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키올레가 이를 갈고 있던 그 시각, 유더 아일은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궁 뒤쪽의 후원을 걷고 있었다.
그의 몸은 하루를 더 쉬고 나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발정기도 완전히 끝난 덕에 작은 미열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유더는 아직도 궁을 떠나지 못했다. 레노어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 키시아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었다. 건강해졌는데도 침실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답답하다고 생각한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나이 든 시종이 후원을 돌아보는 건 어떻겠느냐며 산책을 추천했다.
‘이 시기의 황궁에는 1년 중 가장 많은 꽃이 피어납니다. 매일을 이곳에서 보내는 저희도 문득 가던 걸음을 멈출 만큼 아름답지요. 구경하시다 보면 시간을 금세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친절은 고마웠지만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자신들도 뒤를 따르겠다는 뒷말은 과연 너무 지나쳤다. 황족도 아닌데 황궁을 위해 일하는 시종들을 뒤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자는 없다. 궁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나서야 겨우 그들을 뿌리칠 수 있었다.
‘지나친 게 그것만은 아니었지.’
오늘 아침을 먹은 이후 나온 후식에 무려 3층짜리 금 접시를 가득 채운 디저트 탑이 나온 걸 보고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이전 생에서 수없이 많은 땅과 보물을 받고 남부러울 것 없는 마병단 단장으로 살았을 때도 그리 엄청난 후식은 본 적이 없었다.
한 시간이 넘게 먹어치워 겨우 없앤 그 탑을 떠올리며 유더는 아름답게 가꾼 꽃밭을 지나 이름 모를 연못 앞에 섰다. 지느러미가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물고기 몇 마리가 먹이를 주러 온 사람이라 착각했는지 입을 뻐끔거리며 가까이 몰려들었다가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니 곧 멀어졌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는 완전히 유리된 듯 아름다운 풍경. 나른하고 평화롭게 못 위에 떠 있는 꽃들을 내려다보며 유더는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쯤 키시아르는 레노어의 장례식에 있겠지.’
그곳에 가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 어떤 이들을 데려갔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따라가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키시아르가 들었다면 그렇게 쉬라고 말했는데도 말을 허투루 들었다며 고개를 저을 만한 생각이었으나 평생을 이렇게 살다 죽어버린 걸 바꾸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연못을 지나 조금 더 걷자 아름답게 깎아낸 기둥 모양의 조각을 타고 빙 둘러 자라난 넝쿨이 보였다. 그 넝쿨 위에도 노란 꽃 몇 송이가 피어난 걸 보니 시종의 말대로 정말 황궁에 있는 모든 곳에 꽃이 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했다.
이전 생에는 황궁을 그리 많이 다니면서도 궁에 언제 꽃이 많이 피는지, 이런 곳에 조각과 넝쿨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낯선 기분으로 손을 내밀어 기둥을 슬쩍 매만졌으나 느껴지는 감촉은 몹시 둔했다. 키시아르가 시종들을 통해 전달해 준 새 장갑이 이전보다 좀 더 두꺼운 재질이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검은색 장갑에 평소처럼 검은 단복을 입고 있으니 마음만은 한결 편안했다. 키시아르가 장갑과 단복을 전달하고 가 정말 다행이었다.
“단지 꽃을 돋보이게 만들 의향만으로 금과 은을 바른 예술품을 비바람 치는 정원에 내버려 두는 건 제국 이외엔 할 수 없는 일일 거야.”
유더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등 뒤에서 별안간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를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기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유더는 그 사내의 벼린 칼처럼 빛나는 긴 은발에 시선을 주었다. 평범한 이가 머리를 그처럼 길게 길러 묶는다면 유약한 인상이 되기 십상이겠으나 사내는 조금도 약하거나 부드러워 보이지 않았다. 여러 번 담금질한 무기처럼 날카로운 얼굴 위로 시원한 미소가 스쳤다.
유더는 그제야 느릿하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엄청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그걸 만지고 있기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사내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 검은 옷을 얼마 전 본 적이 있다. 당신은 마병단원이지? 펠레타 공작이 만들었다던.”
“맞습니다.”
“나는 넬라른 왕국에서 온 사절이다.”
사내는 그저 그렇게만 소개하였으나 유더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넬라른 왕국의 2왕자. 에제인 아파난 넬라른.’
현재는 왕자이지만 나중에는 형제들을 제치고 왕이 될 사내. 그리고 1년 내로 각성자가 되어 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해질 이 중 하나.
