174화

유더는 껄끄러운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넬라른 왕국의 복식을 입은 젊은이가 에제인의 앞에서 멈춰 겨우 숨을 헐떡였다.

“세상에. 말도 없이 사라지시는 바람에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이곳이 어디인데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방금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대체 왕자님께서는 꼭 이럴 때만……!”

“멜번, 멜번. 내 옆에 있는 이는 안 보이느냐?”

“네?”

무어라 말을 쏟아내려던 젊은이는 에제인의 옆에 서 있던 유더를 그제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는 대체 몇 번을 말해도 흥분하면 앞뒤를 보지 못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구나.”

에제인이 김샌 표정으로 유더를 돌아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것 참. 굳이 정체를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내가 사절인 것도 맞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왕자라는 걸 알면 편안히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며 중얼거린 에제인이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유더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듣고도 놀라지 않나?”

“아뇨. 놀랐습니다.”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닌데.”

“송구합니다만 이게 놀란 표정입니다.”

“혹 처음부터 알아본 게 아니고?”

“정말입니다.”

태연하게 우기는 유더를 보는 에제인의 눈동자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웃는 듯도, 혹은 냉정하게 관찰하는 듯도 한 시선이었다.

“저, 왕자님…. 지체하고 있으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지 않아. 갈 테니 그만 보채거라.”

미묘한 침묵 속에서 에제인의 곁에 서 있던 젊은이가 조바심을 내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에게 가벼운 타박을 준 에제인이 몸을 돌리려다 유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덕분에 제국에 온 이래 가장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혹 당신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유더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대답했다.

“유더 아일입니다.”

“유더 아일.”

유더의 이름을 따라 되뇐 에제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억해 두겠어. 조만간 다시 만나 각성자들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길 고대하지.”

못다 한 이야기라. 과연 그런 걸 나눌 일이 이번 생에 다시 오기는 할까. 이전 생에서처럼 에제인이 또 왕이 된다 해도 유더가 지금처럼 평범한 마병단원으로 남아있는 이상 다시 만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유더는 멀리 사라져 금세 보이지 않게 된 에제인 왕자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잠시만 산책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에제인을 만나는 바람에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유더는 그러고 보니 에제인을 찾으러 왔던 그의 부하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넬라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아니면… 제국 내에서 생긴 일의 정보를 입수해 보고하려 했던 건가.’

제국 내에서 생길 일이라면 짐작 가는 부분도 하나 있었다.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오늘 레노어의 장례식에 간 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어서 돌아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디까지 갔다 오셨습니까? 조금만 더 늦으셨다면 저희가 찾으러 갈 뻔했습니다.”

빠르게 돌아간 유더를 맞이한 시종이 벌써 키시아르가 도착해 있었다는 말을 전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공작님께서도 얼마나 걱정이 크셨는지 모릅니다.”

“그래. 걱정이 컸지. 빠르게 일을 마치고 왔더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이가 없어서 말이야.”

“공작님.”

느릿하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시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어느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키시아르를 향해 얌전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잠시 바람을 맞으러 다녀온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친 것보다는 몸 상태가 중요하지. 문제는 없었나?”

“네. 없습니다.”

그제야 키시아르가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떼어 성큼성큼 다가왔다. 발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거대한 기운이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그 기운은 며칠 전과 달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키시아르 또한 무언가를 가늠하듯 유더를 살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짓이 아님을 알겠군.”

“그러면 이제 마병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그것참. 돌아가도 어차피 3일은 더 쉬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돌아가고 싶나?”

“네.”

단호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그래. 그러면 바로 돌아가지.”

키시아르는 며칠 동안 유더를 돌보아 준 시종들을 치하한 뒤 거침없이 궁 뒤편으로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타자 겨우 마병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유더는 차창 밖으로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오늘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을 재빨리 물어보았다.

“오늘 가셨던 일은 뜻하시던 대로 모두 잘 끝내셨습니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인데 그게 그리 궁금했나?”

“네.”

“나는 자네가 그 긴 산책 시간 동안 뭘 보고 왔을지가 더 궁금해. 그쪽이 좀 더 재미있지 않겠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키시아르의 미소 띤 얼굴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유더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별것 없었습니다만.”

