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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72화 (172/805)

172화

키시아르는 마병단원들이 돌아가는 마차에 타는 것을 지켜본 뒤 다른 곳에 세워둔 또 다른 마차에 탔다. 그가 향한 곳은 마병단 숙소가 아닌 황궁 쪽이었다.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마법을 새긴 마차가 조용히 달리는 동안 그는 오늘 일으킨 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파문들을, 그리고 그 다음을 끊임없이 계산했다.

오늘 그는 에이셰스 샨 아페토를 이용하여 여러 곳에 의혹과 불화의 씨앗을 뿌려두었다. 그 씨들이 제대로 싹을 틔운다면 키시아르를 둘러싸고 좋을 대로 떠들어 대던 이들의 날카로운 입방정은 이제 황태자와 디아카 가에게 고스란히 향할 테고, 아페토 가는 황태자뿐만 아니라 디아카 가 또한 완전히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일부러 레블린을 이용해 에이셰스의 약점을 자극하면서 그가 일전에 보냈던 연락에 흥미가 있었던 척 말을 흘려두었으니, 레노어의 죽음으로 잠시 생각이 바뀌었었더라도 결국 그는 다시 키시아르를 찾게 될 터였다.

똘똘 뭉쳐 있는 사냥감은 사냥하기 힘들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고 흩어진 사냥감을 하나씩 잡아내는 건 훨씬 쉬운 법이다. 키시아르는 그가 뿌린 씨앗들이 무사히 곧 싹을 틔우리라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하나 더해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 사이의 관계도 좀 더 삐걱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테고.’

디아카 공작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번 일로 이미 황태자를 더욱 손안에 쥐려 노력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나 과연 오랜 인내 끝에 드디어 직접 사냥하는 맛을 본 젊은 맹수가 전처럼 순순히 우리 안에 들어가 주려 할까.

‘그러기는 어렵겠지.’

키시아르의 눈에 비친 디아카 공작과 카치안 황태자의 관계는 겉보기보다 사뭇 복잡한 편이었지만 파고들어 갈 틈을 찾기 힘들 만큼 끈끈하기도 했다. 한때는 그 사이에 흠집을 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어렸던 카치안이 어느덧 성년을 앞둘 만큼 자라고 나니 과연 이렇듯 기회가 찾아왔다.

키시아르는 황태자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 때문에 기막혀 하고 있을 디아카 공작의 표정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상당히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낮게 웃었다.

***

“대체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하필 아페토 놈들의 장례식에서!”

황궁기사단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키올레는 복도까지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디아카 공작이 평소 몹시 아껴 가문 사람들에게도 출입을 제한하곤 하는 마석 전시관 안에서 들려오는 중이었다.

“아버님께서 지금 저 안에 계신 게냐.”

“예, 그렇습니다.”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거지?”

“뒤르망 남작이십니다. 한 시간 정도 전에 오셨습니다.”

뒤르망 남작은 디아카 가의 먼 방계 출신으로, 대표적인 디아카 가 세력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키올레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를 자주 보았었다. 하인들이 허리를 굽실대며 물러가고 난 뒤 키올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전시관 입구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바깥까지 새어나오지 않았으나, 잠깐 들었던 내용이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아페토의 장례식이라.’

레노어 샨 아페토. 그자의 장례식이 오늘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참석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아카 공작이 저리 화를 내는 걸 보면 분명 심상치 않은 사건이 생겼음에 틀림없었다.

‘설마 혹시 또… 그놈과 관련된 일은 아니겠지.’

심상치 않은 사건이라 하니 레노어가 죽던 날 그 파티에서 마주쳤던 검은 머리의 마병단 사내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날 키올레는 그 마병단 사내와 함께 몰래 레노어의 시체를 뒤지러 갔고, 심지어는 그를 돕는다는 서약 때문에 단신으로 펠레타 공작을 상대하는 미친 짓까지 저질렀었다.

다행히도 셋째 형의 악의 서린 고자질에도 불구하고 디아카 공작이 막내아들보다는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더욱 신경을 쓰느라 그 일은 크게 문제되지 않고 잊혀졌으나, 키올레는 지금까지도 찝찝한 기분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신경을 끄는 편이 좋다. 그런 이성의 목소리가 열심히 머리를 두드렸으나 발걸음이 왠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후우. 이보게. 이제 돌아갈 참이니 내 마차를 대기시키고, 수행 하인을 오라 이르게. 아, 그리고 목이 타니 베눅주 반 잔을 준비시켜 가져다 두고…….”

그때, 전시관 안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온 뒤르망 남작이 하인을 불러 무어라 지시를 내리다가는 고개를 돌려 키올레를 발견했다.

“응? 키올레가 아니냐. 오랜만이로구나.”

“뒤르망 남작님.”

키올레가 이름을 부르자 남작의 늙은 생쥐 같은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오, 그래. 갑옷을 걸친 걸 보니 이제 막 기사단 일을 마치고 돌아왔나?”

“네.”

“멋지군, 아주 멋져. 마치 젊은 시절의 공작님을 보는 듯해.”