이전 생에 유더는 제국의 사절로서, 그리고 세계의 위기를 수습하고자 노력하는 단 한 명의 각성자로서 몇 번 그를 만났다.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에제인 왕만큼 나라와 백성을 잘 수습하여 이끈 군주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국력을 잃어만 가는 제국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카치안 황제는 넬라른이 오르를 집어삼킬지 모른다 경계했으나 적어도 유더가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더가 에제인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유더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여 몇 번인가 넬라른 왕국에 오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었다. 아무리 거절을 해도 개의치 않던 에제인 왕의 마지막 제안은 유더가 감옥에 갇혀 있던 때에 도착했다.
‘제국이 당신을 버렸는데 당신께서는 왜 아직도 그들을 놓지 못하십니까? 넬라른으로 오십시오. 왕께서는 유드레인 단장이 이런 식으로 죽을 인재가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더는 그 제안도 결국 거절했다. 그것으로 그들의 연도 끝이었다.
며칠 전 레노어가 죽었던 파티에 에제인 또한 참석했기에 유더는 그를 먼발치에서 보았다. 이 시기에 그가 넬라른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 제국에 와 있던 줄은 몰랐기에 놀랐지만 그저 그뿐, 이후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설마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넬라른에서 오신 분이셨군요.”
마치 처음 듣는 양 느릿하게 대답하자 에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산책을 하고 있었지. 축제가 모두 끝나 돌아가기 전에 이름난 황궁 정원의 아름다움을 꼭 한 번 직접 살피고 싶어서 말이야.”
“뒤를 따르는 시종 한 사람도 없이 말입니까?”
“그게 말이야, 실은 중간에 길을 잃었어. 너무 넓어서 계속 걷다 보니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되었거든.”
너무나 쾌활한 대답이라 내용이 조금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다 겨우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길을 안내해 드릴 시종을 불러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그보다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겠나? 나는 이번 축제 내내 당신들 마병단이 해낸 일에 꽤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에제인의 눈동자는 제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색을 띠고 있었다. 넬라른 왕가는 대대로 라일락 꽃과 같은 색을 지닌 눈을 물려받는 것으로 유명했다던가. 이전 생에서 사절로 가기 전 겨우 주입식으로 외웠던 정보 한 토막이 유더의 머릿속에서 뒤늦게 떠올랐다.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농담을 꽤 잘 하는군. 황궁 내부를 홀로 태연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병단원이 아는 게 없을 리가 있나.”
“…….”
말 한 마디로 유더의 허를 찌른 에제인이 이내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 굳어있을 필요 없어. 정말 간단한 궁금증일 뿐이니까.”
아무래도 그는 유더를 쉽게 놓아줄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길은 빨리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뿐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들 마병단은 정말로 300명이 넘는 모든 구성원이 각성자인가?”
“네.”
“그러면 당신도 각성자겠군. 무슨 능력을 지녔지? 각성자는 겉만 보아서는 영 무슨 힘을 지녔는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속성마법 같은 힘을 조금 쓸 줄 압니다.”
“속성마법 같은 힘이라! 조금이라 해도 대단한데.”
“그리 대단한 힘은 아닙니다.”
“혹 보여줄 수는 없나? 눈앞에서 각성자의 힘을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아쉽군.”
다행히 에제인은 그 이상 요청하지는 않았다. 유더가 기억하던 그보다 훨씬 가벼워 보이는 태도였으나 뒤끝 없는 모습만은 예전과 같았다. 그는 이후로도 유더에게 널리 알려진 각성자에 대한 소문 몇 가지가 사실인지를 물어보며 답을 얻고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재미있군. 정말로 힘을 쓸 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니. 내게도 그런 힘이 생기면 참 좋았을 텐데.”
“방금 전 넬라른에서는 각성자의 인식이 좋지 않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있는 제국에서도 각성자를 꺼려 하는 이가 많은데, 하물며 국외에서는 더했다.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나중에 에제인이 정말로 각성한다는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좋지 않지. 하지만 그런 게 두려워 힘을 마다하겠나?”
에제인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이미 가진 이들뿐일 테지.”
농담 같은 말이었으나 기묘하게 뼈가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유더가 그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추측하는 동안, 에제인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맞아. 그러면 당신은 혹 그것도 본 적이 있나?”
“무엇 말입니까.”
“당신들을 각성자로 만들어 준 그것 말이네.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 돌. 분명 제국 중부에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숨가쁘게 뛰어오며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