“나도 별것 없었네.”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물론 꼭 그럴 필요는 없지. 나도 마찬가지지만.”

장난인가 싶었으나 키시아르는 져 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별일이 없었는데…….’

혹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는가?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납득이 되어, 유더는 겨우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오늘 나가서 무엇을 보았던가. 어딜 가도 꽃이 많았다는 생각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나마도 꽃보다 잘생긴 사람을 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실시간으로 점점 기억이 흐려져만 갔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꽃…을 봤습니다.”

“꽃?”

“예.”

“하기는, 꽃이 많이 피는 철이기는 하지. 그것 외에는?”

“물고기를 잠깐 봤습니다.”

“물고기……. 아. 근처에 못이 하나 있었던가.”

고개를 끄덕인 키시아르가 ‘또?’ 하고 물었다.

“기둥 같은 조각을 보다가… 길을 잃은 분이 있어 잠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

“넬라른에서 오신 사절이라더니, 사실 2왕자님이시더군요. 각성자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시기에 답해드리다 보니 시간이 금세 갔습니다.”

이번 답은 예상치 못했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는 웃음을 흘렸다.

“그건 확실히 좀 재밌군.”

“저는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는 걸 다 답해 주는 게 무엇이 재미있었겠는가. 에제인 왕자와의 대화 도중에도 유더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건 키시아르가 갔을 레노어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한 궁금증뿐이었다.

“제가 본 건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다. 이제 단장님께서도 답해 주십시오.”

“내 쪽에서 한 일이야, 자네도 예상하고 있을 그대로야. 놀라운 변수는 아무것도 없었어.”

키시아르가 그제야 느긋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더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주의 깊게 들은 뒤 마지막에 에이셰스 샨 아페토가 장례식을 파행시켰다는 부분에서 깊이 숨을 내쉬었다.

‘대단하군. 아페토 가와 디아카 가, 그리고 카치안 황태자의 사이가 이번 일로 확실히 벌어질 테니 다음 재판은 파행되지 않고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원하던 바를 이루고 돌아왔음에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만족 없이 곧바로 다음 목표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그러한 계산을 모두 감추고 장난스레 구는 저 모습에서 누가 그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유더의 머릿속이 덩달아 바빠짐을 느꼈는지 키시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더. 아무리 일이 하고 싶어도 3일간은 안 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 곧장 숙소로 가지 말고, 의료부에 한 번 들렀다 가게.”

“의료부…라뇨?”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의 붉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각성자들의 신체가 아무래도 일반인과는 다르니 전용 의료부를 만들어 연구 토대부터 제대로 다져야 할 필요성을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 본래는 좀 더 나중에 만들 생각이었지만, 굳이 완벽을 기하기보다는 다소 미흡하더라도 점차 키워나가는 방향이 나을 듯해 계획을 조금 당겼네.”

이전 생에는 키시아르가 은퇴할 때까지 의료부가 없었다. 나중에 단원 수가 지금의 몇 배로 늘어나면서 치유 관련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많아졌을 때에야 겨우 만들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병단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시킬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어 있던 공간에 병상을 확보하고 의원 겸 약사, 그리고 신관까지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시작 아니겠나.”

대체 그토록 바쁘게 일하면서 언제 의료부를 만들 생각을 하고, 의원과 신관을 뽑았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으나 키시아르가 이런 일로 거짓을 이야기할 리 없으니 만들었다는 말은 사실일 터였다.

“자네가 처음으로 의료부를 이용하는 단원이 될 테니, 시범 표본으로서 더욱 성의를 다해 체험해 보고 의견을 주게.”

“…알겠습니다.”

발현 때문에 기절해 있던 하루 반, 그리고 일어나서 쉬느라 걸린 하루. 고작 그사이에 이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는 믿지 못할 사실에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는 턱을 괸 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전에.”

“예?”

“이제 몸이 다 나았으니 손등의 반점을 치유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그 정도는 내가 해 줄 수 있으니, 돌아가기 전에 끝내 놓자고.”

자, 장갑을 벗게. 짐짓 엄숙한 척 낮게 깔았으나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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