보통의 귀족 자제라면 칭찬에 감사하는 태도를 보였겠으나, 키올레는 그런 입발린 칭찬 따위에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코끝을 찡그리며 그가 빠져나온 전시관 안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안에 있을 디아카 공작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늘 그렇듯 수십 년간 수집해 둔 마석들을 둘러보러 안쪽 깊숙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사실 방금 앞을 지나치다 아버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그거라면…….”

키올레의 쌀쌀맞은 태도에 익숙한 뒤르망 남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다가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레노어 샨 아페토의 장례식이 있었던 건 알고 있지?”

“네.”

“내 쪽 사람이 거기 참석했었는데, 식이 열리지도 않고 파행되었다지 뭐냐.”

“파행…이라면.”

“관이 들어오기 전 갑자기 들이닥친 펠레타 공작과 아페토 가의 셋째가 엄청난 일을 저지른 모양이야.”

역시 펠레타 공작과 관련된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는 기분에 키올레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엄청난 일이라뇨, 뭡니까?”

뒤르망 남작은 잠시 이 일을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흠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펠레타 공작이 레노어 샨 아페토의 죽음은 다른 이의 탓이라 주장했어. 증거로 죽은 이가 생전에 셋째 동생에게 보냈다는 새로운 편지를 제시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관 뚜껑을 열어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독의 흔적을 보여주었다더구나. 정말 놀라운 일이지.”

“다른 이 탓이라는 건…….”

“광휘궁에 계신 분 말고 또 있겠어.”

레노어를 죽인 진짜 범인이 황태자라는 건 디아카 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디아카 공작은 상의 없이 이루어진 황태자의 행동에 놀라고 기막혀 했으나, 이 일로 펠레타 공작에게 누명을 완벽하게 덮어씌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되리라는 계산 하에 겨우 모른 척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 그 모든 계획이 전부 일그러졌다. 장례식에 왔던 수많은 이들이 얼마나 떠들어 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진 뒤르망 남작이 혀를 차며 손가락에 낀 에메랄드 보석 반지의 알을 관자놀이에 대고 꾹 눌렀다. 지병인 편두통 때문에 그는 언제나 그런 반지를 끼고는 했다.

“정말 제대로 말려들었어. 그쪽에서 설마 두 번째 편지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황태자 전하께서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셨다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뒤통수를 맞게 된 우리만 하겠느냔 말이야.”

“……펠레타 공작의 주장을 아페토 쪽에서는 믿었습니까?”

“믿었으니 장례식을 그대로 진행하지 않고 중단시켰겠지? 시신이 담긴 관도 신전이 아니라 아페토 본저로 옮겼다니까.”

“…….”

“후우. 공작께서도 참 속이 시끄러우실 거야. 여태 인내심 있게 잘 해오셨던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왜 나서셔서는 이리 말썽이신지.”

“남작님! 마차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르신 사항 모두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오, 그래. 곧 가지.”

그때 때마침 나타난 하인의 목소리에 대답한 뒤르망 남작이 키올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게다. 공작께서는 언제나 답을 마련하시는 분이시니까. 그러면 다음에 보자꾸나.”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급 루비 지팡이를 꼭 쥔 채 바쁘게 사라져 버렸다. 키올레는 마치 도망치듯 사라지는 뒤르망 남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디아카 공작이 있는 전시실 쪽이 아닌 제 침실이 위치한 위층 쪽이었다.

‘새로 발견된 독의 흔적이란 건 역시 그때 그놈이 시체에 대고 불을 밝혔을 때 보였던 그건가.’

검은 머리 마병단 사내는 레노어의 시신에서 빛나던 흔적을 보며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이라 말했다. 분명 그가 펠레타 공작에게 정보를 알려주어 오늘의 일을 꾸몄음에 틀림없었다.

‘젠장. 서약의 증표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어쨌든 그놈이 그날 죽지는 않은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그리 놀라서 난리를 부렸지? 멍청한 짓을 했어. 괜히 아버님께 죄를 지은 기분만 들잖아.’

그 뒤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너무 놀라고 찝찝하여 그날의 일을 모두 기억 저편에 묻으려 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키올레는 제가 아버지와 디아카 가를 배신한 듯한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갑옷을 벗었다.

‘그 빌어먹을 놈.’

이름이 분명 유더 아일이라고 했었다. 큰 마음을 먹고 디아카 가 쪽으로 오라는 제안을 했는데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거절하던 얼굴만 떠올리면 아직도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그때 그냥 두고 갔어야 했는데!’

그 새카만 놈 때문에 키올레는 몇 달째 하인들에게 마음대로 화를 내지 못했다. 욕을 할라치면 서약의 효과로 저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려 해 움찔 놀라 물러서기 일쑤였다.

부하나 동료 기사들을 대할 때도 그놈이 했던 개소리 같은 말들이 자꾸 떠올라 불편한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는 했는데, 기묘하게도 그럴수록 다른 이들이 전에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어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간 바닥을 기던 제 평가가 타인 사이에서 점차 조금씩 올라가고 있기 때문임을 모른 채, 키올레는 유더에게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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